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공(空)으로 보는 금강경 제7장 걸림이 없이 분별을 드러내다

Buddhastudy 2022. 10. 27. 19:28

 

 

 

수보리야,

네 상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무상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그리고 여래가 설법한 바가 있다고 여기느냐?

 

이게 수보리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제가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뜻을 헤아려 보건데

딱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것이 없사옵니다.

게다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 역시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사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이란 것은

사실상 취할 수가 없고 말할 수가 없으며

그래서 법이 아니고 그렇다고 법이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일체의 성현들께서는

무위의 법으로써 분별을 나타내기 때문이옵니다.”

 

 

-解義-

본 장의 주제는 이무위법 이유차별이다.

11장에 나오는 금강경의 공통 주제인 응무소주 이생기심과 같은 맥락의 가르침이다.

 

무위의 법이란

어떤 목적이나 계획, 분별이 섞이지 않은 가르침을 말한다.

그래서 이것은 부처의 가르침, 불법이 된다.

 

왜 불법은 무위의 법이어야 하는가?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제도해야 할 중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끌어 완성할 것도 없고 그냥 내버려 둘 것도 없다.

삼라만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자체가 실존인 까닭이다.

 

따라서 부처는 무위에서 법을 설한다.

무위라는 본처에서 법이라는 분별을 펴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부처는 성으로도 보이고 속으로도 보인다.

 

어떤 때는 고고한 학처럼 거룩하면서도

어떤 때는 흔하디흔한 참새처럼 범속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는 법과 속 모든 것에 걸림이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실존과 허상, 절대와 상대, 통합과 분별.. 등의 모든 속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이런 부처의 경지를

화엄경에서는 사사무애로 표현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바로 그 해답이 이무위법 이유차별이다.

무위의 법으로써 분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가히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경지이다.

부처는 분별을 초월하여 절대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절대라는 또 다른 분별에 갇힌 꼴이 된다.

 

그렇기에 부처의

분별과 절대를 한꺼번에 초월하여

분별과 절대에 함께 머물러야 한다.

 

그래서 법이면서 비법이고

법도 아니고 비법도 아니게 된다.

이쯤 되어야 가히 해탈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