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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방송] 고요한소리_ 15장 질문과 대답 (고요한소리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는가 14 )

Buddhastudy 2021. 5. 24. 19:00

 

 

지금까지 재생이라는 주제를 여러 측면에서 검토해 보았으니

이제는 이 주제를 이해하려고 할 경우 으레 제기되는 몇 가지 질문들을 다뤄보고자 한다.

다음 문항들은 재생을 주제로 한 여러 차례의 강연에서 저자에게 제기되었던 질문들이다.

 

질문 1>

당신은 과거생을 자동적으로 기억재생해낸 이런 사례 중 일부가 일부러 꾸며진 조작극으로 끌어 모은 정보를 천진한 어린이에게 주입시켜서

누가 물으면 그 정보를 앵무새처럼 말하도록 시켰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대답>

순전히 이론상으로만 말하라면

그러한 가능성은 부인할 수 없다라고 대답해야겠지요.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꾸며낸 전생의 이야기를 어린아이에게 주입 훈련시켜 성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선 어린이는 의심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훈련받은 조사관들의 능란한 교차 검사에 쉽사리 걸려 넘어갑니다.

더 나아가, 가짜 전생 이야기를 사실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하여서는 이 사기극의 하수꾼들이 어딘가에서 실제로 죽었던 사람의 생애에 관해 다량의 정보를 자세히 알아내야 합니다.

이 조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던 시절에 했던 활동과 관계있는 사건들이나 환경을 폭넓게 망라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죽은 장소가 아주 멀리 떨어진 시골이라면, 그와 관련된 수많은 세부사항을 모은다는 일은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극히 어려워집니다.

 

그 다음에 이 방대하게 축적된 정보를 고스란히 어린아이의 마음에 넣어 주어야 하며

더 어려운 것은 반드시 이들 구체적인 내용들이 어린아이의 마음속에 시대 순으로 잘 간직되도록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 사기극을 꾸미는 사람들이 아이의 부모들이라면

아이의 과거생에 관하여 알고 있든가

아니면 아는 것으로 꾸며낸 하인이나 이웃, 친척, 어린아이의 친구 같은 여러 사람들을 조작 과정에 합세시켜야 합니다.

교차 검사의 범위는 넓고 방대해서 거짓 이야기를 조작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받게 될 모든 종류의 질문을 미리 다 알고 있을 수는 없으며

이 경우 또 모든 증인의 말이 서로 일치하고 모순도 없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거짓 이야기의 조작자는 이 어려운 연극의 입증 증거들을

한 점의 결함도 없이 완벽하게 연출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훈련된 조사관은 한 번의 조사만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이것은 여러 사람의 협조가 우선해야 하고 엄청난 시간과 돈 그리고 에너지를 들여야 하는 중대한 모의 사건인 것입니다.

대체 무엇을 바라고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부모가 이들 어린이를 팔아 약간의 명성을 맛보려고 그러는 것이라 할지 모르지만

반드시 기억해 둘 일은 그런 대중적 인기란 미심쩍기 그지없는 것이어서

아무 때고 조사관이 다시 방문하여 어린이와 증인을 재검사할 경우에는 허물어져 버릴 것이 뻔합니다.

그런 거짓 연극을 연출하는 데 드는 엄청난 노력을 보상받을 길은 전혀 없습니다.

 

 

질문 2>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옮겨가거나 전이되는 무엇이 없이 재생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대답>

이 질문은 우리 안에 죽음의 찰나에 옮겨가거나 전이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무언가는 안정되고 변하지 않는 무엇일 거라는 가정을 내세웁니다.

무언가가 다음 생으로 계속 이어지려면 금생 내내 지속되는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불교 문헌을 바탕으로 마음과 몸을 엄밀히 분석해보면

앞 장에서 간단히 지적한 대로, 몸과 마음은 매 찰나 변화를 겪고 있으며

무자비한 변화의 법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 무엇도 머물러 있거나 그대로 남아있을 여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장에서 기술한 대로, 생성의 법칙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순간에도 무언가 다른 것으로 되는 과정에 있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계에서 무언가 변하지 않고 안정적인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질문이 나오는 것은 인과 법칙의 소리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작용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 데서 비롯됩니다.

과보는 꼭 그 원인과 물리적으로 관련지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과보는 단지 원인의 결과일 뿐입니다.

 

사람이 사진을 찍을 때, 사람에게서 사진까지 무엇이 건너갑니까?

사람이 거울 앞에 서 있을 때 그의 상이 거울 속에 있다고 무엇이 사람에게서 거울로 건너갑니까?

그것이 바로 원인을 따라 나타나는 결과의 한 예입니다.

 

윌리엄 크룩스 경은 에딘버러에서 행한 정신과학 강의에서

의지를 행사함으로써 마음이 금속지레 같은 물건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실험을 통하여 증명되었다.” 라고 밝혔습니다.

 

그러한 것이 염력의 성질입니다.

더 나가서, 원인적 요인이 정신적이거나 심령적인 것이라면

거리는 인과 법칙의 작용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심령적 차원에서 시간과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식조차도 옮겨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은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고

사아띠라는 비구가 말했다가

부처님께 심한 꾸중을 들은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음 생이 생기도록 하기 위해

무언가가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넘어가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때로 사람들은 사람이 죽고 나면 천국으로 혹은 지옥으로 간다는 막연한 말을 합니다.

그것은 태양이 실제로는 동쪽에서 떠오르는 것이 아닌데도 동쪽에서 뜬다고 하듯이, 죽은 사람이 어디로도 가는 것이 아니건만

다만 표현상의 편리를 위해 인습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뿐입니다.

즉 은유적 표현인 셈입니다.

 

금생은 전생에서 지었던 원인의 결과입니다.

과거생에 했던 생각과 말과 행위들이 강력한 에너지를 만들어

현생의 일어남을 조건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업과 환생>에서 냐나띨로까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우리가 자아라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이 지속적 변화과정, 찰나찰나를, 나날을, 연년을, 생생을 이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일 뿐이다.

이는 마치 바다의 표면 위를 서둘러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파도가

실제로는 에너지의 전파를 받을 때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언제나 새로운 물의 질량이 계속 일어났다 꺼지는 것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다.

바로 그와 같이, 엄밀히 생각할 때, 궁극적 의미에서는

윤희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어떤 영구적 자아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생을 향한 충동과 의지에 내몰려 이따금씩 일어나는, 육체적 정신적 현상들이 진행되는 과정일 뿐이다.”

 

에너지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가지 않습니다.

한 장소에서 드러나 있기를 그치고

다른 장소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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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3>

만약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다시 태어난 사람은 앞의 생에서 죽은 사람과 같은 사람인가요?

그는 죽은 사람과 똑같습니까, 아니면 다릅니까?

 

대답>

죽은 사람의 몸이나 마음이

다시 태어난 사람 속에 들어가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두 사람 사이에 인격적인 동일성은 없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 안될 중요한 사실은

죽은 사람과 재생한 사람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릴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영구적인 불변의 실체가 아님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고정되어 있거나 정적인 무엇이 아닙니다.

그것은 역동적입니다.

그것은 식의 상태 하나하나가 실제로는 그게 아닌데도 마치 영구적인 것처럼 보일 만큼

빠른 속도로 이어지는 진행 과정, 연속, 혹은 흐름입니다.

 

또한 우리는 한 식의 상태에서 다른 식의 상태로 변화하는 이 과정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것은 어떤 원리 때문인가도 알아보았습니다.

죽음의 찰나 마지막 식의 상태가 정지되면

그 결과로 다른 차원이나 장소에서이긴 하지만

다른 식의 상태, 재연결식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현상은 생각이 힘 즉 에너지이기 때문에 가능하며

바로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따라 육체와 함께 소멸될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변화의 과정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죽는 사람의 정신 쪽은 연속성을 가집니다.

죽는 사람의 마지막 식의 상태와 재생하는 사람의 최초의 식의 상태는 같은 인과의 흐름에 속합니다.

그런 이유로 두 사람 사이에 동일성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단순히 동일성이 있다고 해버리는 것도 여러 모로 잘못된 생각을 낳기 쉽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은가, 아니면 다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은

밀린다 왕이 똑같은 내용의 질문을 한 데에 대해 나가세나 스님이 한 다음의 대답일 것입니다.

완전히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닙니다.”

이 대답은 앞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없다고

혹은 교묘한 말장난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한 비판은 성급하고 지나친 것입니다.

모든 질문에 대해 다 아니요로 속시원하게 대답해 줄 수는 없으니까요.

 

그때 나가세나 스님은

밤 이경에 켜 놓은 촛불의 불꽃은 그날밤 삼경의 불꽃과 같은 것인가요?”라고 반문하는데,‘아니요나 다 그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노인이 되었을 때 당신은 그 노인이 옛날의 어린아이와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 상황을 아니요로 딱 부러지게 말해 줄 수 있겠습니까?

이 경우에도 완전히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닙니다.”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경우 어린이와 노인 사이에는 어린아이 적에 저지른 행위에 대해

노인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충분한 동일성이 존재합니다.

죽은 자와 다시 태어난 사람 사이에도

이와 유사하게 전자의 행위에 대해 후자가 책임져야 하는 동일성이 충분히 존재합니다.

 

<청정도론>17장에 나오듯이

연속되는 흐름에는 동일성도 없거니와 상이성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연속되는 흐름 속에 절대적 동일성이 내재한다면 우유로부터 요구르트가 만들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한편 절대적으로 다르다면 우유에서 요구르트가 나올 수 없습니다.

인과관계로 생겨난 사물은 모두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절대적으로 같다고도 절대적으로 다르다고도 가정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