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1

[나탐 Natam] 깨달으면 정말 괴롭지 않고 삶에 아무 문제가 없을까?

Buddhastudy 2022. 11. 7. 19:56

 

 

 

깨닫게 되면 더 이상 괴롭지 않고 평온하게 살 수 있겠지?

깨닫게 되면 삶이 아무 문제 없이 펼쳐지겠지?

빨리 마음을 정화해서 빨리 깨닫고 싶어!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살다보면 괴로움을 겪게 되고

그때부터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괴로웠던 마음이 가벼워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무지가 벗겨지면서

기존에 몰랐던 것을 깨닫게 되는 경험을 하기도 하죠.

 

이런 체험들이 일어나게 되면

수행의 중요성을 깨닫고

일상에서 마음을 닦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꾸준히 집을 청소하고 살아가듯이요.

 

근데 자칫하다가 어떤 일이 생길 수 있나요?

수행에 대한 마음이 과해지면서

깨달음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게 되기도 합니다.

 

더 열심히 수행을 하면 깨달을 수 있을 거야

마음을 정화하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겠지

깨닫게 되면 괴로움이 사라지고 삶의 문제가 없어지겠지

깨닫게 되면 행복하겠지

깨달으면 인정받겠지

 

이런 식으로

깨달음에 대한 욕심과 환상이 생기면서

마음 정화를 완료해내야만 하는 숙제같이 느끼게 됩니다

 

깨닫는 것이 중요해져 버리면서

누구는 깨달았네 못 깨달았네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을 나누고

저 사람은 깨달았으니 아무 문제 없이 살겠네

저 사람은 괴로워하니 문제가 있는 것이네

분별을 하게 됩니다.

 

깨달은 나를 추구하면서

깨닫지 못한다 나, 불완전한 나, 평온하지 못한 나를 마주하게 될 때마다

이를 인정하지 않고 무의식에 억누르기도 하죠

 

수행이 해결에 내야 할 숙제 같은 것이 되어 버리니

명상을 더 많이 하려고 하고

더 많은 정보를 습득하려고 하고

더 많은 감정을 정화하려고 하고

또는 감정을 차단하려고 합니다.

 

근데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 있죠.

괴로움이 찾아옵니다.

특히 예전보다는 많이 알게 되고, 마음도 편해지고

나 좀 깨달았나? 긴장을 늦출 때쯤

현실에 또 문제가 생기고

예전보다 더 큰 강도로 괴로워지게 됩니다.

 

이상하다 싶을 거예요.

분명히 수행을 열심히 했죠.

감정도 많이 풀어냈고 앎도 많이 일어났는데

대체 왜 더 괴로워질까요?

깨달음에 대한 환상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

정말 마음을 정화하고 깨닫게 되면

괴로움 하나 없이 삶이 완벽해질까요?

물론 깨달으면 당연히 괴로움이 없죠 하지만 실상은 어떠할까요?

 

우리가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은

에고가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몸이 죽고 마음과 의식이 완전히 사라져서

현실 역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깨달음은 절대 미션 완료하듯이 체험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실을 인식하려면

에고가 있어야 하는데

에고는 깨닫지 못함을 기본값으로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있어야만 현실을 체험할 수 있는데

이 마음으로 인해 괴로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현실과 마음 그리고 괴로움은

삼종 세트로 붙어 있어서

현실을 사는 동안은 마음이 일게 되면서

괴로움 역시 일어나게 됩니다.

 

깨달아서 괴로움을 완전히 없애겠다고 하는 것은

몸과 마음과 의식을 사라지게 해서

현실 역시도 사라지게 하겠다는 것과 같아요.

 

깨닫는다는 것은

출발선에서

요이땅 달리기에서 깨달음이라는 결승선까지 간 사람은

더 이상 발릴 일이 없고

괴로움이 없게 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과정에서 우리 모두는

출발선과 결승선이 없이, 처음과 끝이 없이

돌고 또 돌고 있는 상태로

애초에 결승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결승선에 도달한 사람과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

구분된 채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우주 만물은 순환하고 또 순환합니다.

깨달은 것은 소멸되고

소멸된 것은 다시 깨닫지 못함으로 태어납니다.

 

앞선 자는 뒷선자가 되어버리고

뒷선자는 곧 앞선 자가 되어버리는데

어떻게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를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모두는 이미 그 자체로 깨달아 있지만

여러분의 에고가 없으면 스스로 깨달았다는 인식을 할 수 없습니다.

참나 자체로서는

깨달았다 깨닫지 못했다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은

참나가 아닌 에고로

에고가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다 보니

그런 표현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깨닫지 못한 에고를 통해서만

깨달음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데

에고가 깨달음을 인식하는 순간

동시에 깨닫지 못함이 되어 버리고

깨닫지 못함을 겪어야만

다시 깨달음을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완료형으로

나는 깨달았다는 반쪽짜리 표현을 쓰는 순간

에고가 깨달음을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작용하여 다시 깨닫지 못한 상태가 되고

괴로움이 시작됩니다.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이

이 둘은 아무 차이 없이 같은 것입니.

우리가 숨을 쉴 수 있으려면

숨이 들어옴과 나감이 쌍으로 있어야 하듯이

에고를 통해서 현실을 체험할 수 있으려면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이 쌍으로 가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이 둘을 나누어서

뭐는 낫고 뭐는 못났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고

한쪽을 추구할 일도

다른 한쪽을 멀리 할 일도 없는 것이죠.

 

여러분 모두는

하루에 수도 없이 참나로 깨달아 했다가도

에고로 깨닫지 못했다가도

깨달았다가도

깨닫지 못했다가도

마음이 사라졌다가도

마음이 일어났다가도

이 과정을 순간순간 찰나로 반복해서 겪고 있어요.

단지 그러고 있는 것에 대한 자각이 있냐 없냐에만 차이가 있을뿐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미 여러분 모두가 수도 없이 체험해 왔고

지금이 순간에도 체험하고 있는 것으로

결코 저 멀리 목표 도달하듯이 이루어내야 할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괴로움은 없다가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 있다가도 얼마든지 없어지는 것입니다.

깨달았다고 하는 마음 바탕에는 깨닫지 못함이 있는 것이며

깨닫고 싶어하는 마음 바탕에는 괴롭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이 힘들고 괴롭기 때문에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깨닫고 싶은 마음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괴롭다, 깨닫고 싶다는 거 역시 마음이니

그 역시 인정하면서

마음이 왜 깨닫고 싶어 하는지

그 바탕에는 괴로움이 있진 않은지

마음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서 들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에고로 사는 동안은

깨달음은 목표 완료하듯이 쟁취하는 것이 아니기에

굳이 표현하자면

우리는 깨달아가는 과정과 무지에 가는 과정을 동시에 겪는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럼 본론으로 돌아와서 질문을 다시 해 볼게요.

 

우리가 마음 정화를 하고 깨달음의 길을 가는 경우

삶의 문제가 생기거나 괴로움이 일어날 수 있는가

답은 네.

당연히 언제든 삶의 문제가 일어날 수 있고

괴로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마음 정화를 하고 점차 깨달아 간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삶이 완벽하고, 아무 문제가 없고, 아무 두려움 고통이 없고

행복과 평화만 있는 상태에는 도달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뭐가 달라지느냐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쉽게 비유해서 설명해 볼게요.

예를 들어서 몇십 년간 집 청소를 안에서 집이 너무 더럽다고 해볼게요.

더럽다 보니 몸의 병이 나고 괴로워져서 도저히 못 살겠다 싶어서

대청소를 하게 됩니다.

 

몇십 년치의 묵은 때를 청소하게 되면

양이 많은 만큼 시간도 오래 걸리고

너무 힘들지만

청소를 해낼수록 집이 깨끗해집니다.

 

마음 청소도 마찬가지예요.

감정이 쌓여서 마음의 병이 나면 마음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동안 억눌려 있던 많은 양의 감정을 토해내게 되면서

오랜 시간 굉장히 괴롭게 되죠.

하지만 감정을 풀어낼수록 마음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자 근데 집 청소는 한 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평생 해야 하는 것이죠.

아무리 대청소로 깨끗해지고 병이 나아도

일주일 지나면 어떻게 되나요?

집에 다시 먼지가 낍니다.

 

마찬가지로 마음 정화를 하여 마음이 예전보다 건강해지고 현실도 편안하게 나타난다 하더라도

마음에 다시 먼지가 낄 수 있게 됩니다.

다시 괴로움이 일어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마음 정화를 하면 괴로움 없이 편하게 살 수 있게 되겠지?

라는 기대는 집 대청소 한번 하고 나면 다시는 집이 더러워질 일이 없겠지?

운동에서 건강해지면 다시는 운동할 필요가 없겠지?

라고 여기는 것과 똑같습니다.

 

열심히 힘들게 운동해서 건강해진다고 해도

그 상태가 절대 완료 정지된 채로 있지 않잖아요.

깨달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예전보다 앎이 일어나고

마음이 건강해진다 하더라도

그 상태가 완료 정지된 채로만 있지 않아요.

아무리 운동으로 건강해졌어도

운동을 멈추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건강이 안 좋아집니다.

 

인간으로 사는 동안은 몸을 가졌으니

운동을 꾸준히 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인간으로 사는 동안은

마음을 가졌으니 마음 운동 역시도 꾸준히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근데 이쯤에서

아니 어차피 다시 괴로울 거라면 뭐하러 그 힘든 수행을 하나

어차피 집에 또 먼지 끼고 또 더러워질 건데 뭐 하러 힘들게 청소를 해야 하나

생각할 수 있죠.

 

수행은 먼지가 끼지 않기 위해 먼지를 차단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다보면 괴로운 일이 현실에 일어날 수 있고

그에 따라 괴로운 감정이 일어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수행입니다.

 

물론 수행을 하다보면 당연히 변화되는 것은 있습니다.

몸도 운동을 할수록 건강해지듯이

마음도 운동을 할수록 건강해지게 됩니다.

 

운동을 안 하고 살면 병이 나지만

운동을 하고 살면 면역력과 근육이 생기기 때문에

마음의 병을 쉽게 이겨내게 되고

괴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내가 운동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10kg도 낑낑대면서 힘들게 들겠지만

운동을 꾸준히 하다보면 100kg을 들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100kg를 들 수 있게 되면 10kg는 가볍게 될 수 있게 되죠.

 

근데 아무리 운동 경력자라도 운동할 때는 똑같이 힘듭니다.

100kg를 들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이 있었겠습니까.

무거운 무게를 들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지

아무런 고통 없이 운동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감정 정화를 해나가다 보면

예전보다 더 무거운 무게를 들 수 있게 되다 보니까

괴로움이 커지는 것 같다고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즉 수행하고 산다고 괴로움이 아예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운동을 안 힘들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운동 초보나 경력자나 무게를 들 때는 똑같이 괴롭습니다.

다만 내가 마음을 들여다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10kg의 감정을 보는 게 너무 힘들겠지만

마음 운동을 해나가다 보면 100kg 강도의 감정을 덜어낼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겁니다.

 

큰 파도가 칠 때 마음 근육이 없다면

파도를 무서워서 피하려다가 파도에 그대로 빠져서 허우적 되겠지만

마음 근육을 키워 놓는다면

파도에 몸을 싣고 파도에 따라 서핑을 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럼 그렇게까지 괴로움을 받아들이면서 힘들어야 하는 것인가?

애초에 파도가 안 오게 막을 수는 없나?

먼지가 안 끼게 할 수는 없나?

싶죠.

우리는 썰물이었다가 밀물이 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고

낮이었다가 밤이 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밀물 썰물이 있다는 것을

낮과 밤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수행이란

괴로움이 있다가도 없을 수 있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

왜 마음 정화를 하고 살아도 괴로움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세 가지 알아볼게요.

 

첫 번째 우리 모두는 집단 무의식으로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집단 무의식이 붙들고 있는 카르마 역시

개인에게 적용이 되어서

집단이 붙들고 있는 두려운 감정이 개인을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저기 아무것도 없는 남극에 혼자 덩그러니 집 한 채 딸랑 있는데서

창문 다 닫고

아무랑도 소통 안 하고 사는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살면 집에 먼지가 낄 일이 없겠죠.

하지만 우리는 가족과 학교, 사회라는 집단에 소속되어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일도 하고 인터넷도 합니다.

 

전 세계가 연결된 글로벌 시대죠.

북적북적한 곳에 다 같이 집을 짓고 창문을 열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다 보니까

당연히 우리 집에 먼지가 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에게는 가족의 무의식

일로서 연결된 사람들의 무의식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무의식

한국인 전체의 무의식

내 직계 조상이 붙들고 있는 무의식

과거 한국 조상 전체가 붙들고 있는 무의식

지구인 전체의 무의식

지구 역사 속 모든 것에 무의식 등

집단 무의식이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집단이 품은 무의식을 고스란히 내 생각 내 감정으로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겉으로는 개체 같지만

무의식에서는 모두가 다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나뭇잎 하나와 나무 전체가 별개가 아니듯이요.

내가 아무리 수행을 하고 산다 하더라도

집단 전생 조상 등에 가졌던 카르마에 따라

어떤 현상을 문제로 인식하게 되거나 괴로움을 겪는 일이 나타날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품었던 감정이 내 에고를 통해 느껴질 수 있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 품은 감정이 내 에고를 통해 느껴질 수 있고

죽은 자가 품었던 감정이 내 에고를 통해 느껴질 수도 있고

전생에 품었던 감정이 내 에고를 통해 느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개인이 집단 카르마의 영향을 받지 않ㅇ으려고 하는(관련성을 부인하는) 것은

나뭇잎 하나가

자기는 나무로부터 나오지 않았다 하는 것과 같고

나뭇잎 하나가 바닷가에서 파도가 오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것과도 같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파도(괴로움)가 못 오게 막는 것이 아니라

파도가 왔을 때, 내 나뭇잎(개인)을 포함한 나뭇잎 전체가

서핑을 잘 할 수 있도록 개인으로서 집단을 돕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 현실은 상대계인데

상대계에서는 한쪽만 계속적인 인식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깨달음만 영원히

행복함만 영원히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두려움이 있어야만 사랑이 인식이 되는데

사랑을 인식하고 나면

사랑에 대한 인식이 사라져서

다시 두려움을 겪어야만 사랑이 인식이 됩니다.

 

예를 들면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아 이게 바로 찐 평온이구나

평온한 상태를 체험할 수 있게 되는데

평온을 체험하고 나면

다시 평온을 인식할 수 없게 됩니다.

 

이는 엄청 추운 날 따뜻한 온천탕에 들어가면

처음엔 너무 따뜻하고 좋은데

탕 안에 계속 있다보면 처음이 느꼈던 그 감동을 느낄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평온을 인식하고 나면

평온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면서

다시 평온하지 못한 상태를 겪어야만

평온을 인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상대계에서는

한쪽을 겪고 다른 한쪽을 인식하고

다시 한쪽을 겪고 다른 한쪽을 인식하고를 반복하게 됩니다.

 

또한 우주 만물은 다양성을 기본으로 진화해 왔습니다.

나무의 종류가 다양하고

나무마다 모양이 다 제각각이듯이

우리 인간들도 각자 업보에 따라 좋아하는 것, 체험하게 되는 것이 다른 채로 태어납니다.

 

누구는 요리를 좋아하고

누구는 먹는 것을 좋아하고

누구는 아이를 돌보는 것을 좋아하고

누구는 손으로 기계를 만지는 것을 좋아하고

누구는 인터넷 하는 것을 좋아하듯이

여러분 같은 누군가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하고

깨달아가는 것을 좋아하고

사랑을 체험하는 것을 좋아하고

본인이 힘들었던만큼 다른 사람들의 힘든 마음을 덜어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번 생에서 마음을 들여다보고자 했기에

마음을 보지 않고 억누르고자 했던 것이고

깨닫고자 했기에 무지해지고자 했던 것이고

사랑을 체험하고자 했기에 상처를 받고자 했던 것이고

도움이 되고자 했기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마음을 충분히 정화하고 사랑과 깨달음을 체험하게 된다 해도

우리 에고는 또 다시 사랑과 깨달음을 인식하고자

두려움과 깨닫지 못함을 체험할 수 있는 현실을 창조하고 또 창조하게 됩니다.

 

세 번째 괴로움을 인생 곳곳에 세팅해 놓은 이유는

마음 근육을 유지하기 위함도 있습니다.

 

운동 경력자라도 운동할 때 괴로워야만 근육이 유지되듯이

마음 근육도 괴로움을 통해서 유지됩니다.

괴롭지 않다면 내면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겠지만

마음이 괴로운 사람은 내면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다 보니

근육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 근육을 갖게 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짊어진 마음의 무게를 들어줄 수 있게 됩니다.

내가 마음 근육이 하나도 없어서

내 감정 1kg을 들기에도 벅차고 힘들다면

누군가가 들고 있는 마음의 무게를 당연히 들어줄 수 없겠죠.

 

하지만 꾸준히 마음을 닦아 나가며 100km를 무게를 들 수 있게 된 사람은

누군가가 1kg의 무게를 드느라 낑낑대고 힘들어할 때

옆에서 수월하게 들어줄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현재 인류는 특히 한국은

과거에 쌓았던 카르마를 소멸시키는 단계에 들어와 있습니다.

앞으로는 집단적으로 억압됐던 감정을 해소하는 과정을 겪게 되기 때문에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게 되는데

마음 근육을 키워 놓은 사람은

어떤 방식이 됐든, 어떤 직업이 됐든, 어떤 활동을 통해서든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짐을 덜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만큼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괴로움을 겪게 된다면

가야 할 길을 잘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그런 일을 왜 겪게 되는 것인지를 이미 알고 있고요.

시청 감사합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그럼

다음에 만나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