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공(空)으로 보는 금강경 제10장 머무름 없이 생각을 내라

Buddhastudy 2022. 11. 9. 20:01

 

 

 

無住生心分

-머무름 없이 생각을 내라-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일러 말씀하셨다.

네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옛적에 연등불 문하에서 수행할 때

정녕 법에 대해 얻은 바가 있었는가?”

 

그렇지 않나이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불 문하에서 수행하실 때

법에 대해 실로 얻은 바가 없었나이다.”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한가?

보살이 불국토를 위해 여러 가지 진리적 선행을 베푸는가?”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 그런가 하면

불국토를 위해 진리적 선행을 베푼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보면 진리적 선행을 베푸는 것이 아니며

단지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뿐이옵니다.”

 

수보리야, 그렇기에 모든 수행자들은 마땅히 그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지녀야 하느니라.

형상()에 집착하여 마음을 일으키지 말지며

또한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 사념에도 집착하는 마음을 일이키지 말지니

마땅히 일체 모든 것에 머무름이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비유컨대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그 몸이 정녕 크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나이다 세존이시여.

왜 그런가 하면, 심히 크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나라는 경계가 없어져야 비로소 크다고 이름할 수 있기 때문이옵니다.”

 

 

-解義-

 

깨달음의 열쇠는 이다.

이 점에 대해 금강경을 비롯해 불법의 대부분이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왜 중생들의 눈에 공이 보이지 않는가?

이것이 보이면 깨달음의 열매를 단숨에 딸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깨달은 부처의 눈엔 삼라만상 어느 것도 이 아닌 것이 없다.

이렇게 되면 중생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데

이는 바꿔 말하면 중생이라고 착각하는 것들만 수두룩하게 널려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쩌다가 부처들이 깊은 착각의 늪에 빠져

스스로 중생이라 생각하게 된 것인가?

 

이건 하루 이틀에 걸쳐 생겨난 일이 아니다.

중생심으로 돌돌 뭉쳐 놓으려면 꽤나 오랜 세월이 걸렸을 것이다.

그 과정을 돌이켜 간략히 재연해 보자.

 

이란 비유비무한 것이며

이렇게 존재하기 위해서는 밖에는 없다.

이란

정보의 이합집산을 무한히 반복하며

그 결과에 가치를 부여하는 존재이다.

도 아니고 도 아니기에 영원불변한 실존이다.

 

그래서 삼라만상 모든 것이 아닌 것이 없다.

돌멩이나 쇠붙이도 이 굳어져 변화성이 적어진 것뿐이지

별개의 것이 아니다.

부수고 쪼개 보면 결국 정보 다발로 이루어져 있고

이런 정보는 결국 에서 유발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깨달은 자들이 이구동성으로 一切唯心造를 거론한다.

모든 것이 마음 먹기 달렸다는 뜻이 아니라

실제로 우주 삼라만상 모든 것이 이 만들었다는 얘기이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물질이라는 것들은

이라는 바다에서 떨어져 나온 물거품이다.

그 물거품에 속해 있는 우리들의 눈엔

그것들이 온통 바다와 구별되는 별개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보면

물걸품은 바다와 둘이 될 수 없다.

이 점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것이 불법이다.

물거품으로 알고 있는 중생들에게 바다의 존재를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중생이 불법을 통해 자신이 바다임을 깨달았다고 치자.

이때 변한 것은 무엇인가?

 

물방울이 바다로 변한 게 아니라 물방울은 원래부터 바다였다.

바다가 정보의 파도를 일으키면서 발생한 낱낱의 현상이 물방울일 따름이다.

따라서 물방울이 바다로 바뀐 게 아니라

별개의 피조물이라는 생각을 털어냈을 뿐이다.

 

이는 불법을 통해 물방울(중생)을 바다(부처)로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그래서 세존의 입에서

중생을 제도했지만 제도한 중생이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자신이 바다(부처)임을 깨닫게 된 물방울의 심정은 어떨까?

조각난 분별로 보다가 통합의 전체로 보게 된 느낌 말이다.

 

기이하게도 깨달아 부처(바다)가 되고 나면

다시 중생(물방울)으로 향하게 된다.

바다가 파도를 일으켜 물방울을 흩뿌리듯이

은 정보를 일으켜 창조를 이루고

그것을 감상하려는 쪽으로 움직인다.

 

그렇께 해서 물방울(중생)로 초점이 모아지면

다시 바다(부처)로 향하게 된다.

중생은 부처가 되고 싶고

부처는 중생이 되고 싶은 것

이것이 우주가 생겨먹은 본래 모습이다.

부처와 중생이 돌고 돌아 한 덩어리로 공존하는 모습

이것이 실존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생이 이래서 성립되는 것이다.

 

응무소주라는 바다에서 이생기심이라는 물방울을 일으키며

피아의 구분 없이 한 생명으로 둥글어 가는 모습

이것이 깨달은 부처의 모습이다.

 

이런 공존의 미학을 가르쳐

나고 죽음이 없이 열반의 가치를 일러주는 것이 불법이다.

그래서 불법을 일러

영생을 이루어 열반에 이르는 가르침이라 한다.

즉 영생과 열반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취하려는 수행인데

바로 응무소주라는 바다에서 영생이

이생기심이라는 물방울에서 열반이 나오게 된다.

이 둘 사이의 분별 자체도 사라져 들숨과 날숨처럼

한 호흡의 생명으로 화해 영존하는 것

이것이 여래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맞을까?

조사들이 바다와 물방울, 바탕색과 그림, 절대와 상대, 피안과 뗏목, 진아와 가아.. 등의

비교를 통해

깨달음을 설명하는 경우가 꽤 많다.

 

그런데 필자의 해설을 비롯해 이런 풀이들은

실존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더 냉혹히 말하면 깨달음과는 별로 상관없는 몽상들이고

그래서 제대로 깨달은 자의 입에서 나올 얘기들은 아니다.

 

그럼에도 세존을 비롯해 깨달았다는 자들이 이런 식의 법문을 하는 것은

사고의 힘을 길러주려는 의도이다.

분별심을 누그러뜨리려는 목적이지

깨달음과는 하등의 연관이 없다.

 

불법이란 것도 알고 보면

깨달음과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관련된 부분이 전무하다.

 

좀 극단적인 표현 같지만 사실이 그렇다.

그래서 경전을 암송하고 풀이하고 터득해도 사고의 힘은 커지지만

깨달음의 가능성이 그것에 비례해 높아지진 않는다.

 

사실이 이러하니

세존이 득도를 한 이후 전법을 포기하려 했던 것이다.

전법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법을 말해 봤자 죄다 거짓말이 될 테니

세존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그러면 불교의 경전은 모두 쓸모없는 것인가?

다행히 그렇지가 않다.

온통 거짓으로 이루어진 불교 경전에 비밀이 하나 숨어 있다.

그것을 불법을 열심히 익힌 후 부숴버리면

세존의 진짜 가르침이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금강경이 법을 세우고 나서

다시 그 법을 계속해서 허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