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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인더스 문명 10분완벽정리

Buddhastudy 2023. 2. 9. 18:15

 

 

 

2009년 제작되어 2011년에 개봉된

아미르 칸주연의 세 얼간이라는 인도 영화가 있습니다.

 

세 명의 주인공은 각자 깊은 고민이 있는데요.

자신의 꿈보다는 집안 분위기에 따라 미래를 결정하거나

혹은 억압된 학교 규율로 인해, 자신의 장래 희망을 포기하는 등

영화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세 얼간이

이러한 고민을 재미있고 유쾌하게 풀어가면서

희망을 잃지 않고, 긍정적으로 해결해나가자는

주인공 란초의 명대사

알 이즈 웰로 용기를 주는 작품입니다.

 

세 얼간이뿐만 아니라, 발리우드라고도 불리는 인도영화는

이미 1990년대에 미국보다 2배 이상 개봉영화를 제작하고 있었을 만큼

점점 그 시장이 커지고 있는데요

오늘은 경제와 문화산업 성장이 한창인

인도의 명칭이 유래된 곳

인더스강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인류의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중에서

이전 영상에서는 이집트 문명을 다루었고

이번에는 인더스 문명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2500년 무렵에 형성되어

기원전 1500년 무렵까지 있었던 고대문명으로 발달된 계획도시였습니다.

 

인더스강의 원래 이름이 산스크리트어로 신두였다고 하는데요

신두가 페르시아 발음으로 힌두, 한자로는 인도라고 합니다.

영어로 인디아 라고 해서 인도인은 인디언이라고 하는데요.

 

잠깐.. 우리가 생각하는 인디언은

영화 라스트 모히칸이나 포카 혼타스에 나오는 인디언을 떠올리기 쉽잖아요?

이것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

그 땅을 인도라고 생각해서, 원주민을 보고서 인디언이라 부르게 되었던 겁니다.

 

그래서, 인도에 사는 사람은 인디언

신대륙의 인디언은 아메리칸 인디언이 되었죠.

 

또한, 인도인들의 80%가 힌두교를 믿고 있는데요

힌두교의 어원 또한 인더스강에서 유래했습니다.

 

인더스 문명은

인류 최초의 문명 중 하나였다고 해도

오랜 세월 동안 그 흔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가

1921년 영국의 존 마셜이라는 고고학자를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이 인더스 강 유역에서

도시 유적을 약 250여 개나 발견하게 됩니다.

 

넓은 땅에 걸쳐 발달한 수많은 도시 중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들은 하라파, 모헨조다로, 돌라비라로

전성기에 이 도시 인구는 각각 5만여 명이 살았다고 합니다.

 

지금 기준에서는 그리 많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중세 유럽 시대 때 가장 인구가 많았다는

베네치아와 파리가 15만 내외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더스 문명의 인구는 상당히 많았다고 할 수 있죠.

 

이들은 이집트 문명의 피라미드 같은 왕을 모시는 무덤을 짓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문명들보다 훨씬 깨끗하고 잘 정돈된 도시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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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또 잠깐!

인더스강이라 하면 현시대에는

인더스강이 파키스탄에 대부분 속해있는데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잠시 고대사에서 현대로 훌쩍 뛰어넘어가겠습니다.

 

현재의 인도와 파키스탄 그리고 방글라데시까지는

모두 같은 한 국가였습니다.

인도는 1947년 영국에게서 독립을 하게 되는데요.

기쁜 독립 시기를 맞이했지만

같은 국민 사이에는 갈등의 씨앗이 일어나게 됩니다.

인도국민회의와 이슬람 동맹이

각각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려고 힘 싸움을 했던 거죠.

 

인도라 하면 비폭력 저항운동의 간디가 떠오르잖아요?

당시, 간디는 이렇게 말합니다.

힌두교든 이슬람교든 뭣이 중헌디?”

 

그렇게, 종교 다툼보다

한 국가 안에서 조화롭게 같이 살아가자고 했지만

간디는 극단적 힌두교 광신도에게 암살을 당하게 됩니다.

 

결국 힌두교를 믿는 인도와

이슬람교를 믿는 파키스탄으로 나뉘게 되고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인더스강은

대부분 파키스탄 영지에 속해있습니다.

 

파키스탄 내부에서는 또다시 언어 문제로 다툼하다

결국, 서파키스탄은 파키스탄으로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가 되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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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다시 고대로 돌아가서

인더스 문명 중에 가장 유명한 도시

모헨조다로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모헨조다로가 성립된 연대로는 기원전 2300년경으로 추정해오다가

이후 더 오랜 유물을 발견하게 되면서

현재는 기원전 4000년경으로 추정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920년대부터 고고학 팀들은 발굴 및 연구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전체 유적의 10퍼센트 정도가 발굴되었고 하는데요.

모헨조다로의 유적은 서쪽 지역과 동쪽 지역으로 나뉘게 됩니다.

 

서쪽 지역에는 넓은 회랑과 회의장, 목욕탕과 곡물 창고 등

종교와 행정에 관련된 기관들이 있는 성곽 요새 지구라 할 수 있고

동쪽 지역에는 포장된 길을 따라 주거 단지가 모여 있는데

대부분의 집은 불에 구운 벽돌로 지어졌으며

우물, 폐수 시설도 갖추고 있는 시가 지구가 있었습니다.

 

성곽 요새에는 커다란 공중목욕탕이 존재했는데요

길이 10미터, 폭이 7미터에 달하는 공간이 있었으며

그 공간은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어

계단을 설치해 목욕탕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 목욕탕은 목욕이 주요 목적이었다기보다는

씻고 나와서는 제례를 행하는 장소로 쓰였다고 하는데요.

 

시가 지구에 모여 있는 집들의 크기는 집집마다 비슷한 크기로 지어져

주민들 사이에는 빈부격차가 그리 심하게 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자 면에서는 이집트 문명은 로제타석의 발견으로

상형문자와 그리스어가 같이 발견되면서

당시 글자 해독에 접근할 수 있었는데 반해

인더스강의 사람들도 글은 남겼지만

지금까지 해독이 불가능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현대 시대에서 알 수 있는 인더스 문명의 특징은

기원전 3,4천년 전에도 세련된 도시를 구축했다는 점

그중 모헨조다로와 하라파가 가장 유명했으며

같은 크기의 벽돌로 고층의 주택이 세워졌다는 것은

당시 이 구역은 현대 사회로 치자면

서울시 강남을 방불케 할 수 있었던 도시였던 거죠.

 

이렇게 번창한 구역에서

지금 시대와는 다소 차이가 있는 정부형태의 권력이 존재했겠지만

어떠한 권력이 있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도시의 관리는 당시 기준으로는 깨끗한 편이었는데

대부분의 가정에는 배수시설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중앙에서 관리하는 배수시설과 연결되어

집안에서 버리는 물과 쓰레기를 도시로부터 지하로 흐르는 하수도로 보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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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2500년 정도의 이야기인데

조금 전까지는 하라파와 모헨조다로의 하수도 시설에 관한 이야기를 해드렸죠.

 

이때부터 2500년은 지나야

로마 제국에서 하수도 시설이 발달되었지만

이는 고급주택인 도무스 한정이었는데 반해

인더스 문명은 대다수의 집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중세시대로 접어들며 하수도 기술이 잊히면서

서유럽은 18세기가 되도록 위생은 상당히 안 좋게 되는데요.

아예 창밖으로 똥과 오줌 내던지는 현상이 심화하기도 했습니다.

그 커다란 베르사이유 궁전에 화장실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사례라 할 수 있죠.

 

그런데, 같은 시대 오스만 제국에서는

고대 로마 제국의 기술을 계속 연마하여

하수도 이용으로 인해 위생 상태가 18세기 유럽보다 훨씬 나았으며

이로 인해 수명에 차이가 크게 났고

점차적으로 파리와 런던으로 깔리기 시작했던 겁니다.

 

모헨조다로에서 가장 큰 공중시설은 궁전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배수시설의 꽃이자 아까 잠시 언급했던 공중목욕탕이었는데요.

역사학자들은 이를 ‘Great Bath'

, ‘위대한 목욕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인도 문화가 중요시 여기는 의식 절차의 청결함을 위해

거대한 세례 공간으로 썼을 것으로 추정하죠.

또한, 인더스 문명에서의 특징을 꼽자면

도장이 제작됐는데,

이는 다른 문명과 무역이 이루어지면서 확인증 역할을 했습니다.

단지, 이름이 새겨진 도장이 아니라

무소, 코끼리, 나무 등의 여러 모양들이 존재했었죠.

 

이러한 확인증은 인더스강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메소포티마 지역에서 발견이 되면서

인더스 문명이 당시 무역으로도

얼마나 활발한 지역이었냐는 것을 추정해볼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수메르 유적에서 출토된 것들에서는

인더스 장인이 만든 홍옥수 구슬이라든가

인더스 명문을 가진 인장, 뼈로 된 상감 주사위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고고학자들은 이렇게 발달된 인더스 문명 지역을

많은 곳을 탐사했는데도 불구하고

이곳의 가장 큰 장점으로는

당시에 아주 평화로운 문명을 이루었다는데 꼽습니다.

 

발달한 배수시설로 목욕탕을 만든다거나

주택단지 형성을 통해 사람들이 잘 지내는 공간관리

다른 문명과의 교류를 통해 더욱 번창하면서도

무기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평화로운 문명을 이룩했다는 것이죠.

 

이집트 문명 때처럼

특정한 누군가를 모시기 위해 커다란 무덤을 만들지 않고

많은 이들이 사이좋게 지내던 인더스 문명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찾아오게 됩니다.

 

기원전 1750년경쯤부터, 이곳도 점점 쇠퇴하기 시작하는데요.

그 원인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고 합니다.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가설은 3가지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너무나도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던 인더스인들은

격동에 휘말리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무기 제작이나 군사를 키우는 데는 다소 등한시하여

카프카스 산맥에서 침공해오는 다른 지역인들에게 문명이 파괴되었다는 가설입니다.

 

-또 한 가지 가설은 지난 2018년도

미국 우즈홀 해양학 연구원에서 발표한 내용으로

인더스 문명 시절도 세월이 흐르며

인더스강 유역의 기온과 기상 패턴 변화에 따라

여름철 몬순 강우량이 점차 줄어들면서

그 구역에서 농경이 어렵거나 불가능했을 거라고 추측하는 자연환경의 변화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가설은

거대한 지진으로 인해 강의 흐름을 바꾸게 되면서

많은 지류가 말랐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강이 말라버리니 더 이상 그곳에 정착할 이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는 가설입니다.

 

오늘은 지금으로부터 4천년도 더 오래된 옛날인

기원전 2500년경쯤에 있었던 인더스 문명의 대도시

모헨조다로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