스님법문/정목스님_유나방송

[유나방송] 고요한소리_ 14장 조사연구를 거친 몇 가지 재생사례 (어떤 과정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는가 13)

Buddhastudy 2021. 5. 20. 19:47

 

 

첫 번째, 쁘라모드의 경우

쁘라모드는 19441011일 인도 웃따르 쁘라데쉬의 비사울리에서 방키 랄 샤르마 교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두 돌 반쯤 지나자 그는 어머니에게

모라다바드에 밥할 줄 아는 자기 아내가 있으니 어머니는 요리하지 마시라고 말했다.

모라다바드는 비사울리에서 90마일이나 떨어진 도시였다.

그는 비스킷 과자에 대해 유난히 관심이 많아서

누구든 비스킷을 사는 것을 보면

모라다바드에 큰 비스킷 공장을 갖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큰 상점에 데리고 가면 모라다바드에 있는 자기 가게가 훨씬 크다고 했다.

그곳에는 또 큰 소다수 공장도 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그는 그의 이름이 빠라마난드이며 모한 랄이라는 형제가 있고,

모한 형제라는 이름으로 그들 둘이서 운영하는 비스킷과 소다수 공장이 있다고 했다.

그는 커드를 너무 많이 먹은 탓으로 위장병이 생겨 그 때문에 죽었다고도 했다.

 

쁘라모드의 부모는 아이가 전생에 관해서 하는 이러한 말들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런데도 쁘라모드는 계속 그런 말들을 했고 때때로 그를 모라다바드로 데려다 달라고 졸랐다.

그러한 이야기가 모한 형제라는 상호로 소다수와 비스킷 공장을 소유하고 있는 그 집안 사람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집에서는 형제 중의 하나인 빠라마난드가 194359일에 죽었다.

그는 커드를 지나치게 먹은 결과 만성 위장병을 얻어 고생했으며 사인은 맹장염과 복막염이었다.

그 집 식구들이 들은 소문이 죽은 빠라마난드의 상황과 부합하므로

주인 모한 랄이 친척들을 데리고, 죽은 빠라마난드라고 주장하는 쁘라모드를 보러 비사울리에 왔다.

그때 쁘라모드가 친척을 만나러 먼 시골에 가고 없었으므로 그들은 그를 못 만났으나

소년의 아버지 샤마 교수가 아들을 모라다바드로 데려가기로 약속하였다.

얼마 후에 아버지는 이 약속을 지켜 다섯 살난 소년을 모라다바드로 데리고 갔다.

두 사람은 기차를 타고 갔는데 철도역에서 내리는 즉시

쁘라모드는 모한 랄이 전생의 형제였음을 알아보고 그에게 달려가 정답게 끌어안았다.

철도역에서부터 모한 랄의 집까지는 소형 이륜마차인 통가로 타고 갔다.

 

가는 도중 쁘라모드는 한 건물을 알아보고 전에는 시청이었다고 말했으며 그들의 가게가 거기에서 그리 멀지 않다고 했다.

그때 쁘라모드는 시청, 타운홀이라는 영어를 썼는데

그 말이 그의 고향 비사울리에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도

그런 표현을 쓴 것이 눈길을 끌었다.

그들이 탄 통가는 쁘라모드의 반응을 지켜보기 위해 일부러 가게 앞에서 서지 않고 지나칠 듯해 보였다.

쁘라모드는 즉시 이곳이 그 가게라고 외치며 통가를 멈추도록 했다.

마차가 멈추자 소년은 전에 살던 집이 여기라며 앞장서 집 쪽으로 길을 안내했다.

그리고 예배 장소로 마련된 외딴 방으로 들어가 경건한 자세로 잠시 머물렀다.

 

집에 들어가자 그는 전생의 자기 어머니를 알아보았다.

그는 전생의 부인을 알아보고 왜 이마에 빈두 점을 찍지 않았느냐고 캐물었다.

그는 전생의 딸과 두 아들과 몇몇 친척을 알아보았으나, 아버지였던 그가 죽은 다음 모습이 크게 변한 그의 맏아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소다 공장에 들어섰을 때, 그는 기계가 작동되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실은 쁘라모드가 어떻게 하는지 보기 위해 물이 공급되는 연결부위를 일부러 멈춘 것이었다.

그는 즉시 물 공급라인이 끊어져 기계가 작동하지 않는 것을 알아내고

작업자들에게 어떻게 해야 되는지 설명해주어서 곧 제대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작업자들에게 이 같은 지시를 내렸던 아이는 그때 겨우 다섯 살배기였다!

 

이틀동안 쁘라모드는 모라다바드에서 즐겁게 보내면서 여러 장소와 건물에 익숙한 모습을 보였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허물없이 대했으며

심지어 그에게 빚이 있는 무슬림 채무자까지 알아보았다.

무슬림 채무자를 보고 그는 당신한테 준 돈을 되돌려 받아야겠다고 했다.

아이가 모라다바드를 너무 좋아하므로 비사울리 집으로 데리고 가기가 매우 힘들었다.

마침내 아버지는 아이가 잠든 사이에 데리고 돌아갔다.

그 후 어느 날 그는 모라다바드를 다시 방문하려고 몰래 집에서 도망나와

비사울리 철도역까지 나갔으나 집으로 다시 끌려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례는 쁘라모드가 모라다바드를 방문한 지 몇주 안되서 베나레스 대학의 아트레야 교수가 처음으로 조사하였다.

몇 년 후 이 사례를 버지니아 대학 이안 스티븐슨 교수가 다시 조사하였는데

그는 이 사례를 한번 더 조사하기 위해 재차 방문하였다.

이 사례에 대한 그의 설명은 기록된 증거의 분석 평가 기록과 더불어

그의 책 <영혼 전생을 암시하는 스무 가지의 사례>에 들어 있다.

 

두 번째, 산띠 데위의 사례

샨띠 데위는 1926년 델리에서 태어났다.

3살 무렵부터 이 소녀는 델리에서 60마일 떨어진 무뜨라라는 마을에 살았던 전생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소녀는 전생의 이름이 룩디이며 옷가게를 하는 상인 카다르 낫 쵸비와 결혼했다는 것이다.

또 사내아이를 낳고 열흘 뒤에 죽었다고 했다.

샨띠 데위가 계속 전생얘기를 계속 해댐으로 소녀의 부모가 혹시나 하고 카다르 낫 쵸비에게 편지를 띄웠는데, 놀랍게도 그가 답장을 보내왔다.

이 답장에서 그는 샨띠 데위의 말이 모두 옳다고 확인해 주었다.

나중에 그는 친척을 시켜 이 소녀를 방문하게 하고 그 자신도 예고 없이 그녀를 찾아갔다.

소녀는 그를 알아보았다.

그 후 바로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소녀가 고향인 델리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리해서 그 소녀의 무뜨라 방문과 이에 따른 반응을 조사하기 위해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무뜨라 역에 내리자, 샨띠 데위는 많은 군중 속에서 쵸비의 또 다른 친척을 알아보았다.

소녀를 태워 가려고 준비해 놓은 마차에 탈 때, 사람들은 소녀를 보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마부에게 지시해주라고 시켰다.

그러자 소녀는 쵸비네 집까지 가는 길을 곧장 가리켰으며

그 집은 페인트칠을 다시 한 다음이어서 겉모양이 달라졌는데도 소녀는 그 집을 알아냈다. 소녀는 쵸비의 아버지도 알아보았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사람들이 집안의 구조와 가구 배치에 대해 여러 모로 소녀를 떠보았는데, 소녀의 대답은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소녀는 또한 모인 사람들 속에서 50여명 정도를 알아보았다.

쵸비 부모의 집으로 가자마자 소녀는 특별히 한 방을 지적하며 그곳에 묻어둔 돈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곧 그 장소를 파헤쳤으나 돈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쵸비가 그 돈은 그녀가 죽은 다음 자신이 파냈다고 고백했다.

이 사례는 1936년 델리의 국제 아리안 연합이 조사를 했고

이안 스티븐슨의 책 <전생기억이라 주장하는 자료에서 가려낸 생명존속의 증거>에 소개되어 있다.

 

세 번째, 냐나띨라께의 사례

냐나띨라께는 1956214일 실론의 딸라와켈레에서 16마일 떨어진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다.

두어 살쯤 되면서부터 이 소녀는 전생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그 마을 사람들이 딸라와켈레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소녀는 즉시 그 이 바로 전생의 부모가 살던 곳이라며 식구들 이름까지 댔다.

이 사례를 발굴한 데는 캔디의 H. S. 니상까 씨의 공로가 컸고

또 콜롬보 와지라라마의 삐야닷시 스님의 역할도 컸는데

삐야닷시 스님은 니상까 씨와 함께 아주 흥미롭게 열심히 이 사례를 추적했다.

그들은 소녀의 집을 방문하고, 수줍어하는 소녀를 잘 달래가며 소녀의 전생과 살던 집의 세부사항에 대해 물어보고 도움되는 정보를 많이 뽑아낼 수 있었다.

 

소녀가 전생에 살던 집은 딸라와켈레에 있는 차 가공공장 가까이에 있었고

전생에는 남자아이였으며 여동생과 함께 기차를 타고 학교에 다녔는데

학교가는 길에 긴 터널을 통과했다.

모든 상황이 해튼에 있는 스리빠다 학교를 가리키고 있다.

소녀는 어느 날 동생과 함께 길에 서 있다가 여왕이 기차로 여행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실제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1954년 실론을 방문하여 기차로 딸라와켈레를 통과한 일이 있었다.

 

삐야닷시 스님과 니상까 씨는 함께 냐나띨라께가 남자아이로 살다 죽었다는 집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들은 여러 군데로 여러 사람을 찾아다니며 문의해 봤다.

그들은 사망자 등기소를 찾아가 여러 시간 열람해보았으나 얻은 것이 없었다.

마침내 조사를 거드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냐나띨라께를 딸라와켈레로 데려갔다.

소녀는 그 마을에서 여러 건물을 알아맞혔지만 자기가 살던 옛집은 찾아내지 못했다.

그 집은 그가 죽은 다음 헐어내버렸던 것이다.

마침내 그들은, 해튼의 스리빠다 학교에 다니다가 12살의 나이로 1954119일에 죽은 한 소년의 부모를 찾아냈다.

그 부모에게 문의해서 알아낸 소년의 전생의 세부사항들이 냐나띨라께가 자기 전생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과 일치됨은 물론이었다.

 

삐야닷시 스님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이 딸라와켈레 휴게소에서 공청회를 열어 많은 증인들을 조사했는데,

그들 중에는 죽은 소년 띨라께라뜨나의 가족, 띨라께라뜨나를 가르쳤던 교사, 그리고 해튼에 있는 스리빠다 사립중학교 교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많은 군중이 모인 이 회의에서 냐나띨라께는 처음으로 띨라께라뜨나의 어머니를 대면하였는데,

냐나띨라께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 다음 부드럽게 말하였다.

이 분이 딸라와켈레의 제 어머니입니다.”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1961년 딸라와켈레를 방문해서 이 사례에 대해 독자적으로 조사를 진행했다.

그의 설명은 기록된 증거의 분석 및 논평과 함께 <영혼 전생을 암시하는 스무 가지의 사례>에 나온다.

니상까 씨는 이 사례를 싱할리어로 쓴 <다시 태어난 소녀>라는 책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네 번째, H. A. 위제이라뜨너의 경우

H. A. 위제이라뜨너는 1947117, 발랑고다에서 몇 마일 떨어지지 않은 작은 마을 칼토타에서 H. A. 띨레께라뜨나 하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그의 오른편 가슴 빗장뼈와 겨드랑이 사이 아래쪽에 뚜렷한 함몰이 있었다. 그의 오른쪽 손은 가늘게 여위었으며 오른손의 손가락은 정상 길이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세 살 때쯤 혼자 있을 때는 언제나 집 주위를 빙빙 돌며 혼자서 중얼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이 이상한 행동을 맨 처음 발견한 것은 그의 어머니였는데, 그녀는 아들이 자기 손이 기형인 것은 전생에 아내를 칼로 찔렀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다.

그는 툭하면 그의 오른손을 들여다보며 그런 말을 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 띨레께라뜨나는 아들이 그런 소리를 못하게 하려고 애써 보았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런데 기묘한 것은, 1928년에 라뜨란 하미라는 띨레께라뜨나 하미의 동생이 자기 처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에 처해진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위제이라뜨너가 말하는 그 전생의 상황과 살인혐의 내용이

라뜨란 하미의 일생 및 살인혐의 내용과 너무나 부합되었다.

 

전생을 살았다고 주장하는 위제이라뜨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맨 처음의 주요인물은 발랑고다에 머물던 아난다 마이뜨레야 장로 스님이었다.

그는 소년과 그 부모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소년은 자기가 처형당했던 일과 그에 앞서 일어난 일들까지 상세히 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전생에 사형당하기 전 그는 자기가 죽은 다음 다시 형 곁으로 돌아오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도 했다.

띨레께라뜨나 하미는 살해된 여자의 친척들이 아이에게 복수할까 두려워 이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후에 프란시스 스토리씨가 좀 더 상세한 조사를 하게 되었고 이안 스티븐슨 교수도 실론에 왔을 때 이 문제를 추적하였다.

그는 라뜨란 하미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서류철을 조사한 결과 위제이라뜨너가 얘기하는 부부간의 불화원인이 이 사실과 부합된다는 사실을 상당한 정도로 갖게 되었다.

 

대법원 기록상에 나타나는 의학적인 증거는

살해된 여인이, 여러 상처 가운데 왼쪽 겨드랑이 바로 아래에

폐에까지 이르는 깊이로 길이 2인치 반, 너비 1인치 반의 베어서 벌어진 상처가 있었음을 말해주었다.

기묘하게도 위제이라뜨너의 가슴에도 역시 뚜렷한 공동이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은 그것이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이라는 사실이었다.

과연 그것은 그가 전생에 아내에게 가한 상해를 일깨우는 씻을 수 없는 저주일까. 아니면 단지 우연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 잔혹한 행위는 오른손으로 저질러졌었다.

지금 그의 오른손과 팔의 상태는 업보의 생생한 예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 역시 우연일 뿐일까.

그러나 아무튼 소년이 그의 전생에 관해 아난다 마이뜨레야 장로 스님에게 한 설명은

소년의 부친이 마이뜨레야 장로 스님에게 한 설명이나 그 지역 주민이 알고 있는 것과 모두 부합되었다.

참고로 필자 스스로도 이 사례에 대해 독자적인 조사를 해보았다는 것을 언급해 두는 바이다.

 

이 사례의 상세한 설명은 기록된 증거의 분석, 논평과 함께 이안 스티븐슨 교수의 책 <영혼 전생을 암시하는 스무 가지의 사례>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