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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범스님] 61. 감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공포가 없다

Buddhastudy 2021. 12. 20. 18:53

 

 

 

또 도무장처 무애처

무상법과 대지혜를 항상 가지고 활동하니까

장애가 되는 것이 없어요.

 

왜 그러냐?

불을 봐도 화성이 공하다는 것을 아니까 두려움이 없어요.

물을 봐도 수성이 공하다는 것을 아니까 두려움이 없어요.

죽음을 봐도 죽음 자체가 진여실상이라는 것을 아니까 장애가 없습니다.

 

불을 피해가는 게 아니에요.

뜨거우면 뜨거운대로 장애가 없는 거예요.

왜냐?

뜨거운데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걸 부증불감이라고 그러죠, 불생불멸이라고.

뜨거워도 그게 부증불감이고 불생불멸이니까 공포의 대상이 아니에요.

뜨거우면 뜨거울 뿐이에요. 두려움이 없어요.

있으면 그냥 있을 뿐이에요. 장애를 안 받아요.

 

어떤 사람은 깨달으면 불에 들어가도 안 뜨겁다,

말짱 거짓말이에요, 그거는.

뜨거운데, 뜨거운 자체가 무장한 거지, 안뜨거워서 무장한 게 아니에요.

그러면 마취하고 들어가면 장애가 없게.

마취를 하면 모르잖아요, 뜨거운 거,

그거 아니에요.

 

배고픈 거 다 달아요.

배고플 뿐이지, 배고픈 거로 말미암아 원한이 생긴다든지, 공포가 생긴다든지

그런게 없는 거예요, 그게 무장처에 도달한 거예요.

감각이 없는 게 아니라 공포가 없다.

, 이것도 멋진 말인데,

감각 없는 거 아니에요.

 

박수치라고 안했는데, 멋진말이라고 하니까 박수치고 그래요.

이런 게 전부 그냥 되는 거예요, 이게. ㅎㅎ

이게 전부 무장처, 장애없는 그런 처소에 도달한다,

이게 정각세계이고요.

 

또 불가전법 소행무애

(운전할 수 없는 법을 굴리며, 행하는 것마나 장애가 없다)

불가전법이라, 이것은 정각을 이룬 분만이 할 수 있는 법이에요.

불가전의 법이다, 운전할 전,

이러한 세계는 정각을 이룬 분만이 움직일 수 있는 세계다, 불가전의 법이다, 이거죠.

60화엄도 마찬가지예요.

 

또 소행이 무애라, 행하는 것마다 장애가 없다.

60화엄에서는 무계경계라, 파괴되는 경계가 없다, 이렇게 번역을 했어요. 파괴.

형상으로보면 파괴되는 대상이 있는데, 실상으로 보면 없어져도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얼음이 녹는다고 해서 물이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이 몸이 죽는다고 그래서 이 몸의 법성이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신상만 알지 이 몸의 본성을 모르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거예요.

 

요즘에는 또 오래 사는 것도 싫어하더라고.

그래서 재수 없으면 100살 산다고 그래요.

보다 별소리 다 들어봐.

옛날에는 그냥 오래 사는 게 무슨 수복이라고, 수복을 타고났다 이래서 오래 사는 게 복이잖아요.

그런데 그걸 왜 문제가 되냐 하면, 오래 살려면 다른 걸 갖추고 오래 살아야 하거든요.

건강하고 돈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누가 함께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해요.

혼자 사는 거, 가난하게 사는 거, 병들어 사는 거, 이거 별 볼 일이 없어요.

 

그러니까 고독생, 빈곤생, 질병생

고독과 질병과 빈곤이 따른 상태에서 오래 살면 재수 없다는 거예요.

공감 안하셔요? ㅎㅎ

 

그러니까 이걸 갖춘 사람이 많이 없거든요.

만날 치료해야 하고, 만날 혼자 살아야 하고, 이러니까 재수 없으면 100살 산다,

100살 뿐이오? 재수 없으면 120살 살아요.

 

그러니까 이런 게, 이게 또 보면 산다고 다 오래 사는게 아니에요.

왜 그러냐하면 3010년 사는 거 하고, 8010년 사는 거 하고 완전히 틀린 거예요.

설사 100살을 살았다 하더라도 40대의 나는 벌써 죽은 거예요.

60대의 나도 죽고.

 

그러니까 이게 한해, 한해 다른 인생을 살아가니까 인생무상은 항상 있는 거거든요.

작년의 인생이 금년 인생이 아니거든요.

작년 인생은 사라졌어.

 

70인생하고 80인생하고 또 틀리죠.

내가 지금까지 60인생 살았는데, 내년부터는 70인생 살아야 해요.

보통 일이 아니에요.

 

그러면 그게 언뜻보면 똑같은 사람인 것 같지만, 60은 갔고, 70이 왔다, 이거거든요.

이게 무상한 거예요,

이게 전부 개경게에요. 무너진 경계다. 무너질 계, 파괴될 계, 경계 대상이라 이말이죠.

 

그런데 이 정각 세계에는 개경게가 없는 거예요,

왜냐?

법성 평등, 정각자재니까.

이 평등한데서 자재하니까 개경게, 무너지는 게 없어요.

죽어도 절대 진여평등에는 죽는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근심걱정이 붙을 수가 없는 거죠.

 

입부사의 보견삼세

(헤아릴 수 없는 지혜에 머물며, 삼세를 널리 다 본다)

그리고 부사의에 머문다. 생각할 수 없어요.

보견삼세라_ 무상법을 통달하는 것은 공간적으로 가도가도 정각뿐이니까 상에 걸림이 없고

그럼 보견삼세는 널을 보, 볼견, 삼세_ 과거현재미래.

삼세를 더 나누면 십세거든요.

이 삼세십세를 널리 다 보는 거예요.

수무진백억겁 뒤에도 목전에서 다 봐요, 눈 앞에서.

백업겁 과거도 눈앞에서 다 보고

목적명견_ 눈앞에서 분명히 봐요.

이게 정각이에요.

 

천년 후에 뭐가 올까? 목전명견이오, 밝을 명, 볼 견,

눈앞에서 아주 밝게 보는 거예요.

이게 보견삼세거든요.

이게 지혜에요.

살아봐야 아는 게 아니에요.

바로 눈앞에서 다 보는 거.

이런 정각세계가 지정각세계이고.

그래서 이런 지장각 세계에서 본, 일체중생이 다 이런 거예요.

깨달은 분만 이런 게 아니라.

 

그런데 못깨달은 중생은 오직 모를 뿐이에요.

그게 뭐와 같으냐?

같은 방에 있는데, 깬 사람은 그곳이 자기 집이라는 걸 아는데

지금 잠들어서 꿈꾸는 사람은 같은 자기 집에 있으면서도 모르는 거예요.

방이 다른 게 아니라 꿈에서 못깨서 모른다 이거지.

 

꿈에서 깬 사람은 자기 집인 거 알고

꿈에서 못 깬 사람은 자기 집인 거 모르죠.

그래서 꿈을 깼느냐? 꿈을 못깼느냐?

꿈꾸는 사람은 항상 자기 집에서 자기 집이 아닌 거예요.

꿈깬 사람은 그냥 자기 집이고.

그 차이라는 거죠.

 

중생과 부처가 같다,

그것은 정각을 이룬 후에 같은 거예요.

정각을 이루기 전에는 같은 줄 몰라요.

안 같은 게 아니라 같은 줄을 모른다.

 

그러니까 꿈깨서 보면 지금 여기 잠들어서 꿈꾸는 사람이나

꿈에서 깨어난 나나 똑같거든요.

그런데 지금 꿈꾸는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 있는지 뭐 하는지 몰라요.

그러니 꿈깬 사람만이 안다 이거죠.

우리가 다 이런 정각세계에 있는데, 오직 망념이 가려서 모를 뿐이다, 이거죠.

그걸 가르치는 거예요.

 

그러면 여래명호품이라는 것은 여래의 명호가, 이름이

여래응공정변지, 명행족.. 이렇게 기본적인 십호가 있거든요. 여래십호.

그런데 이런 여래 이름이 세계세계마다 어마어마하게 많아요.

그러면 이러면 왜 이렇게 많으냐?

이름이 많다는 것은 활동이 많다는 거고, 활동이 많다는 것은 신체가 다양하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중생을 깨우치는 여래의 신업이 불가사의하다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여래명호품이에요, 신업.

부처님은 다른 거 하는 게 아무것도 없고 오직 중생제도하는 것만 부처님이 하는 거라고 그랬잖아요.

중생제도 하기 위해서 여래출현이 큰 몸이 필요할 때는 큰 몸, 작은 몸이 필요할 때는 작은 몸

여래출현이 불가사의 무궁무진해요.

 

그러다보니 여래명호가 그 여래출현과 여래의 공덕에 의해서 그냥 붙여지는 거예요.

여래명호품이라는 것은 여래의 신업, 몸의 공덕업이 무궁무진하다는 걸 설명하는 것이 여래명호품이에요.

 

화엄경 여래명호품

(여래의 신업, 다시 말해 몸의 공덕업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내용)

이름이 많다는 것은 공덕이 많다는 거죠.

공덕 없으면 이름 없어요.

여래의 신업이 이렇게 무궁무진하다, 여래의 신업은 정각신업이다, 이거죠.

깨달으면 자동으로 신업이 넓어진다, 이거예요.

 

그러면 제2회의 법회가 여래명호품에서부터 현수품까지가 6품인데

이것이 다 중생교화하는 인여래, 여래인행을 설명하는 거예요,

중생을 교화시키는 성불하는 원인, 그걸 설명하는 건데

여래명호, 사성제, 광명각품이 여래의 신구의 삼업을 설명한 거거든요.

여래명호는 여래신업을 설명하는 거고, 공덕이 많으면 그냥 이름이 많은 거예요.

그래서 공덕은 몸으로 하잖아요.

 

그런데 사성제품은 여래의 구업을 설명하는 거예요.

아무리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도 제목이나 한번 읽고 시작을 해야지.

 

대방광불화엄경 사성제품 제8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이 사성제품은요, 초기불교나 이런 삼승대승불교에서는

괴로움이 뭐다, 괴로움은 어디서 생긴다, 괴로움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

괴로움이 없는 경지는 뭐다, 이렇게 고진멸도로 설명하는데요

화엄경 사성제품은 그런게 전혀 아니에요.

 

그러면 뭐야?

사바세계에서는 여래가 고를 설명할때는 이렇게 이렇게 설명했고

집을 설명할 때는 이렇게 설명했고, 다른 세계에서는 이렇게 설명했고

그 괴로움을 설명하는 용어들이 다양하다, 이것만 말한 거예요.

그 괴로움 자체를 설명한 게 아니에요.

, 이것 참.

 

말이 사성제이지 이것은 여래의 설법을 설명한 거지, 사성제 내용을 말한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정각에는 고집멸도가 없어요.

진여실상에도 무고집멸도라 그랬잖아요.

맞죠? 반야심경에 무고집멸도.

 

그래서 고는 부처님이 이렇게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것은 여래의 구업을 설명한 것이지 사성제의 내용을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여래의 구업이라고 그래요.

 

화엄경, 사성제품

(고집멸도의 내용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여래의 구업, 다시 말해 여래의 설법을 설명하는 내용)

 

광명각품에 가서는 여래의 의업, 생각을 설명한 거예요.

그리고 나서는 문명품 이런데는 더 깊이 들어가서

그다음에는 깨닫는 신심, 발심으로 되면 그것이 두 번째 법회, 6품이 끝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걸 보면, 그런 거예요.

이때에 문수보살마하살이 모든 보살에게 말씀하시되

불자야, 고성제는 이 사바세계 중에서 혹은 죄라고 말하고

혹은 핍박이라고 말하고, 혹은 변하여 달라진다고 말하고

혹은 반연한다고 말하고, 혹은 모인다고 말하고

혹은 찌른다고 말하고, 혹은 의지하는 육근이라고 말하고

혹은 헛되고 저짓된 것이라고 말하고

혹은 종기 난 곳이라고 말하고

혹은 어리석은 범부행이라고 말하느니라.”

이렇게 되어서 어느 세계에서는 뭐라고 말하고 어느 세계에서는 뭐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건 여래의 구업으로 중생을 깨우치는 공덕을 말하는 것이지

고가 뭐고, 집이 뭐다 이걸 설명한 게 아니다.

여래 설법공덕, 이걸 말하는 거예요.

 

화엄경은 전부 정각세계를 설명하는 거예요, 정각세계.

설법을 왜 하느냐?

설법은 무슨 내용을 알려주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중생을 깨우치려고 하는 게 설법이에요.

깨우치는 데 목적이 있는 거지, 알려주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법성에는 불가사의해서 생각이 아니예요.

알려준다는 건 생각이오.

지식, 개념, 주장, 이게 전부 생각이에요.

깨우치는 거예요.

 

그럼 깨우치는 것은 뭐냐?

두 가지 생각이 없는 거예요. 무이념.

선각지 무이념이라_ 깨달음이라는 것은 두 가지 생각에서 두 가지 생각이 없는 데로 가는 거예요.

그럼 가르치는 건 전부 두 가지 생각이에요.

, 이것 참..

답답해요, 이런 말 하다가 내려가려고, 내가 이런 말을 왜 하지? 이런 생각이 들어서.

내 팔자도 좋은 팔자는 아니다, ㅎㅎ

 

깨달음이 뭐냐? 깨달음은 정각인데,

자기 마음의 본성을 봐서 마음에 항상 머무는거_ 득견심성

심즉상주_ 마음이 항상 머무는 거

무이념_ 두 가지 생각이 없는 거

무애자재, 이게 깨달음이거든요.

득견심성 심즉상주

(마음의 본성을 보아서 마음이 항상 머무는 것이 깨달음이다)

 

망념을 벗어나는 것, 망념에서 벗어나는 게 깨달음이다.

그러면 공부를 해갈 때, 망념이 일어나면 그게 좋은 생각도 일어나고 나쁜 생각도 일어나는데, 그 망념이 없는 게 깨달음이지 망념을 일으켜서 망념에 집착하는 게 깨달음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걸 마장이라고 그래요.

 

내가 어제저녁에 이런 생각이 불현듯 일어난 거예요.

일어날 때는 우주가 폭발하는 것같이 일어나거든요.

, 이거 내가 깨달았고.

그럼 여기에는 못 깨달았던 생각이 있거든요,

이 두 가지 생각이예요.

이걸 마장이라고 그래요.

이걸 수행마장, 깨닫는게 수행인데, 이떤 생각이 일어났을 때, 그 생각에 자기가 몰입을 하면 그게 수행마장이 되는 거예요, 깨달음에 장애가 돼요.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선각지, 잘 깨달은 지혜가 무이념이라, 두 가지 생각이 없다,

이렇게 탁 나오는 거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상주삼세 보광시방 (삼세에 항상 머물며 시방에 널리 빛난다)

삼세에 항상 머물러요.

보광시방_ 시방에 널리 빛나.

이게 깨달음이거든요.

 

그래서 이런 것을 가르치는데, 이런 가르치는 방법이

여러 가지 공덕으로 가르치니까 그걸 여래명호품에서 설명한 거고

여러 가지 설법으로 가르치니까 그걸 사성제품에서 설명한 거예요.

 

그래서 사성제품은 고집멸도의 내용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고집멸도의 여러 가지 말로 중생을 깨우친다, 이걸 가르친 거거든요.

그래요.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