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역사, 세계사

[5분상식 세계사] 세인트루시아 역사 10분 완벽정리

Buddhastudy 2023. 1. 26. 17:53

 

 

1. 소개

세인트루시아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여성  기독교 순교자 세인트 루시에서 이름을 딴 국가로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 동부에 위치한 섬나라이며

수도는 캐스트리스입니다.

 

세인트루시아의 국기는 1967

영국령 지배 하의 자치 정부 시절 제정되었으나

1979년 독립 때, 한 차례 수정하였고

2002년 바탕을 파랑에서 하늘색으로 바꾸었습니다.

 

하늘색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함께

세인트루시아가 카리브해와 대서양에 있는 섬나라임을 의미하며

검정과 하양은 국민의 대부분인

흑인과 백인의 협력과 단일성을 나타냅니다.

노랑은 카리브지방의 태양과 나라의 발전을 뜻하며

검정과 노랑의 2개 삼각형은

세인트루시아의 상징인 피통(Pitons)의 두 봉우리를 나타냅니다.

 

세인트루시아는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 소앤틸리스 제도에 있는 섬나라로

트리니다드토바고 북쪽 카리브해와 대서양 사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세인트루시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성의 이름을 딴 국가로

섬은 남북으로 긴 달걀형이며

북쪽에 마르티니크섬, 남쪽에 세인트빈센트 섬이 있습니다.

 

세인트루시아의 국토 면적은 약 620km²

이는 서울특별시와 비슷한 정도의 크기입니다.

2021년 기준 약 18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이는, 인구수 세계 180위권 정도로

경기도 안성시 인구수와 비슷한 수치입니다.

세인트루시아의 1년 총 GDP

2021년 기준, 18억 달러로 세계 169위이지만

1인당 GDP는 약 9800달러로 세계 65위권 정도의 수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세인트루시아의 공용어는 영어이며

종족구성은 흑인 약 80%

그 외 혼혈, 인도인 등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인트루시아의 종교는

70%의 인구가 로마가톨릭교를 믿고 있으며

그 외 개신교 등의 종교를 믿고 있습니다.

 

 

 

2-1. 역사

세인트루시아에는 기원전 1000~ 500년 사이에

키보니(Ciboney) 사람들이 살았다고 추정하고 있으나

증거가 그리 많지는 않다고 합니다.

 

고고학 연구를 진행하던 중

아라와크(Arawak) 도자기 표본이 발견되면서

이곳의 초기 거주민들은

서기 200~400년경 남아메리카 북부에서 건너온 아라와크 족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섬에 거주한 최초의 주민들은

많은 수의 이구아나들 때문에

'이구아나의 땅'을 의미하는 라우아날로 (Iouanalao) 섬으로 부른 적도 있습니다.

 

서기 800, 호전적인 성향의 카리브족이

기존의 아라와크 족을 공격하여,

남성들은 죽이고 여성들은 카리브족에 동화시키면서 섬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들은 섬을 헤와나라우 (Hewanarau)라고 불렀고

후에는, 이구아나가 많이 발견되는 곳이라는 의미의

헤와노라 이우나라오(Hewanorra Ioüanalao) 라고 불렀습니다.

 

이때, 불려진 헤와노라 라는 이름은

현대 시대 세인트루시아 비외포트 (Vieux Fort)에 있는

헤와노라 국제공항 이름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카리브족은 왕과 주술사가 세습하는

고대 사회 기준 복잡한 사회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으며

전투시에는 100명 이상을 태울 수 있는 카누가 있었습니다.

 

16세기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유럽에서 출발한 여러 국가의 항해가들이

세인트루시아 섬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er Columbus)

마르티니크 (Martinique)에 상륙한 이후

1502년 네 번째 항해 중에 이 섬을 봤을 수도 있지만

그의 일지에는 이 섬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에스파냐의 지도 제작사이자 항해가인 구안데라 코사(Juan de la Cosa)

1500. 자신의 지도에서 이 섬을 엘 팔콘’ (El Falcon)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후, 1520년에 만들어진 바티칸의 지구본에는

이 섬이 산타 루시아 (Sancta Lucia)로 표기되어 있으며

1529년 스페인 지도에서는 산타 루지아(S. Luzia)로 표기되었습니다.

 

17세기 초, 영국의 올리프 블로썸 (Oliphe Blossome)이라는 선박이

가이아나로 가는 도중에 사고로 난파되었습니다.

67명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처음에는

카리브(Carib) 추장 안토니 (Anthony)의 환영을 받으면서

세인트루시아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카리브족의 또 다른 세력인

아우그라우마르트(Augraumart)의 공격에 휘말리면서

영국인은 19명만 살아남아, 섬에서 겨우 탈출하게 됩니다.

 

1626, 프랑스의 세인트 크리스토퍼 회사(Compagnie de Saint-Christoph)

루이 13세의 수석 장관 리슐리외 추기경으로부터

소앤틸리스 제도에 대한 식민지화 활동을 승인받았습니다.

 

이를 두고, 다음 해에 권위적 통치로 영국 혁명을 촉발했던

영국 스튜어트 왕가의 찰스 1세 또한

세인트루시아의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2-2. 역사(영국과 프랑스 식민 시대)

1635, 프랑스는 세인트루시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펼쳤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1639년에는 영국이 정착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갑니다.

 

프랑스와 영국의 세인트루시아 식민지화 시도가

몇 번의 실패를 거치는 동안

마르티니크의 총독이 된 프랑스의 파르케(du Parquet)

영국에서 세인트루시아를 포기했다고 여기며

프랑스가 차지할 수 있는 계획을 세워나갔습니다.

 

1650, 그는 루이 드 케렝고앙, 시외 드 루셀랑 등의 프랑스인을 보내

오늘날의 카스트리 근처에 있는

리비에르 뒤 카레나주 입구에 요새를 건설했습니다.

 

프랑스는 주변 지역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세인트루시아 일대를 점령해갔지만

1663, 카리브족은 세인트루시아를

영국 카리브해 총독 프란시스 위로우비에게 매각했습니다.

하지만, 영국인이 통치하려던 세인트루시아에서

질병이 나돌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고

또다시, 프랑스군이 세인트루시아를 점령하면서

계속해서 영국과 프랑스의 세인트루시아를 차지하기 위한 대립 양상이 이어졌습니다.

 

한편, 17세기~18세기까지 대서양을 비롯한 제해권을 두고

네덜란드 공화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영란전쟁이 한창이었습니다.

 

2차 영란전쟁에서 초기에는 잉글랜드 해군이 우세하였으나

프랑스가 네덜란드와 연합하면서 전황은 뒤집혀졌고

영국에서는 런던 대화재와 흑사병이라는 조건이 겹치면서

네덜란드 프랑스 연합군에게 영토의 지분을 넘겨주게 됩니다.

 

세인트루시아는 1667년에 맺어진

브레다 조약 (The Treaty of Breda)으로 인해

프랑스의 손에 넘어가게 됩니다.

 

10여 년이 지나 영국은 세인트루시아를 급습하였지만

프랑스 측은 이를 막아내었고

마르티니크 관리하에 세인트루시아를 프랑스 식민지로 정식 편입시켰습니다.

 

1700년대에 접어들어 세인트루시아는

설탕 산업을 통해 번영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카리브해에서 해적과 타국의 선박을 관찰하기에

이상적인 입지로서 더욱 관심을 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 에스파냐, 영국, 프랑스는

여전히 세인트루시아를 두고

서로가 차지하려 무력 충돌을 벌였는데

그중에서도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이 가장 격렬했습니다.

 

1730년대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세인트루시아 섬의 거주자는 463명으로

이 중 125명이 백인, 175명의 노예, 나머지는 자유 흑인 혼혈인이었습니다.

 

1745년까지 프랑스가 섬을 차지하는 동안

인구는 9배 정도 증가하였는데

1700년대 중반의 섬의 인구는

2,500여 명의 노예를 포함하여 총 3,500명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중, 18세기 중반의 세계대전이라 불리는7년 전쟁이

럽과 전 세계 각국에서 벌어졌습니다.

7년 전쟁 과정에서, 다수의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국력을 크게 소모하였고

이때, 영국은 잠시 세인트루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게 됩니다.

 

 

2-3. 역사(프랑스 혁명과 세인트루시아)

1763. 프랑스 파리에서는 7년 전쟁에 대한 결과로

영국이 프랑스로부터 우위를 차지하는 강화조약인

파리 조약이 체결됩니다.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서 소유하던 캐나다 등을 제외한

미시시피강 우안의 땅 전체를 포기하였고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와 서아프리카 고래섬 등만 차지함으로써

전 유럽적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세인트루시아도 영국으로부터 프랑스에게 반환되었고

1763년 이후, 세인트빈센트와 그레나다에서 세인트루시아로

다수의 프랑스인들이 이주해갔습니다.

세인트루시아로 이주해온 프랑스인들은

면화와 사탕수수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을 만들었으며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노예들로 노동력을 확보했습니다.

 

1770년대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 혁명을 지지하였고

이 때문에 영국은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세인트루시아를 사이에 둔 영국과 프랑스의 전투는

프랑스 혁명 기간에도 간헐적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카리브해 식민지의 설탕 생산 기지에서 창출되는 수익이

전쟁을 지속하는데 필요한 자금원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789, 기존 유럽 전체의 왕권과 귀족 신분제를

크게 흔들었던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면서

이에 영향을 받은 프랑스령 세인트루시아 주지사는

1794년 세인트루시아의 노예제를 폐지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설탕의 안정적 생산을 원했던

영국인 지주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또다시, 세인트루시아를 둘러싸고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은 이어졌습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혁명 이후 1799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종신통령에 취임하면서 프랑스를 차지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는 등

여러 차례의 승리를 거둔 후

일시적인 평화 조약인 아미앵 조약을 맺었습니다.

 

아미앵 조약을 통해 세인트루시아는

다시, 프랑스령으로 회복되었으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노예 제도를 복원시켰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유럽을 넘어

아메리카까지 신경을 쓸 여력은 없었고

1803년 영국의 사무엘 후드 (Samuel Hood)제독은

프랑스 총독 앙투안 노게스 (Antoine Noguès)에게 승리를 거두며

세인트루시아를 차지하였습니다.

 

1814, 세인트루시아는 공식적으로 양도되었는데

세인트루시아를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의 싸움은

1674년부터 1814년까지 여러 차례 반복되었습니다.

 

횟수로는 프랑스가 6번의 지배, 영국이 4번의 지배

양국 합의하에 중립 지역으로 결정된 적이 2번 있었습니다.

 

 

2-4. 역사(세인트루시아의 독립)

1838년 세인트루시아는 바베이도스에 본부를 둔

영국 윈드워드 (Windward) 제도 행정부에 편입되어

1885년까지 영국의 직할 식민지로 통치를 받았습니다.

 

행정권은 영국 여왕이 가지고 있었으며

바베이도스에 주재하는 영국 총독이

다른 윈드워드 제도의 국가들과 함께 세인트루시아를 관할하였습니다.

 

세인트루시아 내에서는 행정 및 입법 위원회가

지역 문제를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영국으로부터 점진적으로 자치권을 넘겨받았습니다.

 

1924년 헌법에서 세인트루시아 최초의

대표 정부 형태가 부여되었으며

이전에 지명된 의원들 중에서는 소수만이 선출되었습니다.

 

1958년에는 새로 만들어진 서인도 제도 연방 (West Indies Federation)에 가입했지만

연방 내의 편협한 민족주의, 연방정부의 결점, 대중 지지의 부족 등으로

1962년 서인도 제도 연방은 해산되었습니다.

 

이후, 세인트루시아는 1979년까지 영국의 연합국으로서

내부 자체에 대해서는 완전한 자치권을 가졌으나

대외 문제와 국방 책임은 영국에게 맡기는 형태의

연합주(associate state)가 되었습니다.

 

1975년부터 서인도 내의 연합 주들이 독립을 추진하였고

세인트루시아 역시 3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1979222일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됩니다.

 

독립 후 처음 치러진 선거에서는

좌파 성향의 세인트루시아 노동당(SLP)이 정권을 차지하여

사회주의 성향의 정책을 추진하며

쿠바와의 외교 관계를 확립하였습니다.

 

독립 전후의 세인트루시아의 주요 수출 작물은

설탕에서 바나나로 바뀌었는데

1980년 허리케인 앨런(Allen)으로 인해

바나나 산업에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는 정치적 불안정과 관광객 급감으로 연결되었고

민심은 보수 성향의 연합노동자당(UWP)으로 기울면서

1982년에는 연합 노동자당이 집권하게 됩니다.

 

1980년대의 세인트루시아는 외국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였고

농업 생산력을 회복시키며 관광객의 유입으로 인해

국가 경제가 성장하는 기간을 맞이하였습니다.

 

이후, ‘세인트루시아 노동당연합노동자당이 번갈아 집권하면서

여느 다른 국가들처럼 당파의 대립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인트루시아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국가 원수로 계속 인정하고 있으며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의 회원입니다.

 

또한, 카리브해 공동체 및 공동 시장(CARICOM),

동카리브 공동 시장(ECCM), 동부 카리브 국가 기구(OECS)를 통해

이웃 국가들과 계속해서 협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