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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상식 세계사] 리투아니아 완벽정리

Buddhastudy 2022. 7. 13. 18:42

 

 

1. 소개

리투아니아로 알려진 국가의 정식 명칭은

리투아니아 공화국(Republic of Lithuania)’입니다.

유럽 발트해 연안에 있으며 수도는 빌니우스(Vilnius)입니다.

 

리투아니아의 국기는 위로부터 노랑·초록·빨강의 3색기입니다.

노랑은 광명과 건강을 상징하는 태양을 초록은 국가의 푸른 자연을

빨강은 힘찬 활력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리투아니아는 1918년에 독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이 국기를 제정하였으나

1940년 소련에 병합된 후에는 사용이 금지되었습니다.

1989년에 다시 처음의 국기를 되찾았습니다.

 

리투아니아는 러시아 북서부에 위치해 있으며

북쪽은 라트비아, 남쪽은 폴란드와 벨로루시, 서쪽으로는 발트해와 면해 있습니다.

국토면적은 약 65로 세계 122위이며

이는 경상남북도의 면적 32의 약 2배 수준입니다.

 

리투아니아는 2019년 기준으로 약 28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인구수로 세계 141위이며

이는 경상북도 인구 약 270만 명과 비슷합니다.

 

리투아니아의 1년 총 GDP

2018년 기준 약 532억 달러. 이는 세계 81위로

비슷한 GDP 수준의 국가로는 가나를 꼽을 수 있습니다.

 

리투아니아의 인종구성은

리투아니아인 87, 러시아인과 폴란드인이 10%,

그 외 벨라루시인, 우크라이나인 등이 있습니다.

공용어는 리투아니아어이며, 러시아어도 함께 사용합니다.

종교는 가톨릭교가 약 80%, 그 외 러시아정교, 루터교 등을 믿습니다.

 

 

2. 역사

리투아니아인들은 고대부터 중세 초까지 발트해 연안의 늪지대에 거주했습니다.

12세기까지는 부족끼리 갈라진 채로 생활하였으나

그 당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독일의 튜튼 기사단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13세기 민다우가스(Mindaugas) 공작이 이 지역을 통일하고

리투아니아 왕국을 세우고 국왕이 되었습니다.

 

그 후로 14세기 중엽까지 리투아니아는

계속되는 튜튼 기사단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하여

폴란드와의 결혼 동맹을 맺고 동군연합을 형성하였습니다.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은 1401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튜튼기사단을 물리치며 동쪽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했습니다.

또한 이웃국이었던 키예프 공국이 몽골인들에 의해 멸망하자

빠르게 몽골인들을 몰아내고

오늘날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러시아 일부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리투아니아 대공국 시대를 열었습니다.

 

16세기 들어 동쪽에 모스크바 대공국과의 패권다툼에서 계속 밀리며

위기감을 느낀 리투아니아는

폴란드 왕국과 함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통일하게 됩니다.

 

하지만 양국의 연합체제는 오래 가지 못했고

결국 3차에 걸쳐 1795

폴란드와 분할된 리투아니아는 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1915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리투아니아는 독일에 점령당하였으나

1918년 제정러시아의 붕괴 및 독일의 패전으로 독립에 성공합니다.

 

독립 후 리투아니아는 1922년 최초의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민주주의를 선언하였으나,

안타나스 스메토나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여

1940년대까지 독재를 하게 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20년대 폴란드가

리투아니아는 폴란드 땅이라며 리투아니아를 침공하여 양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소련의 간섭이 시작되었습니다.

 

1940, 정국이 불안정했던 리투아니아는 사실상 소련에 병합되어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이 되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잠깐 독일군에 병합되기도 하였으나

독일이 대전에서 패하면서 다시 소련이 점령했습니다.

 

소련은 당시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들이 독일에 동조하였다는 이유로 심한 박해를 가했고

30000가구를 시베리아로 이주시키거나 가톨릭교회에 대한 탄압도 심했습니다.

 

반러시아 성향이 가장 강했던 리투아니아는

19903월 소련연방 15개국 중 가장 먼저 주권독립을 선언하였고

19919월 공식적으로 독립을 하게 됩니다.

 

 

3. 정치 & 경제

리투아니아의 정치 체제는 대통령과 총리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국가원수인 대통령은 임기 5년으로 한 번 중임이 가능하며

입법을 비롯한 실제적인 행정권한은 총리가 지니고 있습니다.

 

현재 리투아니아의 대통령은 20197월에 당선된

기타나우스 나우스다(Gitanas Nauseda)’ 대통령이며

리투아니아의 총리는 2016년부터 임기를 맡아온

사울리스 스크베르넬리스(Saulius Skvenrnelis)’입니다.

 

1991년 독립을 주도한 사유디스(Sajudis) 민족세력의 주도아래

새로운 국가로 출발한 리투아니아는

1992년 초기 총선에서 공산당세력인 민주노동당이 의회다수당으로 선출되었고

현재에도 다수의 정당이 의회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리투아니아의 의회는

임기 4년의 의원 141명으로 이루어진 단원제이며

다당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요 정당으로는 리투아니아 농민녹색연합, 조국연합-리투아니아 기독교민주당,

사회민주노동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리투아니아의 경제는

소련 체제 아래에서 공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가 심한 편이었기 때문에

독립 이후에는 원료자원의 부족과 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1994IMF의 지원을 받으며 안정권에 접어들었고

2003년 이후 경제호황기에는 연평균 7~10%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발틱 호랑이(Baltic tiger)'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농업이 국내총생산의 6%, 공업이 33%, 서비스업이 61%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농업에서는 가축사육이 전체의 60% 정도를 차지하며

주요작물로는 사탕무, 유채씨, 감자 등이 있습니다.

 

광물자원은 석탄과 약간의 석유 외에는 매우 제한적인 편이며

특기할만한 자원은 금빚이 도는 보석류인

목걸이나 반지와 같은 장식품으로 활용되는 호박(amber)의 생산이 많습니다.

 

특히 2004년도 EU 가입 이후에 세금혜택을 지원하며

EU 국가들로부터의 직접적인 투자를 유치하고 있으며

특히 최근 들어 정부는 정보통신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고 있습니다.

 

현재 리투아니아에는 40여 개에 달하는 글로벌 핀테크 기업들이 진출해 있으며

2018년 유럽 최초의 국제 블록체인센터가 수도 빌니우스에 건립되었습니다.

 

 

4. 자연환경 & 문화

리투아니아는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의 발트 3국 중에서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3국 중에서 가장 국토가 넓고 인구도 많은 국가입니다.

 

발틱해 연안을 따라 긴 모래 해안이 있고

800개에 이르는 강과 3,000개의 크고 작은 호수가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 덕분에 약 2000마리의 수달이 살고 있고

남쪽의 호수에는 다양한 종류의 물새들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리투아니아는 해양성기후와 대륙성기후의 특징을 고루 가지고 있으며

대체로 온화한 기후를 보입니다.

 

하지만 10월부터 4월까지 이어지는 겨울은

춥고 눈이 많이 내리기 때문에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털양말을 가장 좋아한다고 합니다.

 

리투아니아는 나무조각과 같은 민족전통예술이 크게 발달했습니다.

전통적으로 민속예술가들은

주로 십자가나 슬픈 모습의 예수상을 조각해왔는데요.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도로와 정원에서도 쉽게 목조십자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리투아니아 북부 샤울라이에서

북쪽으로 12km 떨어진 곳에 십자가의 언덕이 있습니다.

이곳은 수세기에 걸친 리투아니아의 로마 가톨릭교회 역사를 대표하는 순례지인데요.

예수의 수난상, 성모마리아 조각 뿐 아니라

리투아니아의 영웅 조각상 등과 더불어

순례자들이 세운 약 50,000개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습니다.

 

리투아니아는 농구를 상당히 잘하는 국가 중 하나입니다.

소련의 지배를 받던 시절, 리투아니아 출신의 센터 아비다스 사보니스가 국제대회에서도 맹활약했었고

80년대 구소련 농구대표팀의 주전 대부분이 리투아니아 출신이었습니다.

 

농구가 워낙 인기가 많고 실력도 좋다 보니

리투아니아 학교들은 작은 규모라도 항상 농구체육관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오페라와 발레는 리투아니아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습니다.

리투아니아 작곡가들은 교향곡, 발레곡, 오페라 음악 등을 작곡하였고

1933년에 설립된 음악학교는 뮤지컬 음악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때문에 현재까지도 리투아니아 음악가와 연주자들이 국제무대에서도 큰 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5. 인물

리투아니아에서 잘 알려진 인물로는 아비다스 사보니스(Arvydas Sabonis)’가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리투아니아의 국가대표 농구선수였으며

유럽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인정받은 선수이기도 합니다.

 

1964년 당시 소련령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에서 출생한 그는

13세부터 농구를 시작하여, 15세 때 소련 유소년 대표팀이 되었습니다.

 

198117세가 되던 해에

당시 소련리그의 명문팀인 ‘BC 잘기리스에 입단하여 실력을 더욱 쌓아가고

9년동안 FIBA 클럽 월드컵 챔피언, FIBA 유럽 리그 챔피언을 달성했으며

유럽리그 올해의 선수상을 6차례 수상했습니다.

 

사보니스는 1988 서울 올림픽에서 소련 대표팀으로 출전하여

준결승전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미국 대표팀을 이기고

결승전에서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을 이기면서 올림픽 금메달을 따게 됩니다.

 

1986년 때는 세계 최고의 농구리그인 미국 NBA의 러브콜을 받았지만

당시에는 미소 냉전 시기라 NBA 진출이 불가능했던 탓에

사보니스는 NBA 다음으로 가장 수준이 높다는 스페인 리그에 진출했습니다.

 

이후 미국과 소련 간 개방정책이 이루어지고

31살 늦은 나이로 NBA의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에 입성하게 됩니다.

 

사보니스는 221cm의 장신 센터임에도 불구하고

민첩한 패싱과 드리블을 보여줬고, 3점슛도 잘 넣는

다재다능한 선수로 오랫동안 활약했습니다.

 

은퇴 후 2005년부터 리투아니아의 잘기리스팀의 회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아들인 도만타스 사보니스가 현재 NBA 인디애나 페이서스에서 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