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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범스님] 66. 의미 없는 것, 무상한 것을 모두 버리신 부처님의 위대한 출가

Buddhastudy 2022. 1. 3. 18:35

 

 

오늘은 부처님의 출가일입니다.

출가일에 시작해서 특별 정진대법회를 봉행하는 것은 의미가 큽니다.

 

그리고 봉은사에서는 출가일에서 열반재일까지 만배 정진을 한다고 그래요, 만배.

만배를 한다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닌데 만배를 하시고

또 절만 하는 게 아니라 한번 절하는데 10원씩 보시를 해서

만배를 채우면 10만원이 된다고 그럽니다.

대단히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절도 하고 보시도 하고 참회도 하고 공덕도 짓고

한번 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인연을 한꺼번에 짓는 일이라

아주 이런 일을 그동안 다른데서 별로 못 들어봤거든요.

한번 절하는데 10원씩 보시를 해서

10만배를 채우면 10만원 보시를 하고

1주일 동안 계속 하니까 정진을 하고

또 온갖 업장을 다 참회하고

무량 공덕을 짓고

이런 정진법회를 출가일부터 열반일까지 봉행을 한다니까

특이한 구상이고 대단한 취지를 가지고 모시는 법회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부처님이 출가를 하시는데 그 목적이

몸이 무상하다는 데 있었어요.

무상이 뭐냐? 노병사거든요.

늙고 병들고 죽는 게 무상이에요.

 

그런데 출가하려고 하니까 부왕이신 정반왕이 말렸습니다, 출가하지 말라고.

왜 말렸냐?

결론은 재물과 권력과 명성을 관리해야 한다, 이유가 그거예요.

태자니까 할 일이 많잖아요.

그러면 많은 재산관리를 해야 하고

또 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추종하는 사람이 많다는 겁니다.

권력은 사람이에요.

사람이 없으면 권력이 없거든요.

그래서 추종하는 사람이 많다는데, 왕이 되다 보니까

앞으로 많은 백성이 따르고 신하가 옹호를 하고 그게 권력이죠, 왕권.

그래서 왕권을 지켜야 해요. 국토를 지켜야 하고.

또 훌륭한 왕명을 후세에 남겨야 하고

이게 재권명입니다, 재물- 권력- 명성.

 

그런데 부처님은 노병사문제를 위해서 인간에게 늙고 병나고 죽는 문제로 인해서

출가를 하려고

부왕은 재물권력명성을 지키려고 하지 마라.

아주 격론이 벌어지죠, 부자간에.

부모가 말리는 건 다 그래요.

어떤 스님이든지 부모하고 순순히 대화를 해서 그렇게 사이좋게 출가한 경우가 별로 없고요

요즘에는 보니까 부모가 데려다주는 사람이 있다고요, 더러.

참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어느 분은 가라고 허락 안 받았는데 혼자 왔어요.

가다 보니까 길이 멀어서 택시 타고 왔어.

옛날보다 달라진 거예요.

 

그런데 재권명은 어디서 얻느냐 하면 밖에서 얻는 겁니다.

명성도 밖에서 얻고, 권력도 밖에서 얻고, 재물도 밖에서 얻는 거죠.

노병상은 어디서 생기느냐? 내 몸에서 생기는 거예요,

내 몸에서 늙고 병나고 죽는 게 내 몸에서 일어나는 거죠.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재물 권력 명성을 얻으려고 헤매다가

자기 몸에 죽음이 오는 것은 모르고 일생을 마친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은 늙음이 오기 전에 늙음을 알았다는 것, 이게 아주 위대한 겁니다.

죽음이 오기 전에 죽음을 알았다는 거,

안다는 게 뭐 대단한 게 아니고 환희 보이는 그게 아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에게 죽음이 있는 한, 재물-권력-명예, 재권명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출가를 하게 되죠.

그럼 이건 뭘 의미하는가?

출가라고 하는 것은 무상하고 허망한 것으로부터 단절을 하는 거예요.

그게 출가입니다.

의미 없는 것을 과감하게 버리는 그게 출가에요.

 

무상한 줄 알면서 무상에 계속 매이고

허망한 줄 알면서 허망에 계속 끌려다니는 건 출가가 아니에요.

무상하다 허망하다 느꼈으면 그걸 일도양단이라는 말이 있는데

칼은 하나인데 딱 한 번 치면 두 끝이 생기거든요.

본래 하나였는데 칼이 내려가는 순간에 2개가 되요.

그래서 잘라낼 건 잘라내고 가질 건 갖고

이게 일도양단이거든요.

 

그러니까 출가라는 것은 허망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출가다.

우리가 매일 같이 출가를 해야 해요. 매일 같이.

이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싶으면 딱 단절하는 게 출가입니다.

이것은 허망한 짓이다 싶으면 딱 끊어버리는 게 출가에요.

출가는 위대한 보림이다, 이래서 위대한 거 하나를 끊는게 출가라고 하는데

그것도 물론 출가이지만

순간순간에 쓸데없는 짓이다 싶으면 딱 중지하는 그게 출가에요.

쓸데없는 말이다 싶으면 그만두고

쓸데없는 행위다 싶으면 딱 그만두는 것

허망한 것으로 부터 벗어나는 것,

무상한 것을 되풀이 하지 아니하는 것

그게 출가거든요.

 

그래서 이게 출가 정신이에요.

허망한 것을 버리는 것.

부질없는 것에서부터 벗어나는 것.

 

 

출가해서 뭘 했느냐?

정진을 했죠, 정진.

이 정진이라고 하는게 뭐냐?

할 것은 하고 안 할 것은 안 하고.

 

왜 사람에게는 죽음이 있는가?”

보통 사람들은 죽음이 있는 줄 알면서도 왜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하는가?”

그게 아주 문제예요.

 

그래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을 하시고 노력을 하시는데

처음에는 가르침도 많이 받아보고, 얘기도 많이 들어보고 했는데 그게 다 소용이 없었어요.

마지막에는 깨달음을 통해서 선정도 닦아보고, 학습과 선정, 2가지 방법을 택하셨는데

학습으로도 안 되고 선정으로 안 된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불교는 선정주의가 아닙니다.

선정에서만 계속 머물러 있는 게 불교가 아니에요.

부처님이 그걸 가지고 안된다고 나오신 거예요.

 

그럼 뭐냐?

해탈이에요.

불교는 선정이 아니고 해탈이다.

다만 선정은 해탈을 얻는데 필요한 과정일 뿐이에요.

사선팔정이라는게 있는데 사선팔정 중에 제일 높은 선정이 비상비비상처정에 드는 거거든요.

 

그래서 비상비비상처정에 들면 그 들어있을 순간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거기에는 삶도 죽음도 슬픔도 기쁨도 고통도 전혀 없어요.

그런데 그 선정에서 나오면 또 틀리는 거예요.

그게 선정의 한계입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생천주의자가 있는데요, 천상에 가서 태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해요.

그런데 부처님은 그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천상에 가서 태어나도 천상에 있을 동안은 좋은데

거기서 영원히 있는게 아니고 또다시 타락해서 떨어진다.

그래서 배우는 것도 사람사람마다 완전한 걸 가르칠 수 없고

자기가 경험이나 자기 아는 것을 얘기하니까 배움을 통해서도 해결이 안 된다.

이게 학습, 또 생천, 선정 다 안 된다는 걸 알게 돼요, 다 안 된다.

 

그럼 마지막에 뭐냐하면 자기 마음에서 얻는 것에요,

이게 해탈이죠.

자기 마음에서 얻는 거.

 

마음에서 얻어서 뭐가 이루어지느냐 하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이루어지거든요.

그걸 고멸이라고 합니다.

고통이 소멸한다.

 

그럼 마음에서 뭘 얻느냐? 이게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첫째 얻는게 무상고무아입니다.

무상과 고통과 무아를 아는 거예요.

그게 해탈이 아주 근본이에요.

 

처음에 부처님이 왜 죽음을 문제 삼았는가?

그 이유가 뭘까요? 죽음을 왜 문제 삼았는가?

그거는 나에 대한 문제입니다. 죽음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내가 죽으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저 다른 모기가 죽는 건 문제가 안 돼요.

죽음 같은 거예요, 모기가 죽는 거나 내가 죽는 거나.

그런데 모기약을 막 뿌리잖아요.

그런데 모기가 볼 때는 아주 우스운 거예요, 인간이.

저희들은 막 죽게 하고 인간 저희 하나 죽으면 장례식도 하고 별거 다 하거든요.

이게 아주 인간중심인 거예요, 순전히.

모기는 막 그냥 대량으로 한꺼번에 하는데

인간은 하나만 죽어도 장례식하고 뭐하고 대단히 한다고.

그런데 이거는 누가 죽어도 문제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에 모든 죽음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고

코끼리가 죽는 게 문제가 된다든지, 그게 아니고

다른 어떤 동물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고

내가 죽는 거, 또 나와 관련이 있는 어머니가 죽는 거, 자기 주변 사람이 죽는 거.

자기가 죽는 것에 대해서 문제가 돼요.

죽음을 두려워하는 거라든지, 늙음을 싫어하는 건 전부 나에 대한 집착입니다.

싫은 소리 안 들으려고 하는 거 화나는 거, 욕심나는 거.

 

그럼 왜 욕심이 생기는가?

아집이죠.

나를 위해서 욕심이 생기죠.

 

왜 화가 나는가?

나 때문에 화가 나는 거죠.

전부가 아집이에요.

, 이렇게 두렵고 겁나고 무섭고 화나는게 다 나에서 의해서 생긴거로구나하는 걸 알게 되요.

누가 미운 거, 그것도 왜 생겨요?

순전히 나 때문에 미운 거에요. 그 사람 때문에 미운 게 아닙니다.

 

가령 남의 집 아이가 공부 못하고 말 안들어도 안 밉거든요.

그런데 우리 집 아이가 공부 못하고 말 안 들으면 밉죠.

 

내가 너를 위해서 얼마나 하는데 그러냐?”

나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너는 내 아들이니까 너는 내 딸이니까 잘해야 한다.

 

저기 부산 사람이나 외국 사람, 수만리 떨어진 저 딴 나라에 있던 학생이

말 안 듣고 공부 못한다더라,

화도 안 나요.

 

그리고 여자분들 같은 경우에 남의 집 남편이 바람피우고 잘못했다고 그러면

화도 안나고 질투 안나고

자기 집 남편이 잘못했다 그러면 야단나요, 야단나.

 

그게 왜 이런가?

왜 나하고 상관없는 남자가 뭘 연애하고 바람피울 때는 왜 화가 안 나고

내 남편이 그랬을 때는 왜 화가 나는가?

순전히 자기 욕심이죠. 그게 자기에 대한 집착이에요.

 

이 세상에 모든 근심·걱정은 나로부터 생기는 거라구나

이걸 깨달은 거예요.

내가 빠지면 아무런 근심걱정도 없다.

 

수많은 나무가 한꺼번에 쓰러져도 내가 별로 문제가 안 돼요.

? 내가 아니니까.

그런데 내 몸에서 피 한 방울만 나와도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건 나니까.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죽는게 문제다라는 거.

내가 죽는 거,

 

늙은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늙으니까 문제다.

 

모든 고통은 나 때문에 생기는 거고

모든 고통은 나 때문에 생기는 거고.

내 아들이 잘못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고

내 남편이, 내 나라가, 내가 사는 이 땅이,

저 별나라에서 무슨 일이 생겼다더라, 별 문제 안 되요.

이 땅덩어리가 문제가 된다. 상당히 문제거든요.

 

모든 근심의 핵심이 나예요. .

내가 빠지면 아무 문제도 없는 거죠.

 

그런데 부처님이 딱 보니까 거기서 무아를 알게 된 거예요, 무아.

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그 무아를 아는 순간에서부터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 거예요,

이게 해탈입니다.

 

선정에 열중하는게 문제가 아니라

무아를 아는 게 문제인 거예요.

무아를 깨달아서 해탈하는 것이다, 이거죠.

 

()에서 벗어나는 게 첫 번째 해탈이에요.

아하, 내가 나라는 문제 때문에 이렇게 매여있었구나이걸 알게 되요.

그런데 나라는 것을 가만히 보니까 무상해요,

생겼다 사라지고, 생겼다 사라지고

무상이라는 말은 없다는 거예요, 생겼다 사라지고 생겼다 사라지고

그게 고통이에요, 무아예요.

 

무상고 무아, 이걸 철저히 아셨다.

그래서 무상공부하고 나니까 그다음부터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게 된 거예요.

집착에서 벗어나는 게 해탈입니다.

 

우리가 왜 나에게 끊임 없이 집착을 하는가?

무상고 무아를 몰라서, 무아를 몰라서 그래요, 무아를.

무아를 아는게 아주 중요하죠.

 

부처님이 여기까지만 설명한 거예요.

그러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무상법, 무아를 알고 해탈을 이루셨는데

해탈을 이루시고 그다음에 뭘 하셨냐? 설법을 하셨죠.

중생교화를 하시고

 

그러면 무아를 몰랐을 때와 무아를 알았을 때와

보고 아는 세계가 달라지는데요

무아를 몰랐을 때의 보고 아는 세계를 중생지견이라고 그러고, 알지, 볼 견

중생이 알고 중생이 보는 세계가 있고

또 무아를 알고 나서 보는 세계를 해탈지견이라고 그래요.

해탈한 상태에서 아는 세계와 보는 세계가 따로 있는 거

이것이 불지견과 중생지견의 차이점이다.

 

예불할 때 해탈향 해탈지견향, 그러죠?

해탈한 상태에서 보는 세계가 있는 거예요, 이게 해탈지견이에요.

나에 집착하는 세계에서 보는 세계가 있는데 그게 중생지견이죠.

중생이 알고 중생이 보는 겁니다.

그래서 중생지견, 불지견.

 

그러면 해탈지견에 대해서는 부처님이 말씀을 안 하셔요.

해탈까지만 말씀하셔요.

거기는 너희들이 스스로 정진을 해서 알아라, 이거거든요.

그런데 제자들이 그게 궁금해서 해탈한 상태가 어떤 세계일까?

자꾸 묻습니다.

말씀 안 하시죠.

 

그래서 그걸 전유경이라는 게, 그거예요.

, 지금 화살 맞아서 쓰러졌는데, 그 화살에 독이 들었다.

그럼 빨리 화살 빼고 독 치료를 해서 치료부터 해야지

그거 놔두고 자꾸 이리저리 궁리만 하고 도를 말하면 그 사람은 죽는다.

그게 아주 옳은 말씀이에요.

 

인생이란 어떤 걸까? 무아란 어떤 걸까?

이건 의미가 없고

빨리 무아를 알아서 집착에서 벗어나서 해탈에 들어가는 게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교단이 점점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까 제자 중에 해탈한 분들이 많이 나오죠.

이것이 500아라한 1200제대 아라한, 또 부처님 열반하신 몇백 년 후에 막 나오는데

대승불교까지 일어나요.

 

그래서 대승불교는 해탈지견에 근거해서 일어난 게 대승불교에요.

소승불교는 무상과 해탈까지만 이야기한 게 소승불교입니다.

해탈지견을 말한 게 반야바라밀이고 그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요.

 

그러면 해탈지견이 어떤 내용이냐?

그게 대승열반경이 따로 있는데, 대승열반경에서 말한 해탈지견을 설명한 게 있는데

그걸 상락아정이라고 그럽니다.

 

해탈의 세계는 무상이 아니고 항상한 거다.

고가 아니고 락이다. 이게 상락이잖아요.

무아가 아니다 진아다.

부정이 아니고 청정이다.

이걸 열반사덕(- - - )이라고 그러는데요,

그게 해탈에서 보여진 부처님 세계에요, 상락아정이

 

정반대에요. 무상고 무아, 부정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상락아정, 정반대 아닙니까?

이게 오묘해요.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서 한꺼번에 말하면 혼란이 생겨서 못 따라와요.

대승불교가 일어나서 비로소

부처님이 말씀 안 하신 해탈지견에 대해서 말씀하신 거예요.

이게 상락아정이에요.

 

그래서 상락아정 반야바라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모두 대승불교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