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1

[지혜별숲] 옳고 그름의 기준은 오직 이것 한 가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낭독17회/배경음有

Buddhastudy 2022. 9. 6. 19:10

 

 

틸 스캇의 <우주조각가> 함께 하겠습니다.

 

지은이 틸 스캇은

1980년대에 태어난 첫 세대 인디고 아이들 중 한 명이라고 하는데요.

 

인디고 아이들이란

태어날 때부터 탁월한 영성을 지니고 있는 아이들을 말하죠.

 

틸은 초감각적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는데요

투시력, 감각투시력, 투청력, 전자기장을 조종하는 능력, 생각형태와 대화하는 능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초감각적 능력을 타고난 아이들 중에는

자라면서 이 능력들을 잃어가는 경우가 많은데요.

틸은 성장하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그대로 간직했다고 해요.

 

책 내용들 중 일부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

모든 순간에는 두 가지 관점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영적인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물리적인 삶의 지식입니다.

 

근원의 관점과 지식은

모든 사람 안에 들어있고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영원한 지식입니다.

 

반면에 물리적 삶의 관점과 지식은

전적으로 개인이 살면서 관찰하고 경험한 것에 달려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남을 얕보는 태도나

전쟁을 일으키려는 마음이 나왔습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똑같은 삶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들도 우리와 같은 관점을 가질 것이고

따라서 우리 의견에 동의하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와 다른 삶의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스스로를 의심하거나 방어하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 간에 불일치하는 에너지 때문에 겪게 되는 고통과 관련해

그들에게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그들이 있는 위치와 당신이 생각하기에 그들이 있어야 하는 위치 사이에

또한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당신이 생각하기에 그들이 생각해야 하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습니다.

 

이는 당신의 관점과 삶의 경험에서 볼 때

당신에게 최선인 것이 그들에게도 최선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따지는 것은

오직 한 가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삶의 경험입니다.

 

그런데 삶의 경험은 모든 생명체가 다릅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 또한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각자의 믿음에 달려있습니다.

 

물리적 관점에서의 진실은

이전의 에너지 진동이 집중되어 모습을 드러낸 대상을 관찰한 정보일 뿐입니다.

 

물리적 진실은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을 대신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는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상위자아 사이의 개인적인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상위자아와 의견을 달리할 때

그 사람은 상위자아의 에너지 진동과 공명하지 않기 때문에

부조화를 이루고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반대로 상위자아와 의견이 일치할 때면

상위자아의 에너지 진동과 공명하기 때문에

조화로운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 관련해 무엇이 옳고 무엇이 진실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상위자아의 시선에서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삶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사람과 별개인 우리의 물리적 삶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특정한 모습이 되게 하거나

특정한 사고방식을 갖게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과정입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처벌과 살인의 에너지 진동과 공명하는 사람들에게

정확히 그러한 진동과 일치하는 대상을 가져다줍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언제라도 가르침을 전해주는 선생님이 있다는 사실을 당신이 믿는다면

끌어당김의 법칙이 그들의 내면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어줌으로써

그들을 가르쳐줄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입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궁극적인 정의이자 스승입니다.

우리가 어떤 이미지에 집중하면 할수록

그 이미지는 점점 더 커집니다.

 

긍정적인 이미지라면

그것이 점점 더 커져가는 것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이미지라면

그것 또한 커져서 결국엔 우리가 인식하게 되고

우리는 그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변화가 비록 죽음을 의미할지라도 말입니다.

 

우주는 진정한 자아와 반대 각에 서 있는 사람들을

그대로 오랫동안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앞으로 끌어당깁니다.

 

어느 순간에는 당신의 상위자아와

좀 더 가까운 에너지 진동을 느낄 수 있을지라도

일단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당신의 상위자아와 점점 멀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두려움의 에너지 진동보다

복수의 에너지 진동에서

좀 더 나은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수가

자신의 상위자아와 조화되지 못한 상태임을

알려주는 증표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다시 상위자아와 일치되기 위해서

용서라는 행동을 취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기쁨의 에너지 진동과 반대되는 에너지 진동을 완전히 흘려보냅니다.

완전히 용서할 때

부정적인 감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용서는 깊은 평화의 감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이기도 합니다.

 

용서가 지닌 이러한 잠재적인 혜택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용서의 대상에 대해 생각을 바꾼 상태가 아닌데도

억지로 용서하려고 스스로를 다그칩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서는 그런 식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난 용서는 할 수 있어. 하지만 결코 잊을 수는 없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직 진정으로 용서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냥 시간이 지나서 잊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은 결코 잊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기억해도 부정적인 감정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을 때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심지어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감정

이를테면 감사한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 일이 오늘날 당신의 인생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다른 감정이 들 때

비로소 그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나는 용서했어라고 말하면서

완전히 평화로운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면

용서라는 단어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쓰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냥 깊은 상처를 무시하고 억누르고 대충 덮고 넘어가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면의 상처는

몸에 난 상처와 마찬가지로 곪아 터집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이든 용서의 공간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깊은 상처를 받았을 때

그 무력한 상황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용서와 비슷한 행동을 취하기 이전에

상처 받았다는 사실과 슬픔을 인정하고 분노를 우선 표출해야 합니다.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끔찍한 기분과

아직 완전히 용서를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의 덫을 피하기 위해

이러한 과정을 먼저 겪도록 허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적당한 때가 되면

용서보다 더 기분 좋게 느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을 용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도 없습니다.

 

용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과 관계가 있습니다.

용서를 받는 사람도 매우 기쁘게 느끼겠지만

용서는 사실 우리 자신에 대한 것입니다.

 

용서하는 대상이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용서는 일방적인 것입니다.

누구를 용서하든

그 사람이 옆에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치유는 자신 안에서 홀로 일어납니다.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는 분노, 죄책감, 부당함의 감정은

전적으로 우리 안의 근원과 일치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부정적인 상황이 현실 속에 드러나게 하는 우리의 생각들은

우리의 상위자아의 에너지 진동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그러한 불일치가 가져온 결과입니다.

 

당신의 상위자아는

다른 사람을 부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습니다.

상위자아는 어떤 것도 부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관점에 맞춰진 생각은

당신의 상위자아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근원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용서는 생각을

당신의 상위자아와 일치하는 방향에 맞추는 과정입니다.

 

용서는 어떤 것을 없던 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당신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어떤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뭔가 용서할 거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고맙습니다.

오늘도 평온하시고 고요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