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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범스님] 46. 부처(여래)는 즉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 깨달음의길

Buddhastudy 2021. 10. 26. 18:56

 

 

 

<금강경> 29장 위의적정분_ 행주좌와가 고요하다

 

본문에 보시면

수보리야 약유인이 언하대_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말을 하기를

여래 약래약거약좌약와라 하면_ 여래께서 온다, _ 어조사, 간다, 앉는다, 눕는다고 말을 한다면

약유인언_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되

여래를 보고 여래가 온다든지, 여래가 간다든지, 여래가 앉는다든지, 여래가 눕는다든지

이렇게 한다고 말을 하면

시인은_ 이 사람은

불해아소설의니라_ 불해_ 알지 못한다. _ 여래. 소설의_ 여래가 말한 뜻. 여래 소설의를 불해하는 것이니라_ 여기서 아는 여래거든요, 내가 말한바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라.

하이고오_ 왜냐하면

여래자는_ 여래라고 하는 이는, 여래란, _ 지인 지 자, 그 자체를 가르친다. 지칭 지 자, 가리켜서 말하는 자다.

무소종래며_ 어디로 부터 온 데가 없다. 부터 온 곳이 없다. _ 장소, 그런 데, 그런 곳.

_ 어디서부터 온 데가 없다. 온 바가 없다. 똑같은 말이죠. 바나 데나.

역무소거일새_ 또한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온 데가 없고 가는 데가 없다.

고명여래니라_ 그렇기 때문에 여래라고 이름하나니라, 말하나니라, 여래라고 일컫나니라.

 

요 부분이 위의적정분 제 29

위의_ 행주좌와를 위의라고 그럽니다.(걷고 머무르고, 앉고, 눕는 4가지 동작)

_ 다니고,

_ 그칠 지, 멈추고,

머문다 그러면 먹고 자고, 머문다 그러면 먹고 자고 쉬고 이거 전체를 머문다 그러는데 주거라고 그 주가 아니고, 가고 멈추고,

여기서 주는 지아라, 그칠지, 가기도 하고 그치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고

행주좌와를 위의라고 그럽니다. 위의. 거동, 모습, 거동이죠. 위의는 거동인데

행주좌와, 움직이기도 하고 그치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고

그게 우리 일상생활이고 일상 모습입니다.

 

이것이 적정하다라고 그래요.

적정이라는 말은 모양도 소리도 나타낼 수가 없다, 이 소리거든요.

적이라고 하면, 모양을 볼 수가 없다.

_ 소리를 볼 수 없다.

 

쉽게 말하면 적_ 색이 적별했다, 색성향미촉법, 육진 경계, 육진_ 보이고 들리고 하는, 이 색이 적멸해.

소리 적멸해요, 소리가 잡히지 않을 때 정이라고 그러고

눈으로 보이는 이거 잡히지 않을 때 적이라 그러는데

위의가 적정하다_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다. 이겁니다.

이게 위의적정분인데

 

금강경 32분 중에 가장 짧고, 가장 외우기 쉽고, 가장 아주 분명하게 나타낸 경문입니다.

여기서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하이고요, 그 전까지는 전제경문, 전제를 한 경문이고, 서론이죠.

여래자는 무소종래며 역무소거일세 고명여래니라, 이걸 사구게라고 그럽니다.

사구로 되어 있거든요.

글자가 넉 자씩 안 되어있어도 구절이 사구절이에요, 4구절이에요.

이것도 금강경 사구게 중 하나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게 반야를 표현한 아주 중요한 경문이에요, 반야.

 

이걸 말하기 위해서 앞에 말을 한 거예요.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온다고 하거나 간다고 하거나 앉는다고 하거나 눕는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여래가 말한 뜻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랬죠?

하이고요_ 왜냐하면, 여기까지가 서론이고 바로 얘기하는 거죠.

여래란 온 데가 없고, 여래란 가는 데가 없다.

그러므로 여래라고 한다.

여래자는 무소종래 역무소거 고명여래, 이렇게 되거든요.

 

이러한 말씀이 금강경에 계속 되었어요, 앞에.

여리실견분 제 5에서도

제상이 비상임을 보면 여래를 본다_ 모든 상이 모든 형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여래를 본다. 이러고요

또 그 위에 32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다, 이런 말 많이 나왔고요

구족색신으로는 여래를 못 본다.

32상이 아닌 걸 통해서 여래를 또 볼 수 없다,

32상으로도 못 보고 32상이 아닌 거로도 못 본다,

이 말은 부주색성향미촉법, 색성향미촉법, 육진에 머물러서도 여래를 못 보고

색성향미촉법이 아닌데 머물러서도 여래를 못 본다.

그래서 색성향미촉법에도 머물지 않고, 비색성향미촉법에도 머물지 않는다, 이게 반야거든요.

 

색에도 머물지 않고 공에도 머물지 않는다, 이 말인데

이게 왜 이러냐?

색이라고 하는 것도 자체 성질이 없고요, 자성

공이라고 하는 것도 자체 성질이 없어요.

그러면 없다라고 하는 것도 자체 성질이 없느냐? 없어요.

그래서 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조견입니다. 비추어서 본다.

 

보이는 게 자체 성질이 있느냐? 없고요

안 보이는 게 자체 성질이 있느냐? 없고요

그러면 자체 성질이 없다라고 하는 그것이 또 자체 성질이 있느냐? 없다.

그럼 여기서 뭐가 문제가 되냐?

없다라고 하는 한 생각은 남아있거든요.

영원히 못 들어가는 거예요.

불생이 아니에요, 이미 생겨버렸어요.

 

이 불생불멸이라고 하는 것은

비추어보는 걸 통해서 들어가는 거지, 인식을 통해서는 못 들어가요.

인식의 경지가 아니고 조견의 경지다, 인식이 아니고 조견이다.

왜냐?

없는 거 까지 없다라는 한 인식이 떠올랐거든요.

 

어느 집에 가서
안에 누가 계시오안에서

없어요그러면 그게 없는 거냐고.

그럼 아무 소리가 없으면

, 여기 없는 갚다. 나도 없는데로 가버리면 그만이에요.

없어요, 없어요, 왜 들어와요, 왜 들어와요그러면

말은 없다고 그러는데 흉악하게 있는 거란 말이오.

 

말로는 불생불멸 어쩌고 그러는데

불생불멸이라는 한 생각이 올라왔는데 그건 인식이란 말이죠.

그것은 1218,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안식인식비식, 이게 벌써 18계인 거예요.

조견을 하는 경지다, 이 말이죠.

불생불멸을 하는 건 조견.

 

금강경은 반야바라밀인데, 반야바라밀이라는 게 뭔 소리인가?

수상행식의 인식에서 벗어나는 게 반야바라밀입니다.

수상행식 저 건너로 가는 거예요.

수상행식에서 피안으로 건너가 버렸다.

 

그래서 이 인식에 매이질 않아요.

색이니 공이니 모든 건 인식의 산물입니다.

수상행식의 산물이에요.

느낌, 상상, 행위, 인식, 이 수상행식에서 반야로 넘어 가버리는 거죠.

수상행식이 반야로 가는 그게 바로 뭐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무소종래 역무소거라_ 온 데가 없고 가는 데가 없다.

그럼 뭐냐?

 

자상이 공한 거예요, 자체가 공한 거예요.

그러면 자상공이 아주 문제인데요

인식으로만 지금까지 살았기 때문에 조견을 해본 일이 없어요.

깊이 비춰본 일이 없다고요.

 

그래서 조견이 아니고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대상화해서 알아보는 거예요.

인식은 대상을 아는 것이다.

과거도 기억이 나는 게 전부 대상이죠.

현재도 대상이고. 미래도 대상이고.

대상을 이해하는 것이 인식이거든요.

 

그런데 조견은 대상이나 나나 이런 게 없어요.

무슨 소리가 들렸다, 안 들렸다, 이게 전부 대상입니다.

조견이라는 건 그게 아니에요.

인식이 아니고 조견이다. 깊이~~ 보는 것

아공법공_ 나도 공 했고, 나를 구성한 모든 것도 공 했고.

구공_ 공했다는 인식까지 공했다. 함께 구, 구공에 들어가야 해요.

 

육조단경에도 많이 나오는데,

모든 것을 관찰하되 관찰한다, 관찰 안한다라는 그 분별인식이 없어요.

그걸 도인이라 그래요.

아프다 하면 아프다는 그뿐이지, 거기에 대해서 딴생각이 없어요.

밥을 왜 먹냐? 먹는다 안 먹는다, 그냥 배고프면 먹을 뿐이지,

먹어야 되네, 안 먹어야 되네. 그런 거 없어요.

그게 구공입니다.

아주 간단해요. 아주 심플해요.

 

그냥 먹으면 먹는 것 뿐이에요.

그래서 일체 행위를 하되, 행위에 분별은 않는다, 행위와 분별,

똑같아요, 오고 가고, 그뿐인데,

거기에 온다는 생각이나, 간다는 생각이나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올 뿐이에요, 그냥 갈 뿐이고.

물 흐르는 것과 똑같죠. 물이 그냥 흐를 뿐이에요.

 

인생이라는 게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온다, 간다, 두 가지가 있고, 앉는다 눕는다, 이게 있잖아요.

요걸 한마디로 말하며 머물 주, 하나 쓰거든요.

태어나서 머물다 가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이게 전부 자성이 없어요. 자체 성격이 없어요.

왜 그러냐?

전부가 뭐에 의지해서 자체적으로

일어난 건 하나도 없고, 전부 다른 것에 의지해서 형성되었거든요.

갈 때도 다른 것에 전부 의지해서 가지, 혼자 가는 게 아니거든요.

 

이게 다 집성이 소멸하는 거지,

소멸도 자성이 없고, 집성도 자성이 없고, 머무는 것도 자성이 없고 이러니까

온다고 하더라도 온 데가 없고, 간다고 하더라도 가는 데가 없고

머문다고 하더라도 머무는 데가 없다, 이러거든요.

 

이걸 불생불멸, 또 묘유자재,

머무는 게 자성이 있어서 머무는 게 아니라 묘하게 그냥 머무는 것에요, 이게 묘유자재에요.

불생불멸 묘유자재라, 이것이 완전히 의식화가 되고 내 생활화가 되면 그걸 해탈이라고 그럽니다.

 

머리가 허여면 그게 자성이 없어서 허옇거든요. 그냥 허열 뿐이에요.

얼굴이 쭈굴쭈굴하면 그게 자성이 없이 쭈굴쭈굴 할 뿐이에요.

이 몸이 쓰러지면 그냥 쓰러질 뿐이에요.

이게 오는 거나 가는 거나 머무는 거나 전부 이게 불생불멸이다.

 

그러니까 그 불생불멸을 어떻게 하냐?

묘유자재, 생기면 생길 뿐이고, 머물면 머물 뿐이고, 죽으면 죽을 뿐이고,

그걸 뭐 뒤에서는 여여부동이라고 그랬거든요, 여여부동.

 

현장역에서는 말이 조금 더 있는데요,

하이고요 여래자는 무수종래 역무소거, 요 말을 덧붙였는데

여기서는 여래자는 즉시 진실 진여라.

여래라고 하는 말은요, 이건 인격적인 표현인데,

그건 진실이다. 여래는 진실이다. 진여다, 참 모습과 똑같은 거, 참 진, 같을 여,

그 진실, 진여에 대한 존칭어다, 이랬어요.

존칭어라고는 여기서는 안 했는데,

증가한다는 더할 증, 언어라는 말씀 어, 증어.

높일 증, 높이는 말이다. 그래야 단순 지칭이 아니고

중생이라고 그러면 비칭이에요, 바로, 가리켜서 칭하는 건데,

여래라고 그러면 존칭이라고 그러는 거죠. 높여서 하는 말이에요.

여래는 다른 게 아니라 진실, 진여에 대한 존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