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그라운드(2024)

그냥 물감 흩뿌린 그림이 무지막지하게 비싼 이유 - 미학 입문

Buddhastudy 2023. 2. 27. 20:07

 

 

 

이 그림은 젝슨 폴록의 <Number 17A>입니다.

옆집 꼬마 아이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림이죠.

 

그런데 이 그림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비싼 그림으로

2500~ 3000억원 정도에 거래 되었습니다.

도대체 뭐가 이 별것 아니어 보이는 그림에 그런 막대한 가치를 부여하는 걸까요?

 

물론 여러 가지 정치적 경제적 요인들도 있지만

이 그림의 값어치를 뒷받침해주는 아주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미학적인 설명입니다.

 

오늘은 이러한 추상화의 가치를 뒷받침하는 가장 핵심적인 논리인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미학이론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그린버그는 잭슨 폴록 같은 추상화가들의 가치를

가장 먼저 인식하고 또 그걸 퍼뜨리는 데 앞장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린버그는 추상회화는 우월하다라고 분명하게 표명했습니다.

어떻게 그는 추상 회화가 우월한 미술이라고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던 걸까요?

 

그린버그는 추상 회화의 가치를 아무나 알아볼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교육받지 않은 대중과 대비되는 뜻에서

교양있는 관람자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린버그가 생각하기에

교육받지 못한 일반 대중들은 추상회화의 가치를 잘 알아볼 수 없지만

충분한 교육을 받고 많은 그림들을 접하는 기회를 가졌던 교양있는 관람자는

다른 어떤 아름다운 그림들보다도

이러한 추상회화에서 더욱 높은 가치를 느끼게 됩니다.

 

 

자 그렇다면 교양있는 관람자들이 받는다는

그 교육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림 분야와 관련해서 단연 중요한 것은

미술의 역사와 회화의 발전 과정에 대한 교육입니다.

미술은 고정적인 체계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과도 같이 계속해서 변화하고 발전하는 체계입니다.

 

그러한 점을 고려해 봤을 때

관람자에게 중요한 것은

아무런 맥락이 없이 즉각적으로 감각적인 쾌락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미술의 역사라는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한 작품의 가치를 종합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1차원적인 감각적 즐거움을 주는 예술 작품을 즐기는 건

제대로 된 정치적 지식이 없이

겉으로 보기에 달게 느껴지는 포퓰리즘 정책을 보고 좋아하는 것과 같다면

교양인으로서 정말로 가치는 예술 작품을 즐기는 것은

정치에 대한 폭넓은 공부와 경험을 통해

정말로 좋은 정책이 무엇인지 잘 가려내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고

우리가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미술은 모방적인 미술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 또는 존재할 법한 대상을 비슷하게 그려 놓은 것이죠.

 

그린버그에 따르면 오랫동안 회화는 연극적인 요소를 가져왔습니다.

마치 연극의 한 장면 같은 화면을 평면 안에 만들어 내는 것이죠.

그림을 통해서 벽에는 하나의 새로운 3차원의 무대 공간이 만들어지고

그 공간 안에서 어떤 입체적인 한 장면이 재현됩니다.

 

그런데 그린버그가 보기에 이런 모방적이고 연극적인 그림 안에서

결국 그림의 최종적인 목적은

그 묘사된 장면이 담고 있는 내용

이를테면 어떤 이야기나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기독교 회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기독교적인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고

이런 근대적인 그림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부르주아적인 아이디어 또는 삶의 기쁨이나 허무 등의

그런 내용을 전달하는 거죠.

 

여기서 미술의 이런 내용 전달이라는 기능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으시는 분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예술은

내용 전달을 통해서 감동을 주는 예술이니까요.

 

그런데 바로 그러한 고정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미술이 발전해온 역사였습니다.

 

화가들은 그림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는 모방과 내용 전달을 목적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그런 때 19세기 중반 정도를 기점으로 화가들은 놀랍게도

과연 그림이 3차원의 대상을 모방하는 일과

특정한 내용을 전달하는 일에

그 목적을 둬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도발적인 질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예술 분야들과의 관계를 따져 봤을 때

3차원의 모방은 사진술이 발명되면서 사진이 더 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용 전달의 경우 전통적으로 문학이 가장 잘 해왔던 일이죠.

 

따라서 굳이 다른 분야에서 더 훌륭하게 수행되는 일에

그림이 집착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문제의식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화가들은 이제 더 이상 그동안 계속해왔던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일을 찾아서

진정으로 그림다운 그림을 그리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인종차별은 많은 국가들에서 당연하고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하지만 인류 사회가 인종차별이 악하다는 인식을 하게 된 이후로

더 이상 인종차별을 제대로 된 정당성을 얻기 어렵게 되죠.

 

마찬가지의 혁명이 미술 안에서도 일어난 것입니다.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던 모방과 내용 전달의 전통이 사실은 당연한 게 아니며

그림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일이 있다라는 생각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다른 예술 분야들과 차별화된 순수한 미술의 가능성이

처음 인식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예상외로 음악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음악은 아무런 모방도 내용 전달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물론 뮤지컬이나 가요처럼 이야기와 내용 전달을 중요한 요소로 포함하는 음악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음악은 그 어떠한 내용적인 요소 없이도

순전히 멜로디와 박자 등의 청각적인 경험만으로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화가들은 바로 이러한 가능성을 그림 안에서도 실현시킬 수 있다는 기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떠한 개념적인 내용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순수한 시각적인 경험을 구현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어렴풋이나마 인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보는 단 한걸음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화가들은 계속해서 모방적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이전의 정확한 묘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오로지 그림만이 해낼 수 있는 묘사를 하기 시작했네요

그런 움직임 중의 하나는 그림이 점점 더 평면의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림은 본질적으로 평면 위에 그려집니다.

예전에는 그 평면이 입체적인 표현을 통해 극복되어야 할 장애물에 불과했다면

이제 평면은 오르지 그림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요소도

다양한 평면적인 표현이 그려줄 수 있는 가능성의 장으로 인식되게 됩니다.

 

따라서 화가들은 더 이상 3차원의 묘사에 집착하지 않고

평면적인 그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진정으로 그림다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마네나 피카소의 그림이 평면적으로 그려진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그림에 대한 진보적인 인식이 놓여 있었습니다.

 

 

2. 물질성

화가들이 그림의 고유한 요소로 발견한 또 다른 것은 물질입니다.

그림이 그려지려면 반드시 종이나 벽, 천 등의 표현과

물괌, 연필, 펜 등의 물질적인 재료가 있어야 합니다.

 

원래 전통적으로 이러한 물질들은

하나의 완성적인 장면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성공적인 내용 전달을 위해서 이러한 물질들은 가능한 감춰져야죠.

 

가령 사람의 피부를 표현할 때 물감은 드러나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물감인지 사람 피부인지 분간이 안 갈 만큼

물감의 존재를 감춰야만 성공적인 그림이 없죠.

 

그러나 이제 화가들은 물질을 전면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물질은 더 이상 단순히 내용 전달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이용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그림의 고유한 정체성과 창조적인 표현력을 나타내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러한 거친 물감 작업을 가진 반고호의 그림은

이런 이유에서 선구적인 그림으로 평가받는 것입니다.

 

 

3. 탈중심성

그림이 가질 수 있는 고유성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또 다른 요소는

탈중심성입니다.

 

전통적인 그림들은 연극무대를 평면 위에 재현해내놓는다는 목적에 맞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화면 안에서 더 중요한 부분과 덜 중요한 부분 사이의 위계

주인공과 조연 사이의 의계,

상위 계급과 하위 계급 사이의 위계가 있었죠.

이는 어찌 보면 계급 사회적인 질서를 오랫동안 반영해 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현대적인 그림에 이르러서는

어떠한 중심을 갖지 않고도 아무런 위계를 갖지 않고도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질 수 있다는 인식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모네가 말년에 그린 그림입니다.

여기에서는 그림의 모든 부분들이 똑같이 주목을 받습니다.

그린버그는 이러한 탈중심적인 그림의 경향성이

모든 위계적 구별이 이제 정당하지 않으며

경험의 특정한 영역이나 특정한 질서가

다른 것들보다 내재적으로 월 하지는 않다는

동시대의 감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합니다.

 

회화의 발전과 여러 사회적인 변화들을 동해

이제 더 이상 전통적인 방식의 회화는

이 시대의 생생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는 받아들여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과거 적인 가치를 가질 뿐이죠.

 

 

이제 잭슨 폴록의 그림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 그림에서는 평면성과 물질성 탈중심성이 놀라울 만큼 급진적이고

완전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아무것도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묘사는 필요하지 않죠.

아무런 내용도 없지만 내용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잭슨 폴록의 그림뿐만 아니라

이런 다양한 현대의 추상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건

화가들이 그림을 못 그려서 이런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는 겁니다.

 

역사적 발전으로부터 동떨어져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과거의 전통을 그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과거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그림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나름의 깊은 고민과 연구를 수행했기 때문에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이지요.

 

이런 발전적인 연구를 수행하지 않는 미술가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건 그저 과거의 관행을 관성적이고 무반성적으로 반복하는 그림의 불과합니다.

 

현대를 이끌었던 화가들은

그림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비판적으로 성찰했던 화가들이었죠.

그럼으로써 대중의 취향과는 멀어졌을지 모르겠으나

미술 안에서 하나의 매우 중요한 혁명을 수행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린버그는 이 추상화의 우월함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추상화를 극복하는 또 다른 진보적인 발전이 언젠가는 일어날 거라고 봤죠.

그 진보를 생각하면서 우리 동시대의 그림들을 이해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