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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그리스 역사 민주주의, 클레이스테네스

Buddhastudy 2023. 3. 8. 17:56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의 실현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이루는 과정이라 할 수 있는데요.

우리 모두는 누구나 각자 인간으로서의 존중이

정말 중요하다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죠.

 

학창 시절에 배울 때, 간단하게 요약해서

아테네는 모든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

오늘날에는 사회가 크고 복잡해져서

국민들을 대표하는 사람을 선거로 뽑는 방식이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조선시대 때 양반과 노비는

인간 존중의 가치가 판이하게 달랐고

다른 나라에서도 시민혁명이나 독립선언서 같은

여러 사건들이 있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귀족과 평민, 노예는 각기 인간의 가치가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기원전에 존재했던 고대 아테네에서는

어떻게 해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냐?

정치 제도라는 것은 어느 시대에도 완벽하진 않고

계속해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의 합의와 여건 속에서 하나둘 변화되어 왔죠.

 

지금으로부터 2500년도 더 이전인 고대 아테네에서는

직접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있었지만

현대 사회와 비교해보면 그 한계가 명확했습니다.

 

일단 직접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들을 때면

누구나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아주 멋진 제도인 것 같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약간의 환상이 깨질 수도 있는데요.

 

기원전 4세기 때 아테네의 인구는 10만 명 정도였습니다.

그중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 계층이라는 사람들의 수는 2만 명 정도였죠.

나머지 80%는 시민이 아니면 어떤 계급이었을까요?

 

당시,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였던 폴리스들은

생산력을 위한 노동력은 식민지를 통한 노예 수입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뿐만 아니라 여러 폴리스들이 있었고

제각기 힘을 키워나가며 힘이 약한 지역을 점령하며

반대로 자신들이 힘이 약하면 무너질 수 있는 긴장감이 지속되는 시대였죠.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노동과 생산활동은

다른 국가에서 잡아 온 노예들이 도맡아서 하고

시간적 여력이 남는 귀족들과 아테네 자국 평민들이 모여

직접 민주주의라는 것을 실현했습니다.

 

그야말로 하층민의 노동력으로 쌓인 기반 위에서

여유 있는 자들의 부르조아 민주주의였죠.

또한, 당시의 시대적 사고방식으로 여성의 참정권도 없었기 때문에

남성들만의 정치판이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와 평등을 내포하고 있는 민주주의.

그중에서도 직접 참가할 수 있을 듯한 어감을 주는

'직접 민주주의' 단어에 대해서는

이렇게, 환상을 깨고 이야기를 시작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고대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가 가치가 있는 이유는

그 시절 이집트에서는 파라오라는 한 인간에게

마치 모든 걸 창조하는 신으로 받들어 모시고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강력한 왕의 말이 곧 법이었는데

그나마 아테네에서는 한 사람의 의견이 전부가 아닌

여러 사람의 논의를 거치는데 있어서

이전까지와는 다른 정치적인 형태의 변화를 보였던 겁니다.

 

, 그렇다면 아테네는 어떻게 귀족이 아닌 평민들의 정치참여가 이루어졌을까요?

 

아테네는 상공업을 중심으로 폴리스를 운영했고

식민활동을 활발하게 벌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국민들의 평민들이 점점 돈이 많아지면서

지난 영상에서 이야기한 솔론의 금권정치가 이루어졌죠.

 

아테네 또한 처음부터 민주주의가 아니고

기원전 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귀족중심의 정치제도였습니다.

 

기원전 6세기에 접어들며, 솔론의 금권정치로

일부 평민들이 재산의 정도에 따라 정치 참여가 가능해졌죠.

하지만, 솔론이 개혁하고자 했던 평민의 참여는

권한이 그리 많지 않았고

그로 인해 당시 농민들의 지지를 받던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이를 이용해 무력으로 아테네 국내를 뒤집어서

귀족들을 몰아내고 본인이 아예 독재정치를 하는 참주정을 시행하게 됩니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참주정을 하며

아테네는 국내외적으로 경제적인 발전은 많이 이루었지만

그가 죽고 나서 아들 대에 가서는 정국은 변화를 맞이합니다.

 

아들인 히피아스는 권력을 물려받으며

아버지와는 다르게, 추방했던 귀족들을 불러들였고

그중에는 20년 정도 추방당했던 클레이스테네스도 있었습니다.

아테네로 돌아온 클레이스테네스는

최고 행정관인 아르콘직을 맡았었죠.

 

귀족들에게도 부드러운 정치를 실현하던 히피아스는

형제인 히파르코스가 다른 귀족들에게 암살을 당하고 나자

다시 아버지처럼 억압 정책을 펼쳤는데

이때 클레이스테네스는 귀족들과 연합해서 참주의 지배에 대항하게 됩니다.

 

기원전 510, 클레이스테네스는 다른 폴리스인 스파르타의 도움을 받아

히피아스를 아테네에서 추방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히피아스를 몰아냈다고 갈등이 끝나진 않았는데

이번에는 남아있는 사람들끼리 또 편이 갈라서게 되면서

클레이스테네스는 세습 귀족 세력을 대표하던

이사고라스와 싸움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스파르타는 이사고라스를 지원하게 되고

그로 인해, 클레이스테네스는 닭 쫓던 개처럼 히피아스를 몰아낸 뒤

자신도 아테네에서 쫓겨나게 되죠.

하지만, 이사고라스는 세습귀족을 지향했기 때문에

이에 시민들이 이사고라스에게 반대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클레이스테네스가 아테네로 돌아와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기원전 508년 민회와 연합하며

민주적 개혁을 추진하게 되죠.

이제까지의 아테네의 정치적 실권은

전통적으로 4부족 체제였습니다.

가문과 씨족 등 혈연 위주로 이루어져

기득권들이 국가의 판을 짜는데 용이 했죠.

 

클레이스테네스는 4부족 체제를 해체하고

거주지에 따라 10부족제로 재편해서

귀족과 성직자들의 권력기반을 약화시켰습니다.

 

10부족 체제로 재편되면서, ‘데모스라 불리는

촌락공동체가 정치의 기본 단위가 되었는데

남자들은 18세가 되면 재산과 가문에 관계없이 데모스에 등록해서

시민의 권리와 지위를 받게 됩니다.

현대 사회의 주민등록증이랑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죠.

 

클레이스테네스의 목적은 귀족들의 특권을 약화시키고

남자들 뿐이지만, 신분에 관계없이 평등한 참정권을 부여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를 이소노미아라고 불렀는데,

평등을 뜻하는 이소와 법을 뜻하는 노모스가 합쳐져

아테네의 시민이라면 평등한 권리를 보장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죠.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아테네에서 데모스를 기본으로 하는

직접 민주주의 효과를 만들어 내었는데요.

이로 인해 얼마 지니지 않아, 추후 기원전 5세기에 접어들어

데모스의 지지는 페르시아 군대와 싸우는 마라톤 전투에서 그 효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아테네의 민주정치에서 빠질 수 없는 이야기는

오스트라키스모스, 다른 말로 도편추방제라 할 수 있죠.

중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반드시 시험에 나올만한 도편추방제는

아테네에서 독재자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이 편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위험하다 싶은 사람의 이름을 도자기 파편에 적어서,

6천표를 넘기면 아테네에서 10년간 추방되는 제도였죠.

도편추방제의 시행 여부는

클리이스테네스가 시행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치는 않다고 합니다.

다만, 그때 당시 시기와 맞물려 있기도 하고

독재정치를 막고자 하는 그의 지향점과도 비슷한 점이 많아

그가 처음으로 시행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는 의견들이 있죠.

 

도편추방제는 이전의 페이시스트라토스 참주정 같은 일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의도로 고안했던 제도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단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변질된 제도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도편추방제에 뽑힌 인물은 10년 동안 국외로 추방되어도

그나마 당시 기준으로는 나름 관대한 편이었는데요.

기원후 700년경을 전후해서,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동로마제국에서는

왕위에 오르는 사람의 결격사유로

신체적으로 정상이 아닌 사람은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왕위 권력다툼에서 이기게 되면

상대방의 눈을 뽑아내거나 코를 잘랐는데

그 정도가 죽이는 것보다는 인도적이라 판단했던 거죠.

그러한 고대 사회의 기준치고는

아테네의 도편추방제는 신체에 위해는 가하지 않았고

시민권이 박탈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10년이 지나고서 돌아오면 다시 공직 복귀도 되었죠.

물론 제도 자체는 엄격했기 때문에

10년 안에 잠시라도 들어왔다가 발각되면

사형에 처해지도록 규정되었습니다.

 

도편추방제의 기본 목적인 독재 견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라이벌을 추방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지만

여러 과정을 거치며 점차 아테네 시민들의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하나둘 자리잡히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 귀족이나 많은 권력을 지니고 있던 부유층은

당연히, 새로운 개념인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보이게 되었고

그에 반해 평민들은 환영하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부자 및 능력 우월론은 부유층과 엘리트 귀족들이 지지했지만

이는 아테네의 대중들에게 설득력을 갖지 못했으며

대중의 목소리는 주로 극작가를 통해 희극으로 나타내거나

귀족 대비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은 교사 등을 통해

아테네의 대중들을 설득과 교육을 해나갔습니다.

 

하지만, 아테네의 방식에도 문제점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당시 주변국들에서는 서로 먹고 먹히며

일반 시민들도 금방 노예로 전락해버릴 수 있는 살얼음 같은 판국에

통치자는 생존능력이 요구되었던 거죠.

그런데 단지, 대중의 인기가 많은 사람이 국정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제치고

권력을 맡게 되는 경우도 발생했습니다.

 

어쨌든, 아테네는 고대는 물론 근대 사회에서는

극히 예외적일 정도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고

이러한 자유는 아테네를 대표하는 수많은 철학자와 역사가들을 배출해냈습니다.

 

자유로운 발언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도 다수 나타나며

현재까지도 그 영향을 끼치고 있죠.

 

 

오늘은 고대 그리스 역사 세 번째 시간으로

세계 최초 민주주의가 생긴 과정을 정리해 보았는데요

 

아테네도 기원전 7세기에는 귀족 중심의 정치체제였으며

기원전 6세기에 접어들며 솔론의 금권정치

이후 잠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이 있었으나

클레이스테네스가 참주의 지배에 대항하며

다수가 자유롭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민주주의가 발생된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