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종교가 사라진 세상! 지옥일까? 천국일까?

Buddhastudy 2022. 9. 22. 18:46

 

 

 

예수가 재림하면

가장 먼저 목사들에게 맞아 죽을 거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런 해괴한 얘기가 회자하는 이유는

종교의 근본적인 문제에 기인합니다.

그건 다름 아닌 신격화입니다.

 

동물의 세계는 한마디로 적자생존입니다.

사람 역시 형태만 다를 뿐 구조는 동일합니다.

그래서 욕심 가운데 권력욕이 가장 큽니다.

사실 서열 싸움은 좁다란 골목에서부터 노인정까지 예외가 없지요.

 

정치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철면피가 되는 데 주저하지 않는 이유 역시

권력욕 때문입니다.

권력욕은 너무 강해서 여기엔 천륜도 피해 가지 못합니다.

 

역사를 보면 아비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와 형제를 도륙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던가요.

 

그런데 세속의 이런 권력욕은

종교에 비하면 그저 새 발의 피입니다.

세속의 권력은 하드웨어를 장악하기 위한 투쟁이지만

종교는 소프트웨어를 타깃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종교는 인간의 영혼을 지배하기 때문에

이만큼 큰 권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역사를 보면 로마가 하드웨어에서 밀리자

가톨릭을 만들어 소프트웨어 쪽으로 전향하지 않았던가요.

그 결과 나라가 수시로 망하고 세계 대전이 발생해도

가톨릭의 지배력은 끄떡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파생된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렇게 유일신 종교가 인간의 영혼을 강력하게 지배할 수 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조인 예수가 살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예수가 없으니

주님의 뜻을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얼마든지 왜곡해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지요.

예수를 신격화해 믿음을 퍼뜨리고 신도들의 이성을 마비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가 다시 오면

목사들에 의해 맞아 죽는다는 끔찍한 말까지 등장하는 것입니다.

재림예수는 자신들의 권력을 행사하는 데에 절대적인 방해 요소가 되니까요.

 

 

그렇다면 불교는 어떨까요?

 

불교는 그 자체로 깨달음의 종교이기 때문에

유일신 종교에 비해 그런 문제가 적습니다.

하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무시하고 넘어가기에는 나름의 병폐가 심각합니다.

 

불교에서의 권력은 깨달음입니다.

아무리 법랍이 높아도 깨닫지 못하면 중생 나부랭이에 불과하겠지요.

그러니 어떡하든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신이 모시는 스승부터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스승 역시 체면 때문에 자신은 이미 깨달아 있어야 하고요.

스승과 제자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사찰의 큰스님이라고 하면 견성의 꼬리표는 으레 붙어 있습니다.

 

뭐 이 정도까지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스승이 죽으면서 발생합니다.

제자가 더 높은 지위를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스승이 어마어마한 경지에 올라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스승이 입적하면 어떡하든 그의 신격화에 매달리게 됩니다.

서로 아옹다옹하던 제자들이

스승의 신격화에는 일치단결해서 당대 최고의 선지식으로 포장하는 것이지요.

책도 여러 권 쓰고 법문도 두루 하여 스승의 도력을 다방면으로 선전해 댑니다.

이렇게 스승을 높이면 높일수록 그 밑에서 수행한 제자의 법력은 수직상승합니다.

 

사실 스스로 돋보이려 하면 我相이 발동한다고 되레 욕을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승을 한껏 높이면 이런 질타도 없이 만사형통인 것이지요.

 

그래서 세간에 보면 선전 패턴이 동일합니다.

법문의 7~80프로는 스승 자랑이고

나머지는 그 밑에서 공부하며 깨우쳐 나간 자신의 얘기입니다.

 

제자 자신은 하근기이지만

스승님의 공덕에 의해 깨우치게 되었다는 내용을 첨가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겸손을 바탕에 깔면서 스승을 신격화하면

我相의 잣대를 피하면서 권력욕에 대한 소귀의 목적을 이루게 됩니다.

 

물론 이런 패턴을 인지하면서 하는 건 아닙니다.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我相

교묘하게 제자 자신을 속여 그렇게 행동하게끔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 자신은 양심껏 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알고 그랬든 모르고 그랬든

자기 스승을 높이는 데에 사활을 걸게 되고

이런 이유로 인해 수행자 거의 대부분이 견성하고 성불한 것이 됩니다.

법통도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고요.

 

견성을 인가하거나 깨달음의 증서를 내려주는 것도 연장선에 있습니다.

사실 견성 인가증을 배부하는 행위는

교황청의 면죄부보다 더한 코믹하고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교에서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마음을 비워 착하게 살라는 얘기에도 가시가 돋쳐 있긴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순한 양이 되어 복종을 잘하라는 뜻이 숨어있으니까요.

사실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아무리 마음을 비우고 선행을 쌓아도 한계가 있지 않던가요?

 

인류사를 되돌아보면

온통 종교의 전쟁으로 얼룩져 있고

그 화약고는 오늘날에도 어김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종교의 옷을 걸친 상태에서는 착한 것이 착한 것이 아니라는 방증인 것입니다.

 

이처럼 종교의 병폐는 인류의 정신문명에 크고 작은 해악을 끼칩니다.

물론 사람이 어렸을 적엔 부모의 보살핌을 받는 것처럼

종교 역시 인류의 정신적 성장을 보듬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이가 크면 부모에게서 독립하는 것처럼

이미 훌쩍 성장해 버린 인류는 종교의 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달나라 별나라의 동화를 믿으면 안 되는 것처럼

현세 인류는 마땅히 종교의 원시적 교리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다행인 것은 종교인의 숫자가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디지털 세계에 익숙한 똑똑한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물갈이가 되는 과정인 것이지요.

 

한국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그 사실이 명백해집니다.

1984년에서 2021년에 걸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무종교인의 비율이 60프로를 넘어섰습니다.

과거에 4~50프로 대에 머물렀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결과이지요.

이뿐만 아니라 종교인들이 종교 활동에 투자하는 시간도 급속도로 낮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추세라면 무종교인의 비율이 얼마 지나지 않아 70프로를 웃돌게 될 것입니다.

 

 

이대로 쭉 나가서 종교인이 지구에서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세상에 종교가 없다는 얘기는

원시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세뇌된 영혼을 지닌 미숙아들이 없어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인류의 정신문명은 활짝 만개하고

사람들은 보다 성숙한 사회에서 저마다의 가치를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떻게 될까요?

 

불교는 애초부터 그 실체가 없습니다.

있으면 있는 거고 없으면 없는 겁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불교가 없어졌을 때 진짜 불교가 되기도 합니다.

달달 외우던 경전을 불살라버릴 때 참된 법이 드러나고

부처를 만나 부처를 죽일 때 진짜 부처가 현현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영화 [루시]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사라진 루시를 보고 피에르 형사가 노먼 박사에게

그 여자는 어디에 있나요?” 라고 묻습니다.

이때 루시의 메시지가 그의 핸드폰으로 전송됩니다.

나는 모든 곳에 있다

 

불교 역시 사라져도 사라질 수가 없습니다.

깨달음의 종교란 원래부터 있지 않았고 그래서 없어질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불교인 것이지요.

과연 우리 세대에 종교가 사라지는 날을 볼 수 있을까요?

 

영적 혁명

말은 거창하지만 쉽게 말하면 종교인이 사라지는 그 날이 될 것입니다.

종교가 역사적 유물로서 남게 되는 날

인류는 호모사피엔스의 시대를 마감하고

한 차원 높은 호모데우스의 세상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호모사피엔스의 마지막 인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보는 건

때 이른 바람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