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공(空)으로 보는 금강경 제5장 일체의 相은 相이 아니다

Buddhastudy 2022. 10. 20. 19:47

 

 

諸相非相分

일체의 이 아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한가?

나의 몸을 보고 여래를 봤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나이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의 몸을 보고 여래를 봤다고 할 수 없나이다.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께서 몸이라고 하신 것은

사실은 몸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형상 있는 모든 것이 다 허망한 것이로다.

만일 유란 것이 유가 아님을 안다면

여래를 보게 되리라.”

 

 

 

解義

본 장은 법상에 대해 설법하고 있다.

 

상이란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형태를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쉽게 로 정의 할 수 있는데

그 가운에 부처를 이루고 있는 상이 곧 법상이다.

그렇다면 법상을 보면 실존이 보이는가?

 

수보리의 말마따나 그렇지가 않다.

부처의 몸을 아무리 본들

실존을 볼 수 없다.

그것은 부처의 몸이라 한들 ()란 것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존을 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

이 이치를 터득하면 실존을 볼 수 없는 눈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제상비상 즉견여래이다.

 

상이 상이 아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것은 달리 유가 유가 아니라는 말인데

도대체 유가 유가 아니면 뭐라는 말인가?

 

불교에서는 그 답으로 공을 제시한다.

공이란 유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도 아닌

비유비무한 제3의 존재 형태이다.

 

공이 유에 속하지 않고 무에도 속하지 않는다면

그런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겠느냐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참된 존재인지 한번 궁구해 보자.

 

존재에는 세 가지 경우의 수가 있을 것이다.

유와 무 그리고 공이다.

이 가운데 실존이 무엇일까?

 

깨달은 세존의 눈엔

유란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

무 역시 마찬가지다.

 

유와 무가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면

그 어떤 정신적 경지를 거론해도 중생이다.

수행을 천년만년 지속하고

이치와 반야에 막힘이 없어도 중생이다.

 

왜냐,

중생과 부처의 구분은

유무로 보느냐

공으로 보느냐에 따라

확연히 갈라지기 때문이다.

 

수행?

그리 복잡하게 할 필요가 없다.

유와 무와 공만을 가지고 화두로 삼고

이 셋의 묘리를 깨닫는 과정에

묵조선이나 사마타, 위빠사나, 간화선.. 등의 수행을

보조적으로 취해 쓰면 된다.

 

묵조선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었어도

사마타를 통해 일체의 분별에 장막을 드리웠어도

위빠사나를 통해 외계와의 순수공명을 이루었어도

간화선을 통해 이치에 막힘이 없어도

실존에 대한 온전한 깨달음이 없으면

중생일 뿐이다.

 

깨달음,

그것은 삼라만상 모든 것이 존재하는 참된 모습을 통찰하여

그 답을 얻는 데에 있다.

 

그렇기에 유무공의 세 주사위를 던지며

반야를 증득하는 것보다

더 단순하고 확실하고 빠른 길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