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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상식 세계사] 라이베리아 10분 완벽정리

Buddhastudy 2022. 6. 2. 18:55

 

 

 

1. 소개

'라이베리아 알려진 국가의 정식 명칭은

Republic of Liberia ‘라이베리아 공화국입니다.

중서부 아프리카에 있는 국가로

수도는 몬로비아(Monrovia)입니다.

 

라이베리아의 국기는 1847 독립과 함께 제정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이주한 해방노예 중심으로 독립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라이베리아의 국기도 미국의 국기를 본떠서 디자인되었습니다.

국기의 11 줄은 독립선언서와 헌법에 서명한 11명을 나타내고

파랑은 아프리카 대륙  성실과 충성을

빨강은 용기하양은 순수를 의미합니다.

왼쪽 상단의 커다란 하나의 별은 1847 독립 당시에

라이베리아가 아프리카에서 유일한 흑인 독립국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라이베리아의 위치는

아프리카 중서부대서양 연안에 있으며

인접국가로는 시에라리온, 기니코트디부아르가 있습니다.

 

국토면적은  11  세계 102위이며,

 10  한국보다 조금   면적입니다.

 

라이베리아는 2019 기준으로 약 50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이는 부산광역시와 광주광역시를 합친 인구수와 비슷합니다.

 

라이베리아의 1  GDP2017 기준  21 달러

이는 세계 159위로

비슷한 수준의 국가로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을 꼽을  있습니다.

 

인구의 90 크펠레족바사족 등의 16 토착민이며

미국해방노예의 후손인 아메리코라이베리안은 전 국민의 2.5% 정도입니다.

 

공용어는 영어로 국민의 20% 사용하고

나머지 80% 인구는 20 정도의 토착어를 사용합니다.

 

종교는  85% 기독교를 믿고 있고, 이슬람교가  12%,   토착신앙을 믿거나 무교입니다.

 

 

2. 역사

라이베리아의 역사입니다.

라이베리아의 해안가는 15세기 유럽 항해가들이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

아프리카 대륙을 탐험하는 과정에서 후추를 발견하여

후추해안(pepper coast) 또는 곡물해안이라 불렸습니다.

 

원주민의 역사에 대해서는

제대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불분명하지만

대부분 서부와 북부에서 진출했다고 추정됩니다.

 

1800년대 초반미국에서는 흑인 노예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러 남북전쟁이 발발했습니다.

1822일부 흑인노예들이 해방되었고

이들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1847년까지 아프리카로 이주하게 되는데요.

19세기 중반까지  400만 명의 해방노예가 이주하여 건국한 나라가 바로 라이베리아였습니다.

라이베리아 Liberia’라는 국가명 자체가 라틴어로

해방 뜻하는 Liber(리베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847 7 26, 미국계 라이베리아 정착민들은 미국의 후원 아래

정식적으로 라이베리아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하면서

아프리카 최초의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미국계 해방 노예들은

스스로 특권계층을 형성하였으며

토착원주민들을 차별하며 노예로 삼았습니다.

 

총인구의 3%에도 미치지 못하는

아메리코 라이베리안의 독재체제에 대한 토착민들의 불만은 계속 쌓여만 갔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1980, 크란족 출신의 사무엘 (Samuel Doe) 상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고

실질적인 군부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1986 라이베리아의 21 대통령으로 취임한 사무엘 도는

집권 이후 미국계 흑인노예후손은 물론다른 경쟁부족들까지 대량으로 학살하는  폭정을 펼쳤습니다.

 

1989 반정부단체인 라이베리아 민족애국전선(NPFL)

도우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내전에 돌입하게 됩니다.

 

미국계 해방노예의 후손이었던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크란족을 제외한 다른 종족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1990 도우 대통령은 집권 10 만에 암살당했습니다.

 

하지만  후로도 내전 상황은 진정되지 않았고

7 동안 내전이  이어진 후에야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1997 찰스 테일러가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대통령이  찰스 테일러는 공권력을 이용하여 인권 유린을 자행하였고

정적을 탄압하고 폭압정치를 펼쳤습니다.

 

결국 20002 라이베리아 내전이 터지면서

찰스 테일러는 2003 나이지리아로 망명하고

라이베리아에는 연정 형태의 과도정부가 출범했습니다.

 

 

3. 정치 & 경제

찰스 테일러가 나이지리아로 망명하면서

내전은 끝이 났지만 후유증은 처참했습니다.

내전으로 인해  25만 명이 사망했으며 1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습니다.

 

2005라이베리아 대통령 선거에서

통합당 출신인 엘런 존슨 설리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2006 1 대통령에 취임하였습니다.

 

1938년생으로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한 경제학자인 존슨 설리프 대통령은

아프리카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었습니다.

설리프는 2006년부터 12년간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기초교육 보급평화 정착 등의 성과를  공로로 2011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2017년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유명 축구선수 출신의 조지 웨아(George Weah)

성공한 빈민가 출신임을 내세워 서민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73년만에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어 냈습니다.

 

라이베리아는 6 임기의 대통령중심제로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는 행정수반입니다.

 

라이베리아의 의회는 양원제로

6 임기의 상원의원 30명과 하원의원 73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라이베리아의 경제는 산업별 GDP 구성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3/4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입니다.

 

주요 농작물은 카사바옥수수 등이 있으며

주요 수출작물로는 야자오일바나나커피 등이 있습니다.

 

1925미국의 파이어스톤사가 250만 달러의 차관을 공여하고

라이베리아에서 고무나무 재배를 시작하면서

라이베리아는 서서히 재정적인 안정을 찾을  있었습니다.

 

또한 1960년대부터는 철광석  지하자원의 수출이 증가하게 됩니다.

라이베리아의 광공업 비중은 5%대로 높지 않으나

철광석과 다이아몬드는 라이베리아 총수출의 76% 차지할 정도로 대단히 중요합니다.

또한 열대우림에서 자라는 목재 자원 역시 주요 수출품  하나입니다.

 

라이베리아 정부는 내전이 종결된 이후

국제기구로부터의 기부와 개인 투자를 활성화해

국가 경제 부양에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4. 자연환경 & 문화

라이베리아는 대서양에 면해있는 해안국가로 해안선 길이는 579km 달합니다.

기후는 열대몬순기후 지역에 속하며

연중 기온이 높고 건기와 우기의 구별이 뚜렷합니다.

5월부터 10월까지 우기 기간에 연강수량의  80% 정도가 몰아 내리고

건기인 12월부터 2 사이에는 사하라사막으로부터 하르마탄(Harmattan)이라는

먼지바람이 불어와 피해를 입히기도 합니다.

 

연안부의 기후는 연중 고온다습하나

내륙부는 상대적으로 서늘한 편이어서 생활하기 쉽다고 합니다.

 

라이베리아의 기아 상태는 매우 심각한 상태입니다.

매년 발표되는 세계 기아지수에 따르면

2018 라이베리아의 기아지수는 100 만정  33.7점으로 매우 낮은 편인데요

이는 조사대상국이었던 119개의 개발도상국  108위에 해당하는 수치로

매우 심각한 기아수준을 보여줍니다.

 

또한 라이베리아는 황열병말라리아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이 만연한 지역인데다

2014 에볼라바이러스가 가장  피해를  곳이기도 합니다.

내전으로 인해 의료시설이 거의 파괴되었고 제대로 복구되지 못한 탓에 피해가 컸습니다.

 

국가에서는 GDP 10% 정도를 의료부문에 투자하고 있지만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고

2008 기준으로 라이베리아는 국민 100,000명당 의사가 1명꼴로 의료사각지대에 처해있습니다.

 

라이베리아는 1명의 남성이 최대 4명의 아내를   있는 1부 다처제 국가입니다.

라이베리아의 결혼인구 중 약 1/3 가량이 이런 1부 다처제 가정이라고 하는데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남성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성 불평등이 심각한 상황이다 보니

이런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합니다.

 

라이베리아는 화려한 직물공예가 유명합니다.

미국 해방노예들이 미국의 퀼트(Quilt)를 라이베리아에 들고 왔고

19세기 초부터는 라이베리아 여인들이 정교한 바느질 실력으로 고품질의 퀼트를 생산했습니다.

현대 들어서는 퀼트의 인기가 예전만 하진 못하지만

지금도 라이베리아의 대통령은 자국을 방문한 해외정상들에게

라이베리아에서 생산한 퀼트를 환영의 선물로 주고 있다고 합니다.

 

 

5. 인물

라이베리아에서  알려진 인물로는

2017대통령으로 당선된 조지 웨아(George Weah)’ 있습니다.

그는 정치인이 되기 전부터 축구 선수로 크게 이름을 날렸으며

선수 시절에는 AS모나코파리 생제르맹, AC밀란  유럽의 유명축구팀에서 활약했습니다.

 

라이베리아의 수도 몬로비아 출신인 ‘조지 웨아

15세가  무렵당시 3부리그의 골키퍼로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공격수를 희망하던 그는 꾸준히 공격수로서의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4년 뒤 1985 마이티 배럴에서 프로선수로 데뷔하게 됩니다.

 

20세가 되던 1986

라이베리아 최고의 팀이었던 인빈시블 일레븐으로 이적한 조지 웨아는

23경기에 출전해 24골을 기록하며 리그 득점왕에 올랐고

바로 아프리카 축구강국인 카메룬리그로 스카우트됩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좋은 공격수로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유럽 무대에서는 무명이었던 그를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시킨 인물은

아스널의 명장으로 일컬어진 아르센 벵거Arsène Wenger’ 감독이었습니다.

 

벵거는 아프리카로 직접 찾아가 웨아의 플레이를 눈여겨 보았고

당시 아르센 벵거가 맡고 있던 축구팀인 프랑스리그의 AS모나코로 영입합니다.

웨아는 잠재력을 폭발시키며 바로 소속팀을 프랑스컵대회 우승으로 이끌었고

AS 모나코에서 4시즌 동안 47골을 넣으며 벵거에게 보답하게 됩니다.

 

1992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한 , 프랑스리그 우승은 물론

1995년에는 바이에른 뮌헨과 바르셀로나를 꺾고

역사상 처음으로 UEFA 챔피언스리그 준결승까지 진출시킵니다.

 

이후 이탈리아의 명문팀인 AC밀란으로 이적한 웨아는

축구계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발롱도르 상과 FIFA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습니다.

 

웨아는 은퇴 , 내전으로 상처받은 조국 라이베리아를 위해

조지 웨아 기금 설립하는 

라이베리아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 활동하게 됩니다.

 

2005 대선에서 한차례 낙마하였으나

2017 다시 대선에 출마하며 라이베리아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