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금강경 제15장 經을 지니는 공덕은 한량없이 크다

Buddhastudy 2022. 11. 24. 19:46

 

 

 

守經果大

-을 지니는 공덕은 한량없이 크다-

 

수보리야,

만일 어떤 선남자 선녀인이

아침 무렵에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몸으로써 보시하고

점심 무렵에 다시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몸으로써 보시하고

저녁 무렵에 또다시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몸으로써 보시하고

이와 같은 보시행을 무한한 세월 동안 반복한다 하여도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신심이 절로 우러나온다면

그 복덕이 전자의 복덕보다 큰 것이니라.

 

그럴진대 이 경을 몸소 써서 잘 간직하고

틈틈이 독송하며 남을 위해 일러주기까지 한다면야

말해 무엇하겠느냐.

 

수보리야,

요컨대 이 경에는 불가사의하게도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이 있나니

여래가 대승심을 일으킨 자들을 위해 설한 것이며

무상의 깨달음을 발원한 자들을 위해 설한 까닭이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능히 이 경을 받아지녀

독송하고 남을 위해 널리 알려준다면

여래가 이런 사람을 바로 알고 지켜볼 것이나니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공덕을 성취하게 되리라.

 

이런 사람은 결국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공유하게 될 것이니라.

 

왜 그런가 하면 수보리야,

저 혼자만 득도하려는 좁은 틀거지의 법만 추구하는 사람은

저도 모르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으로 보게 되어

이 경을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소중히 지니면서

틈틈이 독송하거나 남을 위해 일러줄 수가 없느니라.

 

수보리야,

어느 곳에서나 이 경이 있으면

일체 세상의 천신과 인간, 그리고 아수라를 비롯한 모든 중생이

마땅히 받들어야 하나니

이 경이 있는 곳이 불이 깃든 탑임을 분명히 알지라.

모두가 마땅히 공경하고 예배하며 그 주위를 돌며 꽃과 향을 뿌릴지어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을 받아 간직하고 독송하되

만일 남으로부터 멸시를 당한다면

이는 전생의 죄업으로 인해 악도에 떨어질 것이

지금 받는 멸시로 인해 전생의 죄업이 모두 씻기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을 의미하니라.

 

수보리야,

내가 한량없는 전세의 과거사를 돌아보건대

연등불께서 나시기 전에도 무수히 많은 부처님들이 계셨고

이분들을 일일이 공양하고 받들어 섬김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느니라.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다음 말세에 능히 이 경을 받아 간직하고 독송하며 정진한다면

공덕은 내가 무수히 많은 부처님들을 공양한 공덕보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니라.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녀인이

다음 말세에 이 경을 받아 간직하고 독송하는 공덕에 대해

내가 사실대로 다 말한다면

아마도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어지러워져서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니라.

 

수보리야,

마땅히 알지라.

이 경은 뜻도 불가사의하지만

그 과보 또한 불가사의한 것이니라

 

 

-解義-

 

흔히 처음 가는 길을 가기 위해서는

지도나 나침반 같은 것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경에서는 중생들이 전혀 모르는 차원인 피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그 지침을 내려주고 있다.

한마디로 깨달음의 안내서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경의 공통된 특징을 보면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스스로 가게끔 인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 옆에서 가르쳐 줌으로써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손을 잡아끌거나 등을 떠밀어 앞으로 나아가게끔 할 수는 없다.

깨달음의 세계란 그 구조상 그런 식으로 될 수 없고

그래서 자력구도가 담기지 않으면

아무리 내용이 훌륭해도 경이 아닌 서나 적, 책의 일종에 불과하게 된다.

 

어떤 경우에도 경이 성립하려면

의식의 차원을 높이는 방향으로 일관되게 흘러야 하며

결국에는 무상의 깨달음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 인도해 주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금강경은

경이 갖춰야 할 바를 완벽히 구비해 놓았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의미를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금강경은

초월을 넘어 해탈을 가르치고 있다.

초월은 불법에 의지해서 무소유의 경지로 나아가지만

해탈은 그 불법과 이룬 경지마저 버림으로써 진정한 대자유를 증득하게 한다.

 

금강경은 불교의 다른 경에 비해 해탈에 치중한 면이 강하며

그렇기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가장 잘 일러주고 있다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 경을 지니고 독송하거나 남을 위해 알려주는 공덕은

가히 헤아릴 수 없이 클 것이다.

 

 

원론적인 얘기는 이쯤하고

실제로 금강경을 전하면 공덕이 태산처럼 클까?

 

첫 번째, 금강경엔 진리나 법 같은 것이 아예 없다.

애초에 그런 것은 언어로 담을 수 없다.

그래서 금강경에 등장하는 세존은 금강경을 자신의 법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

 

두 번째, 금강경이 전법의 수단이라 해도

이것이 어떻게 수단이 되는지 아는 사람이 드물다.

다시 말해 사용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얘기이다.

 

세 번째, 용케 세존의 뜻을 헤아려 금강경을 수단으로 써서 법을 전해도

이것을 듣고 이해하고 숙지할 사람들이 거의 없다.

 

결론적으로 앞의 세 가지 장애를 딛고 금강경을 전해도

그것과 깨달음과는 관련이 거의 없게 된다.

불교를 널리 알리는 공덕은 쌓겠지만

그 공덕이 깨달음에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장님들의 세상에선

열심히 코끼리 그림을 전해도 소득이 없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코끼리 그림은 코끼리가 아니며

이런 의미 없는 그림을 아무리 전해도

시력의 한계에 걸리고 만다.

 

그렇듯 깨달음의 그림만 휑하니 그려진 금강경은

불교 조직엔 도움이 되지만

깨달음까지 공유되는 건 아니다.

 

오늘날 불교가 세계 4대 종교로 비약되어 있음에도

覺者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장님의 세계에선 누가 눈을 떴는지 알 수 없다.

그저 훌륭한 인품이나 대자대비한 보살행, 막힘 없는 설법, 용맹정진의 수행... 등을

개인의 잣대로 삼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존경의 대상이 될지언정 깨달음의 척도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눈을 떠서 코끼리를 볼 수 있을까?

장님에게 시급한 것은

코끼리 그림보다 자신의 눈을 뜨는 것이다.

 

완벽한 길이 있다면

지금처럼 모호한 경전들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다만 완벽하진 않지만 지금 수행자들이 가는 길보다 확실히 나은 길이 있다.

그건 수행에 앞서 형이하의 학문을 열심히 익히는 것이다.

 

형이상의 불도를 닦는 수행자들의 입장에선

그 길이 심히 낮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의 특을 갖추기 위해선

세속의 학문이 필요하다.

 

네안데르탈인의 사고 구조에선 절대로 높은 지혜를 증득할 수 없다.

하지만 호모사피엔스는

사고의 폭과 깊이가 놀랄 만큼 증대했고

이런 이성의 힘은 깨달음을 움켜쥘 가능성을 높였다.

 

호모사피엔스의 지혜

그것은 인류가 수만 년에 걸쳐 쌓아온 지식의 축적에 있다.

특히 수학과 동서철학, 물리나 화학 같은 분야에 농축되어 있다.

 

따라서 전공자 만큼은 아니어도

전공자와 대화를 나눌 정도의 지식은 필요하다.

 

동양철학에서 형이상을 보는 눈을 키우고

서양철학에서 합리적 이성을 키운다.

그리고 수학에서 논리적 사고의 힘을 얻고

현대물리학에서 보여주는 존재의 실체에 한층 다가선다면

당신은 현생 인류의 맨 앞줄에 서게 된다.

 

이렇게 사고의 힘이 커진 사람들이

깨달음과 승부를 벌일 수 있는 힘을 갖춘 진정한 수행자들이다.

 

따라서 경전 공부도 좋지만

잠재된 네안데르탈인의 획일적 사고를 벗기 위해

현대 학문을 닦을 필요가 있다.

 

세존이 살았던 25백 년 전이라면

경전이나 읽고 가부좌나 트는 것이 상책일 수 있지만

지금은 엄연히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

 

덧셈 뺄셈을 모르고 수학을 할 수 없는 것처럼

현대 학문을 모르고 수행을 한다는 건 참으로 우매한 일이다.

 

사실 이름깨나 있는 스님들이 경전을 해설하는 것을 보면

유치원생이 대학원 논문을 읽는 것처럼 어설프기 짝이 없다.

기본적인 사고 구조조차 바로잡히지 않은 탓이다.

 

예외는 있겠지만

평균적으로 스님들의 영력이

대학교수들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무튼 수행의 열쇠는

사고 구조의 혁신에 있다.

사고의 힘,

그것을 키우기 위해서는

경전에만 머물지 말고

세상의 문명과도 심도 있는 교류를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