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2)

[즉문즉설] 제190회 과잉행동증후군의 아들

Buddhastudy 2012. 12. 7. 03:53
출처 YouTube

 

. 긴 질문을 했는데 오히려 짧은 대답을 해도 되겠네요. 첫째 질문은 아이에게 약물 복용을 하면서 엄마가 좀 따뜻하게 보살피는 그런 교육을 하면 좋겠다. 지금 약물 복용을 안 해서 증상이 자꾸 나타나서 나타나게 되면 그것이 나중에 습관화돼버린다. 이런 얘기요. 처음에는 육체로부터 온 거지만은 그것이 결국은 정신적으로 습관화 돼 버리면 나중에 약물 복용해도 안 될 수가 있고, 또 약을 투여하더라도 많이 해야 되고 이런 문제가 생기니까. 그냥 우리가 매일 물 먹어야 살잖아. 그죠?

 

그런 것처럼 매일 약물을 조금 먹으면 되지. 그걸 크게 신경 쓸 거 없어요. 그러니까 항상 지참해서 아이에게 어릴 때부터 일정하게 먹고 다니면 된다. 상담을 하더라도 그게 상담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신체적인 호르몬 분비나 이런 거에서 오는 거기 때문에 약물을 복용하면서 일단 일정한 시간을 보내고. 그러면서 그 사이에 약물만 복용하고 있으면 안 되죠. 약물만 복용하고 있으면 약물기운 있을 때는 괜찮은데 떨어지면 또 발병하고 이러니까.

 

약물을 복용하고 있는 동안에 이제 아이를 편안하도록 자꾸 상담도 하고 엄마가 따뜻하게 보살펴야 되는데. 유전적인 그런 것도 있을 수 있겠지만 중요한 건 애기 가졌을 때 부부간에는 좋았어요? 갈등이 많았어요? 특별히 갈등이 없었어요? 그렇다면 육체적인 증상에서 시작됐을 수가 있으니까. 그래도 집에서 겉으로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남편에 대해서 아무런 불만이 없어야 돼.

 

마음에서부터. 지금 그런 상태에요? 그럼 약물 복용을 지속을 하면서 꾸준히 그렇게 기도를 하세요. 그 남편에 대해서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감사합니다. 애기가 저만하기만 해도 다행입니다. 내가 지은 인연의 과보로 볼 때는 더 큰 고통을 받아야 되는데. 그래도 저만한 고통을 받아서 천만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먼저 부처님께 감사를 드리고. 이것을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생겼느냐? 이렇게 받아들일 게 아니라. 내가 지은 인연의 과보로 볼 때 이보다 더 큰 고통을 받아야 되는데. 그래도 이만하기 다행이다.

 

그 뭐 아이에게 약물 조금 복용해서 우선 괜찮으니까 천만다행 아니에요. 그죠? 그러니까 이렇게 먼저 감사 기도를 해야 돼요. 불만을 가지면 안 된다. 그리고 두 번째 남편한테 대해서는 당신은 나의 스승입니다. 당신 말이라면 저는 뭐든지 하고 따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이지만은 남편을 스승처럼 생각하고 모시는 그런 마음으로 지내야 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아이를 진료하고 이것은 의사의 처방을 당분간 따르세요.

 

그리고 두 번째 천도재 지내는 문제인데, 그것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를 스님은 여기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은 믿음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믿는 자에게는 효과가 있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효과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이런 종교적이거나 신앙적인 문제는 여기서 그것을 옳다, 그르다, 효과가 있다, 효과가 없다, 이렇게 말할 수가 없다. 이 말이오. 쉽게 얘기하면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 그러니까 아들이 물에 빠져 죽든 가족이 물에 빠져 죽으면 남은 사람들은 가슴 아프잖습니까 그죠?

 

그랬을 때 거기에서 무당이 굿을 하고, 무슨 활대 같은 걸 갖고 물에다가 젖으면서 머리카락을 건져내서 이렇게 좋은데 가라고 굿을 하면 그 부모에게 위안이 될까요? 안 될까요? 위안이 되겠죠. 그러니까 그것이 실제로 영혼이 거기서 건져지느냐? 안 건져지느냐? 를 떠나서 그 사람에게 그게 위안이 된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는 효과가 있는 거요. 믿으면 효과가 있고 믿지 않으면 효과가 없는 거다. 이것은 일종의 그냥 객관적으로 말하면 심리치료 효과가 있을 수가 있다. 이 말이오.

 

그런데 자식한테 좋다는 얘기를 듣고 그래도 내가 안 하게 되면 내 마음이 뭐하다? 찝찝하죠. 그래서 더 그런가? 자꾸 이런 생각이 들잖아. 그죠? 그러면 제를 지내고 나서 본인이 얘기한대로 마음의 위안이 됐다고 하니까. 다행이다. 이 말이오. 그런데 이것을 필요가 있느니? 또는 거기에 영험이 있느니? 내가 이렇게 말할 수가 없다. ? 그렇게 말할 수가 없느냐? 그것은 믿음에 대한 영역이고 종교에 대한 영역입니다. 그럼 스님 여기서 불교라는 종교에 대해서 얘기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불교에 대한 얘기를 한다면 그것은 진리로서의 불교에 대한 얘기를 하는 거요. 이것은 종교를 초월한 진리로서의 부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어떻게 지혜로서 우리가 이 고통의 바다를 건널 것인가 라는 것을 얘기하지. 어떻게 하면 좋다더라. 어떻게 하면 좋다더라 라고 하는 그런 믿음을 갖고 얘기하는 게 아니다. 이 말이오. 그렇게 믿고 행함으로 해서 위안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말이오. 고통에 처했을 때. 그런데 내가 그 사람들 대놓고 그거 믿어봐야 헛거다.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말할 게 아니다.

 

그렇다고 그래. 믿어라. 그러면 좋은 일이 생긴다. 하나님이 널 돌봐 주실 거다. 이렇게도 말할 수가 없다. 이 말이오. 그거는 그것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수는 있지마는,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어떤 것이 진리냐? 하는 문제를 논하는 자리이고 진리에 의해서 어떻게 우리가 해탈할 거냐 하는 것을 논하는 자리이지. 그런 믿음의 문제, 신이 있느냐? 없느냐? 윤회를 하느냐? 안 하느냐 라든지 천도재를 지내면 효과가 있느냐? 없느냐? 를 논하는 자리는 아니다.

 

그러나 다만 여기서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게 늘 가슴에 걸려있다면 이미 나는 거기에 경도된 거요. 그럴 때는 천도재를 지내면 되지. 여러분들은 지내면 좋으냐? 안 좋으냐? 나한테 물을 때 여러분들 관심은 뭐요? 돈 드는 것 때문에 그러지. 그런데 아이가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해도 돈 내요? 안내요? 돈 내지. 돈 드는 건 어디를 가도 돈이 들어요. 굿을 해도 돈이 들고, 절에 다녀도 보시를 하면 좋다 하면 돈 들어요? 안 들어요? 들고. 천도재 지내라 하면 또 돈이 들고 교회 가도 또 십이조를 내라. 뭘 내라. 해서 돈이 들어요.

 

그러니까 내 자식에게 좋은 일이다. 할 때 내가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은 마음이 있다 하는 것은 믿음이에요. 그게 그렇게 해서 된다. 안된다고 스님이 얘기할 수 있는 거는 아니에요. 그것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고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래서 헌법에 뭐라고 돼 있다? 믿음은 자유다. 이렇게 돼 있죠. 그래서 내가 헌법사항을 내가 터치할 수가 없다. 그렇게 믿으면 그렇게 하면 되고, 그렇게 안 믿으면 그렇게 안 하면 되지. 그런 문제를 스님께 와서 물으면 스님은 당신 믿음대로 하십시오. 좋을 대로 하십시오. 이렇게 말한다. 이거야.

 

왜냐하면, 믿음은 옳고 그름을 나눌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진위를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 말이오. 그래서 한번 해봤으면 도움이 되고 위안이 되면 어때요? 골프치고도 돈 내요? 안내요? 술 먹고도 돈 내요? 안내요? 괴로울 때 한 잔 먹고 자면 도움이 되면 다음에 또 술 먹게 되죠. 그런데 천도재를 지내니까 마음의 위안이 된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니까 어때요? 또 뭔가 덜됐다 그런다. 그래서 또 주사한 대를 더 맞으면 어때요? 또 당분간 가겠죠.

 

그러면 그거를 된다. 안 된다 이래 보지 말고 자기에게 어떤 이익이 있느냐? 자기가 판단하면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지내고 싶으면 지내는 거고. 그런데 그것을 지내면 좋다 하고 스님이 말할 때는 그 스님은 그것을 믿어요? 안 믿어요? 믿으니까 얘기하겠죠. 그러니까 그의 믿음이 나의 믿음이 될 수도 있고. 그의 믿음은 그의 믿음일 뿐이고 나의 믿음은 그의 믿음과 다를 수도 있는 문제다. 이 말이오.

 

그러니 오늘 제가 이 자리에서 대답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인이 하느님께 기도를 하면 영험이 있습니까? 라는 물음과 내가 동일한 입장에서 대답을 해야지. 불교의 문제니까 그냥 무조건 된다. 안 된다. 이렇게 얘기할 수가 없는 거다. 그래서 두 번째 질문은 마음의 위안이 된다면 하시고 그 위안이 되는 데는 반드시 대가가 지불이 돼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