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불법에는 붓다의 깨달음이 없다!

Buddhastudy 2022. 8. 3. 19:34

 

 

 

佛法을 공부하려면 꽤 오랜 세월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양이 매우 방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佛法이 팔만대장경처럼 부풀어 난 것일까요?

 

우리는 주변에서 거짓말하는 사례를 종종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참말과 거짓말의 차이를 경험으로 알게 됩니다.

참말은 단답형으로 간결하게 나오지만

거짓말은 대체로 설명이 길어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거짓말은 그것을 감추거나 변명하기 위해 이런저런 설명이 수반되는 것이지요.

결국 어떤 사안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면 말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진리가 뭐냐고 물으면 사실상 간단하게 끝납니다.

그건 1원인(實存)’ 한마디면 되니까요.

 

그러면 진리인 1원인을 어떻게 깨닫느냐고 물으면

01을 통찰하면 됩니다.

 

01을 어떻게 통찰하느냐고 되물으면

‘01보다 단순한 구조를 찾으면 됩니다.

 

그 구조를 어떻게 찾느냐고 또 물으면

01을 가지고 1원인에 대입하면서 사고훈련을 하면 됩니다.

 

사고훈련을 통해 1원인을 수학적 논리로 증명하면 되는

매우 간단한 문제입니다.

1원인을 증명하는 과정에 차원의 설정값이 무력화되고

1원인을 깨우칠 때 앎과 체험이 동시에 일어나

세존의 무상정등각이 실현됩니다.

그래서 세존의 ‘01에서 자유로운 길을 걷는다는 뜻에서 中道라고 합니다.

 

이처럼 진리에 대한 정의와 깨달음, 수행 방법에 대해

단답형으로 끝내면 됩니다.

진리가 이토록 간단명료한데

佛法은 팔만대장경처럼 비대해진 것일까요?

 

그건 한마디로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눈을 떴으면 그냥 보이는 대로 말하면 됩니다.

간단하게 한두 마디로 끝나게 되지요.

 

하지만 눈을 감고 있으면 계속해서 상상을 동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앞 사람이 상상한 것에 더해 부연 상상을 덧붙이고

이렇게 계속해서 상상물이 보태지면서 방대한 佛法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팔만대장경엔 구조적으로 진리가 들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존이 직접 설했다는 초기경전은 어떨까요?

 

그곳에 無我, 연기(緣起), 中道, 사정제, 팔정도 등의 핵심 불교 교리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것들도 설명이 길고 복잡합니다.

이 얘기는 진리에서 다소 빗겨 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방편이라는 얘기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진리를 찾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런 걸 진리로 알고 평생동안 연구해 봐야 변하는 건 없습니다.

달마나 원효처럼 타고난 도인이 아니라면 눈이 떠질 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세존은 진리를 단답형으로 쉽게 전하지 않은 것일까요?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중생들은 진리를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알려는 마음이 구조적으로 생겨날 수가 없는 겁니다.

중생들은 당면한 의 문제를 해결해

영생과 해탈, 열반을 얻어 고귀한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이지

절대로 진리를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진리를 알려는 마음을 내도

차원의 설정값에 의해 그 마음이 금세 사라집니다.

진리에 대한 접근을 불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원인얘기만 나오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을 몹시 미워하게 됩니다.

 

세 번째, 당시에는 진리를 설명할 만한 언어가 부족했고

더군다나 당시 제자들의 의식 수준을 감안하면

그런 언어가 설령 있다고 해도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상의 세 가지 이유에 의해서

세존은 을 전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씨알이라도 심어 놔야겠다는 생각에 전법(傳法)을 도모했고

그래서 붓다의 은 죄다 방편으로 머물게 됩니다.

 

초기경전이 이러니 그 이후에 나오는 경전들 역시 상상물로 지어졌고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고 모두가 모르는 창작물만 가득 쌓여

팔만대장경이 된 것입니다.

 

이런 걸 미리 아셨던 세존은

佛法에 의존해 불교의 맥을 살릴 것을 말하면서도

佛法마저 버려야 한다는 점을 피력하시게 됩니다.

세존은 자신의 입으로 직접 설한 佛法佛法이 아니라고 한 것이지요.

 

다시 말해 佛法엔 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佛法에는 진리를 찾을 수 있는 길로서

無我와 연기(緣起), 그리고 中道이 있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들의 참뜻을 왜곡해 엉뚱하게 이해하는 데에 있습니다.

無我를 포맷하여 ‘0’을 떠올리게 하고

연기(緣起)01의 점멸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中道01에서 자유로운 길을 제시하고

01의 설정값을 포맷시킵니다.

정리하면 無我, 연기(緣起), 中道,

모두 01로써 1원인을 찾으라는 세존의 가르침을 물씬 담고 있는 것입니다.

01이 얼마나 중요하면 마지막 순간에도

세존께서는 佛法을 강조해 1을 세우고는

다시금 佛法을 없애 0을 제시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교 역사상 無我, 연기(緣起), 中道, 01로 풀어

佛法을 제대로 이해한 수행자는

용수보살을 제외하곤 없습니다.

 

나머지 기라성 같은 수행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하나같이 마음으로 풀지 않았던가요?

힌두교 수행의 핵심인 마음을 가져다가 불교 수행인 것처럼 포장지만 바꿔 놓은 것입니다.

지극히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불교 수행을 주관적 상상의 세계로 물들여 버린 것이지요. 그러니 불교 수행자들 가운데 선지식의 씨가 말리게 된 것은 필연입니다.

진리를 깨우치는 데에 무슨 마음 타령을 그토록 해대는 걸까요?

 

아무튼 수행자들이 아는 佛法엔 진리가 없고

그래서 수행자들은 이리저리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불교의 종파가 여러 갈래로 나뉘게 된 것이고요.

 

솔직히 남들이 도인이라고 추켜세워도

자기 자신은 잘 알지 않던가요?

아무것도 모르는 보잘것없는 중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요.

 

결론적으로 불교의 교리가 방대하고, 그 해석이 분분하고, 수행법이 교차하는 것은

한마디로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호등이 꺼지니 교통지옥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진리의 신호등을 번쩍 켜야 합니다.

문학적이고 추상적인 상상물로 만든 佛法을 지양하고

수학과 과학, 그리고 철학의 언어를 써서 재무장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를 제도권의 언어로 재구성해

인류 보편의 의식체계에 맞게 리모델링한다면

필히 인류의 정신문명을 주도해 나갈 것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佛法을 마음공부라고 생각하시나요?

당신은 無我, 연기(緣起), 中道,

‘01의 사고훈련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