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금강경 제19장 중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Buddhastudy 2022. 12. 8. 19:52

 

 

 

衆生無存分

-중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수보리야,

여래는 자신이 설한 법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여기지 말지라.

이런 생각 자체를 하지 말지니,

왜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이 여래가 설한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곧 내가 설한 바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며

또한 여래를 욕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법을 설한다는 것은 법이 없기에 가히 설할 수 있고

그렇기에 이름을 설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니라.”

 

이때 지혜로운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어떤 중생이 미래의 세상에서

이런 어렵고도 심오한 법문을 듣고 믿는 마음이 생기겠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저들은 중생이 아니고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니라.

왜 그런가 하면 수보리야,

중생 중생 말들을 하는데

여래가 말하나니 그들은 중생아 이니라 그 이름이 중생인 것이니라

 

 

-解義-

부처와 중생은 외계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오감의 구조에 있어서 동일하다.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정보에 초점을 맞추고 또한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이다.

신경과학에서는 전자를 지각, 후자를 인식이라 한다.

 

부처는 지각에 자유로워 시공이 넓고

외계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공으로 인식한다.

반면에 중생은 지각이 고정되어 시공이 좁고

외계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유로 인식한다.

 

중생은 아집으로 걸러진 편협한 정보를 유로 해석하기에

만물과 단절되어 파편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생로병사의 수레바퀴에 매이게 된다.

 

하지만 부처는 순수한 공명에서 들어오는 개방된 정보를 공으로 해석하기에

만물과 일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그래서 나고 죽음이 없으면서 무한한 변화를 즐긴다.

창조를 이루며 영원히 존재하니

이런 부처의 삶을 일컬어 열반이라 한다.

 

이처럼 지각과 인식의 차이에 의해 부처와 중생은 나뉘고

이런 이유로 부처의 눈엔 부처만 보이고, 중생의 눈엔 중생만 보인다는 말도 나오게 된다.

 

실제로 깨달은 자의 눈엔

중생이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제도할 대상이 없고 제도하기 위해 쓰는 법이란 것도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공이면서 열반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부처처럼 지각하고 인식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성불의 지름길을 묻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세상에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것만큼 쉬운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억지로 비교하자면 눈커풀을 한 번 내렸다 올리는 정도랄까.

 

길을 걷다가 한쪽 모퉁이에 들꽃이 흐드리지게 피어 있는 광경을 떠올려 보자.

고운 빛깔과 그윽한 향기에 취애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집중했다.

중생이란 바로 이런 상태이다.

부처가 촌각의 시간 동안 분별에 빠져 자신의 존재를 잊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시 부처로 돌아가려 애쓰지 않아도

감상의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원모습을 되찾게 된다.

얼마 뒤 나그네가 들꽃에 흥미를 잃고 가던 길을 계속 가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 촌각의 시간이 우주의 시간대로 보면 너무 길다.

그래서 분별에서 미리 빠져나오려는 움직임이 생겨났고

그 중 극히 일부가 성공하여 부처가 되었다.

 

나그네의 원 모습이 된 자는

다른 나그네들이 들꽃에 심취해 있는 광경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가질까?

 

부처들이 잠깐 동안 분별을 감상하고 있는 모습인데

이런 걸 가지고 중생구제니 대오각성이니 정혜쌍수니.. 하며

그들의 손을 잡아 끌 것인가?

 

부처의 눈엔 중생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잠시 분별에 집중하고 있는 부처들만 있을 뿐이다.

그들 가운데 적잖은 수가 분별에 너무 빠지다 보니

스스로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다.

 

적당히 감상하다 시선을 돌리면 되는데,

그 방법을 깜빡 읹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분별에서 그만 머무르라며 잔소리 몇 마디 하게 되는데

그것이 소위 말하는 불법이다.

 

그래서 불법의 실체가 딱히 뭐라고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공식에 의한 난해함을 잔뜩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제 그만 정신 차리라는 딱 한마디 한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세상에 불법만큼 쉬운 건 없다.

정신을 차려 원래의 모습, 부처로 돌아오면 되니 말이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그것이 너무 쉽다 보니 정신 차리는 자들이 거의 없게 된 것이다.

 

가령, ‘나는 누구인가?’ 화두 하나만 풀어도 정신이 차려진다.

부처의 본래 모습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쉬운 화두를 푸는 이는 거의 없다.

자고이래로 깨달았다는 숱한 고승들 역시

그 실체를 파헤쳐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상당수다.

 

한 소식 들었다는 수행자들의 말을 보면

답이 없다’, ‘무이다’, ‘문제가 잘 못됐다’,

나는 부처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원하다.’

지금 나라고 생각하는 건 가아이다, 진아는 공이며 그래서 부처이다.’

나는 일종의 정보덩어리다. 정보가 흩어지면 진짜 나가 남는다

그것은 삼라만상의 바탕이며 부처의 본래 모습니다등등

짧고 긴 수많은 답을 낸다.

하지만 이런 식의 답을 백날 한들, 깨달음이란 없다.

분별의 조합을 통한 답은 설령 그것이 정답에 가까워도 아무런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세존은 이미 중생=부처라는 답을 내렸다.

따라서 나는 누구인가의 화두의 답은 그것을 설명하는 것들이 된다.

하지만 들꽃을 감상하고 있는 나그네가

수만 번 나는 부처이다를 외친들

그게 깨달음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분별 속에서 분별을 가지고 풀어서는 화두의 답을 얻을 수 없다.

중요한 건 그가 들꽃에서 고개를 돌려 가던 길을 가는 것이다.

 

깨닫고 나면 고개를 돌려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만큼 쉬운 건 없다.

이것을 못 하는 이유는

분별의 문제를 분별로써 해결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수행자의 발목을 잡는 가장 커다란 요인이며

그래서 세존이 본경을 통해

모든 분별을 걷어낼 것을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데 분별을 하지 않는 것도 분별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가 두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