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위빠사나와 참선! 어느 것이 더 뛰어난가?

Buddhastudy 2021. 12. 2. 18:57

 

 

 

 

적잖은 수행자들이 불교 수행의 정법을 위빠사나로 알고 있습니다.

싯다르타가 중도의 상태에서 위빠사나를 가지고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불교와 오늘날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퍼져 있는 남방불교에서는

위빠사나를 수행의 중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위빠사나를 우리 말로 번역하면

알아차림’, ‘마음 챙김’, ‘바로 보기정도가 됩니다.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니 마음을 살피는 것은 당연합니다.

 

마음을 무엇이 온통 메우고 있나요?

바로 생각입니다.

그러니 생각에 대한 관찰은 수행의 태동부터 자연스럽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의 집착력은 너무나 강합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착()으로 표현합니다. 생각의 에 대항해 봤자 백전백패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로 공략하는 대신

그것을 살피고 관찰함으로써 생각의 착이 느슨하게 하는 쪽을 택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대상과 분리되면서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상태가 됩니다.

이때 새롭게 발견되는 자아를 일러 참나라 하고, 일종의 깨달음으로 취급합니다.

 

이렇게 생각을 관찰하여

대상과 분리하고

이로써 드러나는 생각의 바탕 자리인 참나를 깨닫는 수행이

위빠사나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위빠사나에 매진하다 보면 앞서 말한 공식대로 쉽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물론 탐진치 삼독이 약화되어 마음이 편안해지는 효과는 생기지만

생각이 끊어진 자리까지 찾아 들어가기엔 그리 녹록지가 않습니다.

 

여기서 새로운 접근법을 찾은 것이 고행입니다.

수심결에 보면

종경진겁토록 소신연비하며, 고골출수하며, 자혈사경하며, 장좌불와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한량없이 긴 세월 동안 몸을 태우고 팔을 지지며, 뼈를 깨서 골수를 내고

몸을 찔러 피로써 경을 쓰며, 눕지 않고 앉아서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육신을 괴롭게 하면 마음은 저절로 그 고통으로부터 떨어지려 합니다.

고통을 외계의 대상으로 놓음으로써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위빠사나에서 추구하는 생각과의 분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일리는 있지만 오늘 날엔 사람들의 관계망이 복잡하게 얽히게 됨으로써

구태여 고행을 위빠사나에 접목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번뇌망상이 들끓는 인생살이 자체가 고행이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를 흔히 불교 고유의 수행법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세존의 깨달음 이전부터 있었고

이런 점을 떠나서 수행이 있는 곳엔 으레 생겨나는 기본적인 수행법입니다.

 

싯다르타가 첫 번째 스승으로부터 배운 고행에도 위빠사나가 담겨 있지 않았던가요?

위빠사나의 유래가 어떻든 간에 깨달음에 효과만 있으면 될 것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참선의 문제점을 거론하는 것으로

위빠사나의 우수성을 피력했습니다.

참선을 통해 지극히 고요한 경지에 머물던 수행자가 깨어나면서

다시금 번뇌를 지피게 되는 사례가 그것입니다.

 

마음이란 것이 아무리 적멸에 이르러도

바람이 불면 잔잔했던 수면에 파도가 이는 것처럼

외계의 정보들이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면

번뇌의 물보라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논리입니다.

 

싯다르타가 세 명의 스승에게 의지해서 수행할 때 실패한 이유도

이것 때문이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이에 비해 위빠사나는 수면과 바람, 그리고 파도로부터 떨어져

실상을 관찰하기에

대상이 꾸며내는 허상에 휩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의 이합집산을 살핌으로써

반야를 키우고, 자신의 본래 성품을 깨우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논거를 들어

위빠사나가 참선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생각이 일으킨 대상과 분리되면서 찾게 된 새로운 자아(참나)

4차원적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3차원의 대칭성에 의해

어느 한쪽으로 결정되는 생각의 흐름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유로워진 초대칭적 자아입니다.

 

그렇기에 엄밀히 말한다면

참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아니라

영성이나 신성의 회복 정도로 봐야 합니다.

 

물론 자신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영성을 회복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출가 수행자들도 힘겨워할 정도의 난해함이 있지 않던가요.

 

그렇기에 위빠사나를 통해 참나를 찾았다면

실로 경탄하고 축하할 일입니다.

다만 그렇게 해서 얻어진 깨우침을 견성이나 성불로

확대하여 해석하는 건 곤란합니다.

 

초기불교에서 수행자의 대부분이

위빠사나로 수행하다가

점차 다른 수행법을 도입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위빠사나로 얻게 되는 지극한 알아차림의 경지로는

구도에 대한 갈증을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얻게 되는 참나의 경지

그건 깨달음으로 향하는 디딤돌로서의 가치가 있다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