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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 스님 법문_내 자성 부처로 인정해준다면

Buddhastudy 2022. 5. 10. 19:09

 

...

 

 

항상 그거를,

우리가 간단하게 그냥 비유하려고 하는데요.

 

어떤 사람이 어린애가 죽어서

그 어린애를 살리기 위해서 저 지옥고를 들어갔답니다.

지옥고를 들어갔는데, 지옥고를 들어가다 보니까

물이 물로 보여서 건널 수가 없고

불이 불로 보여서 건널 수가 없었답니다.

 

그러니까 불에 타 죽을까봐 건널 수가 없고

물에 빠져 죽을까봐 건널 수가 없고

온통 귀신들이 그냥 욱시글득시글하니까 귀신들한테 말려 죽을까 봐 못 들어갔고

그래서 애를 쓰는데

 

어떤 노승이 나타나더니

'불도 불이 아니요, 물도 물이 아니요, 귀신도 귀신이 아니니라. 따로 없느니라.' 하는 말에

그만 그 불로 그냥 어청어청 들어가니까

그것은 자기가 그려놓은 모습이지

모습이 없으니까 불에 탈 리가 없죠.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서

그 어린 애 영혼을 다시 데리고 나와서

어린애를 살렸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지금도 허영 많죠.

그런데 어떤 거는 그렇게 못하죠.

그러니 여러분들이 직접적인 실험을 자꾸자꾸 해보십시오.

내가 거짓말인가, 아닌가.

 

한 찰나가 바로 저승이고 한 찰나가 이승입니다.

한 생각이 빛보다 더 빨라서 천당에 가고

한 찰나가 지옥에 가고

한 찰나가 바로 이승이며, 이승의 천국이며, 이승의 지옥이며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의 마음에 따라서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해 드려도

말로는 100%를 꼬집어서 말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진짜 나를 발견하고

발견하면서도 습을 떼고,

습을 떼면서도 또 둘이 아닌 도리를 배우는 데 또 습을 떼고

또 뭉쳐놓고 뭉쳐놓고 뭉쳐놓고 또 가다 보면,

그 보적(寶積)

 

그 장자 아들도 일산(日傘)을 받친 것도 왜 받쳤느냐?

칠보로 장엄을 했지만

둘이 아니게끔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너가 되고

마음대로 자유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열반, 그 계단을 밟지 못했기 때문에

그때에 그렇게 일산을 받치고

열반계에 구정토를 다 증득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우리가 이 공부를 하는 데에 참으로 손을 꼽고 기도를 해서

내가 잘되게 하지 말고

내 한생각으로 그냥, 그냥 돌아가게 하세요.

 

어디다가 대고 기도를 하면서 맹종해야 되겠습니까?

자기 자신밖에

자기를 죽으나 사나 이끌고 다니는 건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자신이라고 하면 똑 참하겠는데

 

주인공(主人空)이라고 그러는 건 왜 주인공이라고 그러느냐?

자기 몸뚱이가 공했고,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기 때문입니다.

 

마음도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죠.

먹는 것도 그렇죠.

바로 가고 오는 것도 그렇고,

듣는 것도 그렇고, 만남도 그렇고

전부 그렇게 돌아가니 어떻게 주인공이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다 주인공으로 인해서

주인공이 바로 적당한 여러분들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이라고 똑같이 부르면 안 되겠으니까

여러분들 부모님들께서 이름을 지어놓고

'아무개, 아무개, 아무개' 이래야

뭐를 시킬 때도 그렇고 부를 때도 그렇고 알아듣지 않습니까?

그래서 공편하게 그렇게 이름을 지어놓은 거지

그 이름이 말해주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름 있기 이전이 주인공이다.

주인공이라는 이름이, 이름 있기 이전이 바로 자기, 참 불성 자기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그러니 이름과, 주인공이라는 이름과 참자기와 또 둘로 보지 마세요.

그대로 우리가 공부하는 데는 참, 앞으로 실천을 옮겨가는 데.

 

여러분들 재차 한마디 하겠는데요.

병고든지 가난이든지

안 되는 일이든지

뭐든지 일체 만법의 그 용도에 따라서 여러분들한테 닥쳐오는 대로

그거를 공부하는 재료로 삼으세요.

 

그런다면 앞으로

, ! 이런 거구나!” “이런 거구나!” 하고 무릎을 탁치고

한번 쳐다보고 웃고

한번 내려다보고 울지 않으면 참

그 맛을 모를 겁니다.

 

학설로만 알아서

큰스님이다’ ‘내가 다 알고 있다

내가 다 알고 이렇게 행하니까 뭐 물을 것도 없고 자실 것도 없고 뭐 그렇지

이렇게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내가 빨리하겠다고 생각도 마시고요.

이것은 빨리하겠다고 가는 것도 아니요,

빨리 안 하겠다고 안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내가 목마르면 이렇게 그냥

이거는 시간도 공간도 없이

내가 목마르면 그냥 이렇게 마시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아주 죽게 됐대요.

엊그저께 일입니다마는 죽게 됐대요.

그래서 그것도, 죽게 된 것도 인체의 건은

그 한마음 그 의식에 모두 달렸지 않느냐 이겁니다.

 

그거를 한마음으로서의 정말 주인공 자성 부처로다 인정을 해준다면

아니, 머슴도 참 존대를 해주면서 인정을 해준다면

자기 목숨 걸고 일을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자기 속에, 자기 집 속에 있는 그 중생들한테 중생이라고 그러면서

'아이고, 그것들 그냥 모두 세균 잡속들' 이렇게 생각을 하니까,

자기 몸뚱이를 운영해 나가는

자기 몸뚱이를 이끌어가는 그런 생명체들을 우습게 보니까

'너 우습게 보는데 뭐.' (그러면서) 그거 따라서 그대로 그냥 움죽거리는 거죠.

 

어린애를 자장자장 하니까

곰이 와서 그냥 자장자장 해가지고 어린애를 죽이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미련스럽거든요.

그러니까 내 마음을 잘 내서

오직 인정을 해줄 수 있는 나로 본다면

바로 자기가 자기를 죽일 수는 없는 겁니다, 그 이치가. 이열치열,.

자기를 자기가 죽일 수는 없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몸은 스스로서 건강해질 거고

또 내 주인공과 자식의 주인공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고, 내 자식이 저런데 주인공은 둘이 아닌데 뭐.'

그럭하고선 주인공에다 맡겨놓으면

그 주인공까지 또 밝아지거든요.

이 얼마나 좋은 행입니까?

 

부처님이 그렇게 좋은 법을 가르쳤는데

인간이 그거를, 우리가 지금 모르는 것은

요 그릇 하나에 물이 이렇게 담겨야

이것을 그릇 하나에 물 담긴 걸 볼 텐데,

 

요 반쪽으로 해놓고서는

요렇게 쓰러뜨려 놓고

요 물 요것만 보게 만들어놨으니

어떻게 이게 이어집니까?

 

그러니 부모가 당장에

요 부모만 우리 부모인 줄 알게 돼 있죠.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해골바가지에다 절을 할 때에

, 미생물에서부터 수없이 거듭거듭 광년을 거쳐 오면서 진화돼서 오면서

내가 어느 대()에 벌레의 부모가 안 돼 본 예도 없고

사람의 부모가 안 돼 본 예도 없고

사람의 자식이 안 돼 본 예도 없지만

또 벌레들의 자식이 안 돼 본 예가 없느니라.

한 마디로 말해서.

 

그러니 모두가 내 부모 아닌 게 없고,

내 자식 아닌 게 없고,

내 형제 아닌 게 없으니

지금 당대의 요 부모만 부모로 알지 말라.

 

이것이 바로 더 지혜를 넓혀서 크게 본다면

그냥 아주 바다로 나가서 용이 돼서

올라왔다 내려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춤을 출 겁니다,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