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중도론 3. 힌두교의 '참나'수행에 빠진 불교수행자들!

Buddhastudy 2023. 3. 30. 19:57

 

 

 

인류사상 다이아몬드를 거론한 단 두 사람

싯다르타는 뒷방 노인네로 밀려났고

용수는 궤변론자가 되어 구석으로 내몰렸다.

 

그리고 대승불교는 철저히 힌두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아트만을 도용한 것도 모자라

브라만을 비로자나불이란 이름으로 바꾸고

석가모니불 외에 수많은 붓다와 보살을 끌어들여 힌두교화하였다.

힌두교의 수정구슬이 그렇게 달콤했던 것일까?

 

맛보면 정말 달콤하다.

어디 달콤하기만 한가?

거룩하고 위대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이런 무가지보가 노력만 하면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다니

얼마나 희망적인가.

 

 

그럼 어떻게 얻는지 살펴보자.

본성만 보면 된다.

견성 말이다.

 

어떻게 본성을 볼까?

생각이 분별을 일으키면 안개가 낀 것처럼 세상이 흐려진다.

이것이 무명이다.

그러니 무명을 거둬내면 자연히 본성이 드러나 깨닫게 된다.

그 교과서적인 방법이 선정과 지혜이다.

따라서 정혜쌍수하면 된다.

 

그런데 수행자들이 이것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그래서 더 쉬운 방법을 쓰기도 한다.

바로 위빠사나이다.

 

생각이 일으킨 대상에 휘말리지 않고 실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관찰이 제대로 되면 그것이 곧 손수 알아차림인 본성이다.

저절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도 어려운가?

그러면 순식간에 깨닫는 방법을 쓰면 된다.

바로 간화선이다.

대표적인 화두로 나 모름이 있다.

무나 모름을 의식하면 분별이 순간 멈추게 된다.

이때 참나를 깨닫게 된다는 얘기이다.

경우에 따라선 일상관이라 하여 머릿속으로 일몰을 그리며 응시해도 좋다.

그렇게 무념으로 관하다 보면 그 자체가 참나가 된다.

 

무척 쉽지 않은가?

이러니 깨달음의 대중화를 기대해 봄 직하다.

 

혹시 이것도 어렵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얼마 있으면 호르몬 주사 한 대만 맞으면

에고가 사라지고 참나상태로 깨어있게 될 것이니 말이다.

 

아무튼 이런 방식으로 깨달았다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참나가 되니 시공이 끊어지고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다

우주와 하나가 되어 해탈했다

지극히 청정하고 고요하여 열반이다라고...

 

 

--

이렇게 절대와 해탈과 열반이 공통분모로 등장한다.

그런데 정말로 깨달은 것이 맞을까?

 

그것들은 수정구슬의 삼대 특징이며 싯다르타가 외면한 것들이다.

그는 다이아몬드구슬을 말하면서도

절대, 해탈, 열반에 대비한 다이아몬드 구슬만의 특성엔 함구했다.

 

용수가 공을 꺼내 그것을 구체화했지만

오늘날까지 공을 이해하여 싯다르타의 불법을 설한 수행자는 전무하다.

 

 

수행자들에게 감히 묻겠다.

그대가 깨달았다고 하는 경지가 과연 온전한가?

혹시 집단 무의식에 몰입함으로써 얻게 된 不二의 절대성을 가지고

해탈과 열반을 운운하고 있는 건 아닌가?

불변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텅 빈 자각이

죽음과 더불어 흔적도 없이 소멸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질문이 너무 많을 수 있겠다.

그럼 딱 한 가지로 정리하겠다.

그 참나는 어떤 원리로 자존하며 영원불변하는가?

 

참나 상태가 되면 그런 의문이 일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 이분법적인 개념들은 이미 해탈했으니 말이다.

그럼 의문이 없으면 제1원인의 문제를 해결한 것인가?

 

아무래도 조건을 바꿔야겠다.

술 취한 사람에게 시비를 따지기보다는 술이 깨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으니 말이다.

다시 분별을 일으켜 중생이 되어 보자.

이제 정신이 좀 들 터이니 의문을 일으켜

참나가 어떻게 원인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지 답을 내려 보아라.

 

모르겠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문제를 푼 것이 아니라

참나라는 무의식으로 도망가 회피한 것이 된다.

진리는 어디에나 있다.

 

중생의 모습에서 실존을 자각하지 못하면 그건 깨달음이 아니다.

참나를 찾으면 깨닫게 된다는 흑백논리는 힌두교의 수정구슬이다.

다이아몬드구슬에서 수정구슬을 보면

그건 순수한 유리구슬이 뒤틀려 파생한 끔찍한 괴물로 다가온다.

그대들의 눈엔 그것이 절대와 해탈과 열반으로

청정하고 거룩하고 위대해 보이지만

그건 참된 존재의 또 하나의 왜곡일 뿐이다.

 

물론 혹자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읊으며

깨달음을 소박하고 평범하게 묘사하지만

이미 그 내면엔 수정구슬의 에고가 끈끈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대들이 굳게 믿고 있는 절대와 해탈과 열반이 과연 진리일까?

혹시 그것이 너무 매혹적이어서 당신이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건 아닐까?

 

싯다르타는 당신이 깨달음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을

죄다 수정구슬로 보았다.

물론 의식의 성장으로 보면 수정구슬은

3차원의 유리구슬에서 진보한 4차원 의식이 된다.

고차원의 정신적 경지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5차원의 다이아몬드구슬에서 보면

그건 의식의 진보이기 전에 아상의 고착화이다.

 

가령 기존의 집을 허물로 재건축하는 것보다

맨땅에 집을 짓는 편이 수월하다.

그렇듯 4차원의 수정구슬은

유리구슬이 왜곡됨으로서 깨달음의 커다란 짐 덩어리가 된다.

 

수행자들은 기독교의 맹신자들을 보면서 에고의 철옹성을 느낀다.

힌두교의 수정구슬도 별반 다르지 않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에 매달리는 것처럼

지금 깨달음에 달싹 붙어 있지는 않은지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도 대승불교의 수정구슬엔 양심이 있다.

그건 수정구슬을 막상 취해보니 뭔가 부족하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수정구슬의 한계를 직시한 이들은

그것에 선을 그어 등급을 나누게 되었다.

 

화엄경이나 대승기신론에 보면 크게 10단계로 나누고 있다.

마치 바둑에서 급과 단을 정하고

9단을 입신이라 하는 것과 유사하다.

 

수정구슬을 찾아 그것에 조금 익숙해지면

일지보살이라는 품계를 준다.

그리고 이때부턴 육바라밀을 행하며 유교의 도덕군자를 지향한다.

현상계에서 인품을 닦아 나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돈오 이후의 점수에 유교를 결합함으로써 별난 수행이 돼 버렸다.

 

아무튼 깨달음에 계단이 생겨났고

대략 일곱 계단쯤 올라가면 원효나 진묵이 나온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보살이 나오고

그 끝에 다다르면 붓다가 된다.

완전무결한 깨달음은 붓다에게만 부여된다.

 

그럼 혹시 붓다의 등급만 깨달음이고

그 밑은 깨달음이 아니라는 생각은 못 해 봤는가?

 

눈을 감고 있는 중생이 있다.

그가 눈을 번쩍 떴다.

세상이 환하다.

그런데 그 환한 것에 등급이 있단다.

그걸 열 가지로 쪼개서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가히 몽상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거듭 말하지만, 중생의 무명은 너무 어두워서 구분을 둘 수 없고

각자의 깨달음은 너무 밝아서 등급을 매길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깨달음의 경계를 나눈다면, 견성과 성불 정도이다.

이 정도는 그래도 방편으로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

돈오 이후에 사다리를 만드는 건 매우 우매한 행동이다.

 

불교인들은 기독교의 맹신을 비판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어리석음이 바로 수정구슬의 등급론이다.

아트만(참나)에 취해 밝고 어두운 것을 잃어버린 결과이다.

 

그들은 그 분간 없음을 분별의 초월이라 말하지만

그냥 말 그대로 개념이 없는 것이다.

호박이 마음에 안 든다고 줄을 이리저리 그어

수박을 만들려는 것 자체가 한편의 희극이다.

 

 

어찌 되었든 싯다르타가 외친 다이아몬드구슬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초기불교는 묵묵히 그것을 찾으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찾지 못했고

대승불교는 아예 다이아몬드구슬을 버리고 수정구슬을 기치로 내걸었다.

다행히 용수가 유일하게 다이아몬드 구슬을 들고 나왔지만

그것 역시 허망한 실패로 끝났다.

 

싯다르타의 다이아몬드구슬은 정녕 무엇인가?

그것이 도대체 어떤 경지이기에 무상정등각이라 하는가?

그것을 이룰 방법이 있기는 한 것인가?

 

이런 의문에 명확한 논거나 뒤따르지 않는다면

싯다르타는 역사상 둘도 없는 허풍쟁이가 될 것이다.

그가 대승불교의 제자들로부터 외면받더라도 자업자득이다.

 

뒷방노인네로 밀려 아무런 발언권이 없어진 싯다르타

이제부터 그를 대신해 깨달음의 실상을 담아 보고자 한다.

 

*성철스님은 평생동안 깨달음에 등급을 매기는 행위를 질타했다.

이 부분만큼은 누가 뭐래도 성철스님의 업적이라면 업적이다.

적잖은 이들이 성철스님이

대승기신론과 화엄경에 나오는 단계적 깨달음을 외면했다면서 비판하지만

그건 고차원 불교의 의식세계를

지식의 단편으로 재단하려는 데에 따른 커다란 오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