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금강경 제21장 부처는 어떤 相도 없다!

Buddhastudy 2022. 12. 21. 20:00

 

 

 

拂無諸相分

-부처는 어떤 상도 없다-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한가?

혹시라도 여래가 중생을 마땅히 제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일으킨다고 말하지 말지라.

 

수보리야,

이런 생각 자체를 하지 말지니

왜 그런가 하면 사실상 중생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만일 여래가 제도한 중생이 있다면

여래에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는 꼴이 될 것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가 있다는 식으로 설해도

사실은 나가 있는 것이 아니니라.

그저 범부들이 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지금 내가 범부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상 범부가 아니며 그 이름이 범부일 뿐이니라.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한가?

32상을 살핌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그러하나이다,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나이다.”

 

수보리야,

만일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도 32상이 있으니 여래일 것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하였다.

세존시이여,

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의 뜻을 다시 헤아려 보건대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겠나이다.”

 

이때 부처님께서 게송을 읊어 말씀하셨다,

형상으로써 나를 보고

소리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런 사람은 그릇된 길을 가고 있나니

어찌 여래를 볼 수 있으리오

 

 

-解義-

 

꿈꾸는 것과 깨어 있는 것이 똑같지는 않지만

그 구조는 매우 유사하다.

꿈은 기존의 재료에 상상을 더해 이미지를 그리는 것에 비해

현실은 좀 더 구체적인 재료에

기존의 정보와 상상을 더해 이미지를 만든다는 차이가 있다.

 

뇌는 쉴 때면 꿈을 꾸고

깨어나서는 보다 구체적인 현실이라는 환유를 가공한다.

따라서 이미지를 만드는 재료가 싱싱한지

아니면 좀 묵었는지의 차이에 의해 현실과 꿈은 나뉜다.

이렇게 보면 현실과 꿈은 별개가 아니다.

 

삼라만상 모든 것은 정보로 가득차 있다.

뇌는 그 정보를 가지고 현실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고

스스로 유(있는 것)라 여기게 된다.

유로 보는 순간 우리의 의식은 분별로 가득 차고

너와 나로 구분하면서 피조물인 중생이 된다.

 

이처럼 중생이란 뇌가 꾸며낸 것을 현실로 믿게 되면서 생겨난다.

그래서 현실이 실재가 아닌 꿈이라는 사실을 직시할 때

여기서 깨어나려는 모종의 움직임이 싹튼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수행이다.

 

깨어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뇌가 만들어낸 가공의 현실에 도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서 정관법으로 알려진 위빠사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꿈 깨는 수행을 이어 나가다 보면

금강경에서 말하듯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으면서도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무슨말인간 하면

부처는 실존과 허상에 대한 분별조차 없다는 뜻이다.

 

부처는 상대계와 절대계의 구분마저 초월하여

그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는 경지에 머무른다.

그래서 부처는 어떤 때는 중생이고 어떤 때는 부처가 된다.

 

중생과 부처에 대한 분별이 전혀 없기에 해탈이라 한다.

이처럼 일체의 분별이 없는 부처이기에 제도할 중생이 없고

그들을 제도할 법도 없다.

그러니 얻을 깨달음이란 것도 없다.

 

그렇다면 왜 세존은 수보리를 비롯하여 수 많은 비구들을 모아놓고

법을 설하고 있는가?

그 자체로 법에 대한 인식도 있고

중생 제도에 대한 원력도 지니고 있는 게 아닌가?

 

세존은 누차에 걸쳐 상에도 비상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

세존이 법을 설하고 중생을 제도해도

그의 의식에 머무름이 없으면

법을 설한 것도 중생을 제도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세존이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다.

 

세존은 머무름 없는 행,

다시 말해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허공에 드리우며

존재 의미를 만끽하고 있다.

그래서 해탈이면서도 열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