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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상식 세계사] 니카라과 10분 완벽정리

Buddhastudy 2022. 4. 20. 19:36

 

 

 

니카라과라고 알려진 국가의 정식 명칭은

Republic of Nicaragua, 니카라과 공화국입니다.

 

국명은 니카라과 공화국 호수 주변에 살던

인디안 부족의 추장 니카라과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니카라과 국기의 바탕은

파란색과 흰색이 가로로 분할되어 있습니다.

하양은 국토와 조국의 순수성을 나타내고

파란 부분은 니카라과의 태평양과 카리브해

두 개의 대양에 둘러싸여 있음을 나타냅니다.

 

국기의 중앙에는

니카라과의 국가 문양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삼각형 속의 무지개와 산들이 나란히 있는 형태로

이 산들은 중미 5개국을 대표하는 5개의 화산을 상징합니다.

산 위에 빨간 모양은 모자이며

이 빨간 모자는 중앙아메리카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음을 의미하는 '자유의 모자'입니다.

삼각형 주변의 윗부분은 니카라과 국명이 쓰여있으며

아랫부분은 중미라는 의미에 AMERICA CENTRAL 이라는 글귀가 쓰여있습니다.

삼각형은 동일성을, 무지개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니카라과는 중앙아메리카에 위치하며 수도는 마나과입니다.

니카라과의 북쪽으로는 온두라스, 남쪽으로는 코스타리카와 국경을 접하고 있습니다.

국토면적은 약 130,000로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국가이며

대한민국 면적의 약 100,000보다 좀 더 큰 편입니다.

 

인구는 2019년 기준으로 약 60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이는 부산과 대구를 합친 인구수와 비슷합니다.

 

니카라과 1년 총 GDP2017년 기준 약 138억 달러

이는 세계 118위로 비슷한 수준의 국가로는 가봉과 모리셔스를 꼽을 수 있습니다.

 

니카라과의 인종 구성은

메스티소인이 70%, 백인 20%, 그 외 흑인과 인디오들이 있습니다.

종교는

가톨릭교가 85%이며, 개신교가 15%, 공용어는 스페인어입니다.

 

 

2. 역사

스페인의 식민 통치를 받기 이전 니카라과인은 니카라오족, 토르테가족, 미스키토족 등

아메리카 원주민 종족 집단이 살고 있었습니다.

 

1502년 콜럼버스가 처음으로 니카라과의 동해안을 발견하였고

이 지역을 스페인의 영토로 삼았습니다.

 

이후 스페인은 원주민에 대한 착취와 탄압, 카톨릭교의 무자비한 종교정책 등을 자행하며

혹독한 식민 통치를 했습니다.

게다가 스페인인들의 이주를 통해

천연두와 같은 낯선 전염병이 중남미에 퍼지기 시작하자

면역이 약했던 원주민의 인구가 급감했습니다.

 

열악한 환경을 견디다 못한 니카라과 원주민들은 독립운동을 펼쳤고

1821년 니카라과는 다른 중미 국가들과 함께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였습니다.

 

잠시 멕시코의 일부였다가

다음에는 중미연합의 일부

그리고 마침내 1838년 완전한 독립을 성취했습니다.

 

독립 후, 니카라과는 북부 레온 중심의 자유주의자와

남부 그라나다 중심의 보수주의자 간의 정치적 투쟁으로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했습니다.

 

양 진영 간의 팽팽한 내전이 계속 이어지던 상황에서

1855년에는 자유주의자들이 불러들인 미국인 용병, 윌리엄 워커가 대통령을 자처하는 등 헤프닝도 있었습니다.

 

미국은 니카라과 지역의 자국의 영향력을 보장하기 위해

수차례 걸친 무력 계획을 자행하였으며

1912년부터 1933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총 19년간

미국 해병대를 니카라과에 두둔시켜 간섭하였습니다.

 

이에 저항한 니카라과에 게릴라 세력은

장군 산딘오를 중심으로 강력하게 저항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

산딘오는 1934년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에 의해 죽습니다.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는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1979년까지 약 40년간 족벌 독재정치를 실시하였습니다.

 

하지만 1961, 산딘오의 전통을 계승하여 결성된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이

소모사 독재체제에 대한 무장 저항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은 쿠바의 지원하에 게릴라 활동을 벌였고,

1979, 수도를 점령한 후, 국가재건위원회를 구성하여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FSLN의 주도 아래 니카라과 혁명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고

이렇게 세워진 혁명 정부는 정치적으로는 다원주의적 경쟁을 허용하고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혼합경제를 채택하였습니다.

 

하지만 쿠바의 지원을 받은 좌익정권이 들어서면서

니카라과와 미국의 사이는 크게 나빠졌습니다.

미국은 지속적으로 니카라과가 혁명 정부에 안정화 정책을 저지하는 간섭을 자행했습니다.

 

혁명 정부는 미국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10년간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원조를 받았고

소련과 쿠바와도 연대를 강화해 왔습니다.

 

하지만 10년에 이르는 전쟁과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니카라과 국민들은

산디니스타혁명정부에 대한 지지를 상당수 철회하고

이 결과 미국이 지지하는 우파세력의 중심의 차모로 정권이 탄생했습니다.

 

 

3. 정치 & 경제

니카라과는 대통령 중심제로

대통령이 국가원수 및 정부수반을 겸합니다.

내각은 14개 부처로 구성되며, 대통령은 직접 보통선거로 선출하며, 임기는 5년입니다.

니카라과는 단원제 의회를 채택하고 있으며 의원은 92명입니다.

 

1990년에 실시된 대선에서 보수세력의 차모로 정권이 출범했으나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니카라과의 정치에서는 연이어 부정부패 스캔들이 터지고

에너지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는 등 계속해서 불안정한 편이였습니다.

 

2006년 대선에서 산디니스타나 후보였던 다니엘 오르테가가

16년 만에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르테가 정권은 국가의 지속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방만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쳤고,

대통령 연임을 불가능한 헌법을 개정하며 장기집권을 도모하였습니다.

 

심지어 201611월 대선에서는

부인 무리요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등

권력에 대한 집착이 국민들의 격렬한 반발심을 일으켜 정치적위기를 자초하였습니다.

 

니카라과는 1인당 GDP가 약 2천 달러 수준으로 매우 가난한 나라이며

소득 불균형 또한 심한 편입니다.

전 국민의 약 50%가 빈곤층이며, 불안정 고용인구 역시 45% 이상입니다.

 

농업이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농업국가이며

공업은 식품 가공업과 섬유공업이 있지만, 산업화의 수준은 낮은편 입니다.

 

서부지역의 농지에서는

커피와 사탕수수, 옥수수 등이 생산되고

저지대에서는 주로 면화, 쌀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동부 해안지대에서는

대규모 바나나 농원이 있기는 하지만

넓은 국토면적에 비하면 토지 이용률은 극히 낮은편에 속합니다.

 

게다가 전력의 70% 화력발전에 의존하고 있어,

심각한 전력난을 겪는 상황이 지속되어 경제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니카라과 정부는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2014년 말, '니카라과 운하' 공사에 착공했습니다.

기존 파나마 운하에 한계가 점차 나타나는 상황에서

니카라과 운하가 개통되면 미국 동부와 서부를 잇는 뱃길이 800km단축 되는 효과를 노릴 수 있습니다.

 

니카라과 정부는 홍콩의 니카라과 운하 개발 회사와 공존하여 공사에 착수했고

2019년 말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니카라과 운하가 완공되면 중남미에서 아이티에 이어 두 번째로 가난한 니카라과에서

막대한 경제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나

현재까지도 니카라과 국민들의 격렬한 반대와 환경파괴 문제 등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4. 자연환경 & 문화

니카라과는 중미에서 가장 큰 나라로 환태평양 지진대에 위치하고 있어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입니다.

 

니카라과는 크게 고도에 따라 태평양 저지대와 북쪽의 산악지역,

모스키토 연안에 카리브 저지대로 나눌 수 있는데요.

비옥한 태평양 저지대에는 약 40여 개의 화산이 있으며

중미에서 가장 큰 호수라고 하는 라고대 니카라과가 있습니다.

 

기후는 무덥지만 공기는 상쾌한 편입니다.

카리브해 저지대는 덥고 습한데다 강수량이 많은 열대우림 지역으로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대신, 넓은 대지에 바나나 대농원이 많다고 합니다.

 

중앙과 북부 산악지역은 기온이 가장 서늘한 지역으로

연평균 기온이 15도에서 26도 사이로 매우 쾌적한 편입니다.

다양한 야생동물들이 서식하고 있고 목축과 광산지대가 있습니다.

 

니카라과는 다른 어떤 중미 국가들보다 많은 문학작품을 배출한 국가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시가 가장 사랑받는 예술이라고 하는데요.

 

니카라과 출신의 시인인 루벤다리오는

중남미 문학의 왕자, 모더니즘의 기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루벤다리오는 중남미 최초의 혁신 문학운동인 MODERNISMO를 주도하였으며

중남미 문학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니카라과는 2004년부터

매년 그라나다 국제 시 페스티벌을 개최해, 세계 각국과의 문화 교류의 장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또한 니카라과 사람들은 야구를 매우 즐기며

국가 스포츠라 부를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인구 600만이 안 되는 나라에

야구팀만 약 4,500개가 넘고

야구선수로 등록한 사람들만 7만 명에 가깝다고 할 정도니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1968년에 자국 리그를 상설하였고

1972년에는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등

국제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그때부터 니카라과 출신의 야구선수들이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도 활발하게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니카라과 출신의 가장 유명한 야구선수로는 데니스 마르티네즈가 있습니다.

 

 

5. 인물

니카라과에서 유명한 인물로는

전직 모델과 여배우이며, 사회 인권 운동가인 비앙카 재거가 있습니다.

재거는 현재 유럽에 친선대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비앙카 재거 인권 재단'의 창립자이자 회장입니다.

 

비앙카는 1945년 니카라과 마누아에서 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녀가 10살 때 부모님은 이혼하여

어머니 혼자서 세 명의 아이들을 키우게 됩니다.

 

비앙카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도 장학금을 받으며 프랑스 정치학을 공부하였습니다.

또한 인도를 장기간 여행하며,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과 동양철학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197025세 때 프랑스에서 열린

롤링스톤즈 콘서트 파티에서 70년대 아이콘이자 전설적인 락 그룹 롤링스톤즈의 리더 믹 재거를 만나게 되고

다음 해 미 재거와의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결혼식 당시에 입은 화이트 웨딩드레스는

프랑스의 유명 패션 디자이너인 입센로랑이 디자인한 옷으로

블라우스 없이 재킷과 스커트로만 구성되어 당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지금까지도 베스트 웨딩드레스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리 오래가지 않아 믹 재거와 이혼하였고,

당시 그녀의 고향인 니카라과에서는 1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지진이 덮쳤습니다.

 

비앙카 재너는 국제 적십자 대표당과 함께 니카라과를 방문했고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독재정권의 야망과 억압에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비앙카는 사회 인권 운동가가 되어

추후에는 비앙카 재거 인권 재단을 설립하게 됩니다.

 

현재까지도 비앙카 재거 재단에서는

여성들의 기본 인권을 박탈당한 국가들에 대해 고발하며

여성이 열등하다라는 인식을 영속시키는 문화 및 사회적 규범에 대해

개선될 수 있도록 많은 캠페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