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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상식 세계사] 부룬디 10분 완벽정리

Buddhastudy 2022. 11. 24. 19:42

 

 

1. 소개

부룬디공화국(Republique du Burundi), 줄여서 부룬디는

아프리카 동부에 위치한 공화국으로

정치수도는 기테가(Gitega), 경제수도는 부줌부라(Bujumbura) 입니다.

부룬디의 국기는 1967년 제정하였고

1982년 가로세로 비율을 수정하여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2개의 흰색 대각선이 엇갈려 있고

위아래로는 독립을 위해 흘린 피를 상징하는 빨강

좌우로는 희망을 상징하는 초록색이 칠해져 있습니다.

중앙에는 흰색 바탕에 빨간색의 6각형 별 3개가 있는데

3개의 별은 통일, 노동, 발전을 의미하며

동시에 후투족, 투치족, 트와족 3개의 부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부룬디는 북쪽은 르완다, 동남쪽은 탄자니아

서쪽은 콩고민주공화국과 접한 내륙국이지만

서남쪽으로 탕가니카 호수와 접하고 있습니다.

 

부룬디의 국토면적은 약 28,000로 세계 144위이며,

이는 대한민국의 약 1/4 정도 크기입니다.

 

2020년 기준으로 약 1,20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인구수로 세계 78위이며,

대한민국의 경기도 인구보다 약간 적습니다.

 

부룬디의 1년 총 GDP2019년 기준 약 36억달러로

세계 160위이며,

1인당 GDP300달러 수준으로 세계 최빈국입니다.

 

부룬디 국민의 대부분은 키룬디어를 사용하며

프랑스 식민지배의 영향으로 프랑스어도 함께 사용합니다.

주민의 80% 가량이 후투족이며

15%는 투치족, 나머지는 트와족 등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부룬디의 종교는 로마가톨릭이 60%로 가장 많으며

그 외 토속신앙이 20%, 소수의 이슬람교도가 존재합니다.

 

 

 

2. 역사

부룬디 지역에 최초로 정착한 부족은 트와족이었으나

후에 반투족, 투치족이 유입되어 지배계급을 차지하였습니다.

 

14~5세기, 에티오피아에서 남하한 투치족이 부룬디 왕국을 세웠고

꾸준히 세력을 넓혀 현재 르완다와 탄자니아 지역에도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번영했습니다.

 

영토를 넓힌 부룬디 왕국은 19세기 후반, 부족장들과 국왕 사이에 갈등이 심해지는데요.

부족장들은 왕권을 탈환하기 위해 독일의 손을 빌렸고

그 대가로 군사권을 독일에 넘겨주면서

결국 부룬디는 1890년부터 탄자니아와 함께 독일령 아프리카 보호령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줌부라에 주둔 부대가 있었을 뿐

독일은 이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식민통치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콩고에 진주한 벨기에군의 지배를 받았고,

독일이 전쟁에서 패하자 르완다-우룬디1923년 벨기에의 신탁통치령이 되었다가,

1946년 말에는 UN의 신탁통치령이 되었습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민족독립운동이 일어났고,

부룬디는 르완다와 통합된 국가로 즉시 독립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르완다와 부룬디에는 별개의 왕이 존재했고, 종족간의 분쟁도 심했습니다.

1961년 르완다는 다수의 후투족이 폭동을 일으켜 국왕을 추방하고 공화제를 선포하였습니다.

 

르완다와 달리 군주제를 고수하던 우룬디는

1962년 부룬디 왕국으로 독립하였으나

4년 뒤인 1966년 국왕이 자이르 여행을 하고 있던 와중에

총리 미콤베로가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제를 선포하고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그 후로 부룬디는 1993년 선거 전까지

소수민족이었던 투치족 출신의 군부 독재자들이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1972년 발생한 광범위한 인종 폭력을 포함해 투치족과 후투족 사이에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부룬디의 정국은 계속해서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197611, 중령 장 바티스트 바가자가 이끄는 군대가

쿠데타에 성공하여 독재정치를 펼쳤고

1987년에는 피에르 부요야가 바가자 정부를 엎고 또 다른 독재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

 

부요야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1992년 헌법제정에 합의를 하였고

이듬해인 1993년 민주선거를 통해 메키오르 은다다예 부룬디 최초의 후투족 대통령이 당선되었습니다.

 

하지만 3개월 뒤 은다다예 대통령이 투치족에 의해 암살되면서

부룬디는 심각한 내전에 빠지게 됩니다.

최소 25만 명이 죽고 수십만명의 피난민이 발생한 투치족과 후투족 간의 부룬디 내전은

2000년 아루샤 평화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 이어졌습니다.

 

2005년 선거에서 후투족 출신의 피에르 은크룬지자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2009년에 내전을 최종적으로 종식시키는데 공헌했습니다.

 

하지만 20153선에 도전한 은쿠룬지자에 대한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나는 등

여전히 부룬디는 위태로운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정치 & 경제

원칙적으로 부룬디는 2005년 국민투표에 따라 제정된 헌법에 의해

대통령중심제 공화국으로

5년 임기의 대통령이 국가를 대표합니다.

 

20058월부터 임기를 시작한 피에르 은쿠룬지자(Pierre Nkurunziza) 대통령이 3선에 성공하여

15년간 장기집권하면서 독재의 길을 걸었으나

2020618, 갑작스럽게 사망하였고

에바리스트 은데이시미예(Evariste Ndayishimiye) 당선인이 국정공백을 메우기 위해

예정보다 2달 일찍 대통령에 취임하였습니다.

 

부룬디의 의회는 양원제로

5년 임기의 하원의원 100, 상원의원 54명으로 구성됩니다.

하원의원의 60%는 후투족, 40%는 투치족에 할당되며

상원의원은 국가원로와 소수민족 출신으로 구성됩니다.

 

부룬디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입니다.

현재 부룬디의 1인당 GDP는 약 300달러 수준으로

말라위, 남수단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낮은 편입니다.

 

잦은 내전과 쿠데타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면서

부룬디의 경제는 더욱 더 어려워졌는데요.

그나마 1999년 인도적 지원이 시작되긴 하였으나

현재까지도 음식, 전기, 의약품 등 심각한 물자부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노동력의 9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전형적인 농업국으로

주요 수출품으로는 커피, 홍차, 설탕, 면화 등이 있습니다.

특히 커피의 생산과 수출이 국가경제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며

부룬디 커피는 커피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한 편입니다.

 

니켈의 보유량도 상당하며

석유, 코발트, 구리, 백금과 같은 광물자원의 매장량 역시 많을 걸로 추정되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기술이 부족한 탓에

제대로 개발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4. 자연환경 & 문화

아프리카 동부에 위치한 내륙국인 부룬디는

국토의 모양이 심장과 비슷하다 하여

아프리카의 심장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이웃국인 르완다와 마찬가지로 언덕이 많은 지형이나

영토의 50% 가량이 농경지로 분류될 정도로 풍요로운 편입니다.

 

남서쪽으로는 탕가니카 호수와 맞닿은 중앙고원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고원의 평균고도는 1,700m에 달할 정도로 높습니다.

 

부룬디는 적도 부근에 위치해 있으나, 국토의 대부분이 고원에 있기 때문에

연평균 기온이 23도 내외로 크게 덥지 않습니다.

5월부터 9월까지가 건조한 건기이며

10월부터 4월까지 강수가 집중되는 우기철입니다.

 

낙후된 경제와 불안한 정치적 상황임에도 인구밀도가 높다 보니

부룬디에서는 기아 문제가 심각한 수준입니다.

아동 발육부진을 포함하여 세계기아지수 보고서에서도 부룬디는

모든 국가들 가운데 기아지수가 가장 높은 위험단계에 해당합니다.

 

잦은 내전으로 인해 전체 인구의 식량안보와 영양상태가 악화하였고

농업과 생태가 큰 타격을 입은 것도 원인으로 꼽힙니다.

뿐만 아니라 병원의 80% 이상이 에이즈 환자이며

2016년부터는 말라리아 발병률이 전국적으로 증가하고 있어

전쟁보다 더 큰 걱정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포크송과 춤이 발달한 국가로

투치족의 민족음악과 무용은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부룬디의 전통드럼은 벨기에로부터 독립했을 당시

부룬디의 국기에 포함되었을 정도로 국민들의 강한 문화적 뿌리라 할 수 있는데요.

1960년대부터 시작되어 60년 가까운 전통을 자랑하는

부룬디 로얄 드러머스 연주단은

왕실의 행사나 장례식과 같은 의식에서 전통음악을 연주할 뿐 아니라

세계투어를 펼치며 전 세계에 부룬디의 전통음악과 춤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또한 부룬디의 커피 역시 상당히 유명해서

아프리카에서는 르완다와 함께 단 2곳뿐인 CoE(Cup of Excellence)를 생산하는 국가입니다.

물이 풍부하고 해발고도가 높은 지리적인 조건이 커피 재배에 가장 적합하다고 합니다.

 

1930년 벨기에인이 가져온 아라비카 원두가 계기가 되어

부룬디에서 본격적인 커피생산이 시작되었습니다.

현재는 세계은행의 지원을 받아 국내에만 140여개의 Washing station을 세워

커피산업의 근대화를 이루었습니다.

 

대부분의 커피 농장은 소규모로 100% 수작업으로 생두를 수확하고 있습니다.

부룬디에서 생산된 커피는 조화로운 맛의 균형과 깔끔한 뒷맛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북서부지역에 키비라 국립공원 북동부지역에 루부루 국립공원이 있긴 하지만

부룬디는 국가치안이 매우 불안정한 국가로 여행불가능 지역입니다.

 

 

5. 인물

부룬디 출신의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명은

벨기에 축구리그팀 로얄 화이트 스타 브뤼셀에서 스트라이커로 활약하고 있는 무함마드 선수입니다.

 

1984년 부룬디의 수도인 부줌부라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축구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습니다.

 

부룬디의 프로축구팀인 드래곤 슈퍼레인저스 FC에서 정식으로 데뷔했고

2001, 프린스 루이스FC 소속으로 활약하면서

부룬디 프리미어리그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2002년 르완다로 진출한 무함마드는

그 해 벨기에 축구팀 스탕다르 리에주 감독의 눈에 띄어 스카우트되었습니다.

 

2003년 스탕다르 리에주에서 정식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한 무함마드는

3시즌 동안 총 58경기에 출전하여 21골을 기록했습니다.

 

특히 2005-2006 시즌동안 그는 총 16골을 몰아치며

팀을 벨기에 1부 리그 2위까지 끌어올렸고

득점왕 2위에 오르는 등 최전성기를 보냈습니다.

 

2006-2007 시즌동안 벨기에의 명문클럽인

안데를레흐트에서 역시나 좋은 활약을 보여준 무함마드는

2007, 스페인리그 진출에 도전합니다.

라싱 산탄데르에서 3시즌을 뛰면서 특유의 유연함과

폭발적인 스피드를 무기로 팀 성적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특히 200811월 발렌시아와의 원정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 후로 다시 벨기에리그로 돌아왔다가

산탄데르 매니저의 부름을 받고

루마니아 리그 소속의 FC 플로이에슈티에서 잠시 뛰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