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정목스님_유나방송

정목스님의 음성으로 듣는 김재진 산문집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

Buddhastudy 2021. 6. 9. 19:55

 

 

미안하다 아들아

오래 누워있어서

얼른 가지 못해 미안하구나

바깥엔 몇 번이나 계절이 지나가고

알아듣기 힘든 발음으로 어머니는 입술을 움직인다.

 

봄이 와도 미안하구나

가을이 와도 미안하구나

계절 바뀌는 것도 송구하다며

안 가고 오래 살아 죄인 같다며

떨어지는 꽃잎처럼 물기 다 빠진

입술 달싹거려 사죄한다.

 

어머니와 나는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감정 표현에 익숙한 세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 한다는 말은 못 했지만

구부러져 불편한 손으로도

어머니는 문병 온 사람에게 손들어 인사를 했다.

 

겨우 손목을 세워 흔드는듯 마는듯하는 인사였지만

그건 이번 생에선 다시 못 볼 지인들을 향한

작별의 말 같은 것이었다.

 

어린아이가 손가락을 폈다 쥐었다 죔죔하듯

쪼그러져 볼품없는 손으로 하는 그 인사는

보는 이의 마음속에 꽃 한 송이씩을 피웠다.

 

꽃이 별것이겠는가

꽃은 나무가 피워 올린 탄식 같은 것이다.

 

수많은 탄식이 쌓여 산을 이루고

그 산을 등에 진 채 우리는 한세상을 넘는다.

 

진흙 속에 피는 연꽃처럼

오므렸다가 펴는 어머니의 그 손을

우리는 연꽃손이라 불렀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연잎을 떠올리게 하는 그 인사를

우리는 연꽃인사라고 불렀다.

 

연꽃은 지고 계절은 가을로 넘어갔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람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가을날 새벽

어머니의 연꽃인사는 낙엽과 세상에 이별을 고했다.

 

꽃은 지고 나면 다음 해에 또 피지만

사람은 가고 나면 돌아올 줄 모른다.

 

어머니께 하지 못한 한마디는

오래오래 내 가슴속에 후회로 남아 있다.

 

사랑한다는 말 한 번 하지 못한 시간을 돌아보며

손가락 움직여 나는 허공에 엄마라고 써본다.

아무도 없는 허공 위로

사랑해요하고 불러본다.

 

사람이 떠난 자리엔 후회만 남는 법

아끼지 않아도 되는 말을 아꼈다는 자책으로

나는 어둠 속에 탄식 하나 토해놓는다.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

언제라도 사랑한다는 말은 늦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