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그라운드(2024)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Buddhastudy 2022. 9. 15. 19:07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부모님 두 분 다 결혼 전부터 교회를 다니셨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기독교인 되었죠.

 

제목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거 낚기 위한 제목 아니냐고 하실 수 있는데요.

그 제목도 맞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의 기준으로 보면 전혀 기독교인이 아니죠.

 

저는 일단 교회를 나가지 않습니다.

한국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에서 말하는 성서 무오설

성경에는 오류가 없고 성경은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생각에도 반대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조론도 믿지 않아요.

진화론을 믿죠.

하지만 저는 스스로 기독교인으로 생각합니다.

성경의 핵심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기독교의 핵심 가르침은 딱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건 진리를 사랑하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웃을 사랑하라.

이 두 가지 가르침은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항상 따르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현대 한국 교회의 기준에 따르면 저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럼 제목을 이렇게 바꿀 수 있겠네요.

'나는 왜 한국 교회가 말하는 기독교인이 아닌가?'

 

제가 이렇게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게 된 이유를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기독교 자체의 모순 때문입니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제목은

사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책 제목에서 따온 겁니다.

 

러셀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이 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 하느님도 원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도 어릴 때 교회 선생님들에게 항상 물었던 질문이죠.

"세상은 하나님이 만들었고 그럼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어요?"

 

이에 대한 기독교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이건 설명이 아니라 선언이죠.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면 교회 선생님들은 이렇게 말하죠.

하나님은 인간이 제대로 설명도

이해도 할 수 없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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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신이 인간이 죄를 저지를 줄 미리 알았다면

그가 인간을 창조하려고 결정할 때부터

이런 죄악의 모든 결과에 대하여 책임이 명백하다.”

 

이 시대의 대표적 회의주의자인 마이클 셔머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이 전능하다면 악의 존재를 막을 수 있지 않은가?

신이 자비롭다면 악의 존재를 막아야만 하는 것 아닌가?

따라서 악이 존재한다면 신이 전능하지 않거나 자비롭지 않은 것이다.”

 

바로 악의 문제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이 존재하는 악과 부조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하는 문제죠.

 

하나님이 완벽한 분이라면 완전하게 선한 존재라면

애초에 이런 악이나 부조리가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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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내부의 문제도 심각합니다.

특히 일부 목회자나 장로 같은 교회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교회를 자신의 부와 명예를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죠.

 

특히 대형교회들을 보세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목사 자리를 세습하고

돈 문제로 서로 파벌을 나눠 싸우고 소송까지 가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교회 내 성폭력 문제도 심각하죠.

2016년 성폭력 범죄 발생 건수는 29289건이고

이 중 3분의 1가량이 종교를 가진 사람이 저질렀습니다.

 

그중 기독교 성폭력 범죄가 가장 많은데 4131건이었지요

알려진 게 이 정도고 알려지지 않은 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심심치 않게 터져 나오는 교회 내부의 부조리를 보면

헌금, 십일조를 내가면서 그들의 배를 불려줄 이유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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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역사를 한번 볼까요.

대부분 기독교인들은 현재 완성된 기독교의 모습만 봅니다.

기독교가 처음에 어떻게 만들어지고

지금 현재의 모습으로 변화해 왔는지 잘 모르죠.

 

초기 기독교의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달랐습니다.

지금의 기독교가 되기까지 여러 논쟁도 있었고, 변화도 많았습니다.

지금의 기독교는 예전부터 변함없던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역사를 통해 오랫동안 진화해 왔습니다.

 

이 사실 자체가 기독교가 변함없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변화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기독교 내부에 셀 수 없이 다양한 교파가 있다는 게 그 증명이죠.

도대체 어떤 교파가 진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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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정말 보편적인 진리의 종교라면

전 세계에 균일하게 골고루 퍼져야 합니다.

살인이 전 세계 모든 곳에서 금지인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렇지 않죠.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는 문화와 마찬가집니다.

지역적 문화적인 한계를 넘을 수 없는 것이죠.

 

제가 왜 모태신앙이 되었을까요?

당연히 부모님이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죠.

만약 제가 중동지방에서 태어났다면 이슬람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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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자신의 책 안티 크리스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어떤 의미 에서의 잔인함이 그리스도교적이다.

다르게 생각하는 자들에 대한 증오와 박해하려는 의지도 그리스도교적이다.”

한마디로 기독교는 잔인하다는 말이죠.

 

러셀도 비슷한 취지로 말합니다.

기독교를 지켜 온 사람들이 대개 매우 악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상한 사실, 즉 어느 시기에 종교가 강하면 강할수록

독단적인 신앙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 잔인성은 더했고 사태는 더 나빴습니다.

이른바 신앙의 시대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정말 철저히 기독교를 믿었는데도

종교재판의 고문은 극에 달했습니다.

불행한 여성이 수없이 마녀로 몰려 화형에 처해지고

종교란 이름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갖가지 잔인성이 가해졌습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호전적이고 잔인한 종교였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다른 종교를 배척하고 탄압하면서

앞서나갈 수 있었던 것이죠.

지금도 타 종교에 대해서 굉장히 배타적이죠.

 

 

이런 수 많은 모순들 때문에

저는 기독교를 더 이상 유일한 진리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또 역설적으로 기독교가 유일한 진실이 아니라는 관점을 받아들이면

이런 모순이 쉽게 설명됩니다.

 

과학적인 사고, 이성적인 관점을 받아들이면 훨씬 매끄러운 설명이 가능해 지죠.

어릴 때부터 가져온 많은 의문점들이

기독교를 벗어나서 과학적 관점에서 보니 해결되는 게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7일 만에 세상을 만들었다.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예수다.

 

이런 얘기들을 들을 때마다 어딘가 찝찝했습니다.

단군신화에서 곰이 사람이 되었다,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 같은 신화와 별 차이점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우주의 시작, 인류 기원에 대한 과학의 설명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보다 훨씬 합리적입니다.

명확한 증거와 이론을 통해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죠.

 

사실 사람이 제대로 이성적 과학적 사고를 하기 시작한 건 불과 몇 백 년에 불과합니다

종교적인 본능이 훨씬 강했기 때문이죠.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일은 '신의 뜻이다'라고 선언하고 쉽게 믿었습니다.

 

이렇게 본능적 사고는 자연스러운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리는 아니죠.

 

반대로 과학적 사고는 어렵습니다.

어렵게 공부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본능을 거스르는 것이죠.

어려운 선택을 하는 겁니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지성인이라면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게 맞겠죠.

 

과학은 인류가 더 이상 어떤 신적 존재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자세입니다.

과학적인 사고는 개인에게도 의미가 있습니다.

내 삶을 외부나 남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개척하는 자세와 닮았기 때문이죠.

 

 

마지막으로 제 경험으로도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인지할 수 없었습니다.

한때는 내 신앙이 부족해서 아닌가 라고 고민도 엄청나게 했었죠.

교회 선생님, 전도사님, 목사님들은 성령님을 체험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얘기합니다.

대학을 가서도 교회 대학부 선배들이

'성령 체험을 해야 진짜 거듭난 사람이다'라고 계속 압박합니다.

 

그래도 아무런 체험도 감동도 할 수 없었죠.

하지만 주위 많은 친구들이 저와 비슷했습니다.

정말 신앙이 좋아 보이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 같이 보이는 친구는 아주 드물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렇게 신앙이 좋아 보이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감정적으로 쉽게 치우치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저의 가설은 이렇습니다.

감정적으로 쉽게 치우치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과 종교적 체험을 혼동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죠.

 

줄리언 바지니는 그의 책 진실사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서의 말씀을 믿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많은 이들이 꼽는 공통적인 이유는

성서의 신에 대한 믿음을 확증해주는 신과의 직접적 만남을 강렬하게 체험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체험을 한 적이 없는 이들이 보기에

그토록 중요한 믿음의 기반으로 그 정도의 체험은 허약해 보인다.

역사를 돌이켜봐도 사람들은 저마다 신과 교감을 나눴다는 주장을 해왔지만

상충되는 주장이라 그다지 신뢰할 만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 뇌와 감정은 속임수에 아주 취약합니다.

우리 뇌는 쉽게 속아 넘어가고 감정은 자주 바뀝니다.

 

개인적 신앙경험은 종교의 진실성을 담보할 수 없는 것이죠.

교회는 이렇게 쉽게 움직이는 사람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이용합니다.

 

교회에서 자주 하는 기도회, 수련회, 부흥회 같은 집회에서는

비트 강한 음악을 아주 크게 틉니다.

조명도 어둡게 하죠.

 

주위에서 사람들이 기도하며 소리 지르고 울부짖고

비트 강한 음악이 계속 귀를 때리면 감정적으로 동요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종의 트랜스 상태에 빠지죠.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성령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는 클럽에서 사람들이 무아지경에 빠지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죠.

무당들이 굿할 때 북소리, 종소리로 사람들 혼을 빼놓는 것도 동일한 메커니즘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당신을 지켜보시며 보호해 주십니다.”

 

보호해 주는 건 좋은데 항상 지켜본다니 마냥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담스러웠습니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누군가 지켜본다는 느낌이 오히려 답답했죠.

 

하지만 이런 믿음을 바꾸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마지막에 무대 밖으로 나가는 장면 기억하시죠?

끊임없는 몰래카메라에서 벗어난 느낌이 홀가분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안 나가기 시작하니까 삶이 훨씬 여유로워졌습니다.

주말에 못 쉬고 아침부터 교회 나가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그전에는 몰랐습니다.

안 나가니 알게 됐죠.

 

이번에 코로나 때문에 교회 안 가게된 사람들이 많이 느낄 겁니다.

주말에 여행도 못 갔었는데 이제 맘 편히 여행도 다닐 수 있어서 더 좋네요.

 

 

이렇게 크게 3가지 측면

기독교 자체의 모순, 현대 과학, 개인적 경험때문에

저는 더 이상 한국 교회의 기준으로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항상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섰습니다.

부패한 정치와 종교를 강하게 비판했죠.

평등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현재의 한국 기독교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죠.

현재 한국 기독교는 일부 목회자들과 장로들, 기득권을 가진 집단의 이익을 위한

사조직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의 시각에서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에서 말하는 기독교만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네모에 갇혀있습니까?

그 터무니없는 네모를

깨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