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중도론 11. 깨달음을 얻기 위한 3가지 길(3)

Buddhastudy 2023. 4. 27. 20:33

 

 

 

3. 싯다르타의 세 번째 구도행, 해탈

 

싯다르타는 다시 이곳저곳을 배회하였다.

여러 곳을 거치다가 한 곳이 눈에 띄었다.

라즈기르 지역을 지나다가 700여 명의 수행자를 거느리고 있는

웃다카 라마푸타라는 영적 스승에 관한 소문을 들은 것이다.

 

당시 그는 비상비비상처의 경지에 올랐다고 알려져 있었다.

생각도 아니고 그렇다고 생각이 아닌 것도 아닌

즉 해탈의 경지에 오른 스승이라는 것이다.

 

싯다르타가 나타나자 한 수행자가 그를 안내해 라마푸타에게 데려갔다.

이런 걸 보면 당시 출가자들 사이에서

싯다르타의 이름이 꽤 알려져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아마 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한 사실부터가 남달랐고

수행에 임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용왕매진하는 그의 구도욕이 화젯거리였을 것이다.

아니면 그의 출생에 얽힌 예연

그러니까 아시타 선인이 싯다르타에게 한 성불의 예언이 주효했을 수도 있다.

 

자네가 밧가와에게서 위빠사나를 배우고

알라라 칼라마에게서 不二의 반야를 터득한 싯다르타인다?”

,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뭐가 부족해서 여기를 찾아온 것인가?”

라무푸타는 거두절미하고 싯다르타의 수행의 성과에 대해 캐물었다.

 

뭔가 미진한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꼭 집어 뭐라 단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의심이 일모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데 제가 이룬 경지에는 아직 의심이 남아 있습니다.”

, 가히 예언대로구나!

자네가 무상의 깨달음을 얻으려는 구도행을 보니

아시타의 예언이 생각나는구나.

자네의 미진한 부분이 무엇인지 정녕 모르겠는가?”

라마푸타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회상에 잠기는 표정을 지었다.

 

저는 眞我를 찾고, 그것마저 버림으러써 不二의 반야를 증득했습니다.

삼라만상을 하나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저 고요하고 평화로울 뿐인데

생각을 일으켜 이런 경지를 진단하면 아직도 의심이 남아 있습니다.

청컨대 제가 갈 길을 알려 주십시오.”

 

싯다르타는 한껏 몸을 낮췄다.

한때는 알라라 칼라마를 제외하고는 자신보다 높은 경지의 수행자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라무푸타 앞에서는 왠지 모르게 작아지는 것이다.

라마푸타만은 자신이 찾던 궁극의 깨달음을 이룬 스승으로 여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때문인가.

 

허허허, 자네는 지금 不二의 반야에 사로잡혀 있네.

절대라는 관념에 붙어 있는 것이지.

작금의 수행자들이 뭐가 문제인지 아는가?

자신들이 이룬 경지에 또다시 붙게 된다는 사실이네.

그런 것마저도 훌훌 털어버려야 하네.

이것을 이름하여 해탈이라 하지.

해탈이 될 때 비로소 대자유를 얻게 될 것이며

머릿속에 의문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무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네.”

해탈!...”

 

싯다르타의 입에서 흘러나온 해탈이란 두 글자는 마치 탄식 같았다.

자신이 이룬 경지에 부지불식중 매여 있었다는 사실

그것이 그의 심중에 대못처럼 박혔다.

자네는 아직도 차원의 한계에 걸려 있네.

깨달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깨달은 것을 흉내내고 있는 것이지.

그렇게 변죽만 울려서야 어찌 대각을 이루겠는가

 

라마푸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싯다르타는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그날부터 싯다르타의 세 번째 구도행이 시작되었다.

 

 

라마푸타가 쓰는 법은 딱 하나 이었다.

이란 무언가가 붙으면서 덩어리를 이루고

그것이 커져 삼라만상이 되었다는 단순한 창조 이론이다.

그런데 수행에 있어서 이 이 매우 유용하게 된다.

중생의 무지와 고해는 바로 에서 왔기 때문에

그것만 떼면 수행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라마푸타는 무소주, 무소유, 일체무애의 법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싯다르타는 이미 眞我를 찾고 不二의 절대도 꿰뚫고 있었기에

그가 이룬 경지에 머무름이 없게 함으로써 진정한 해탈이 되도록 꾀하였다.

 

 

하지만 존재와 그 존재에 대한 인식이 있는 한

해탈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라마푸타는 무아를 들고 나왔다.

가아와 眞我, 그리고 不二의 절대마저 모두 지워진 멸진처로 싯다르타를 몰고 갔다.

 

싯다르타는 모든 것이 사라진 무의 상태에 머물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의식에 일련의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무아에 익숙해지다 보니 마음 어느 구석에서 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자신이 이룬 경지에 대한 인식은 사라진 지 오래고

억지로 생각을 일으키려 해도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해탈이나 대각에 대한 것도 까마득하고

그가 끝까지 놓지 않았던 의심의 불씨마저 꺼졌다.

싯다르타는 일체의 머무름이 없이 그냥 존재만 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를 지켜본 라무푸타는 자신보다 해탈의 경지가 높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스승과 도반들의 찬사에도 싯다르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지극한 무아의 상태에서 해탈을 누리고 있었다.

 

 

싯다르타의 해탈 삼매는 한 달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싯다르타의 눈에 조그만 돌멩이가 비춰졌다.

그것이 땅에 박혀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흡사 자신과 닮아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뜨고 다시 돌멩이를 보았다.

그건 확실히 자신의 모습이었다.

 

내가 이뤘다는 해탈이 저 돌멩이와 뭐가 다른가!’

 

싯다르타는 꺼진 줄 알았던 의심의 불씨가 살아났다.

머무르는 바가 없는 해탈의 상태라는데

지금껏 자신이 그 해탈에 머무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탈하여 해탈에 또 머무르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아무리 해탈해도 머무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지금 내가 이룬 경지는 진정한 해탈이 아니다.

이것 역시 생각이 교묘하게 꾸며낸 환영이다!’

 

 

싯다르타는 해탈에 바싹 붙어 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에 의해 이루어진 경지는 눈속임이었다.

왜냐, 에 의해 차원이 갈라지고, 온갖 속박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있는 한 차원의 족쇄에 걸려 있는 셈이 된다.

해탈에 이 된 싯다르타

그는 지금껏 자신이 생각의 장난에 놀아났음을 알아챘다.

 

생각을 거둬낸 바탕에 자리한 眞我

그것 역시 잘 다듬어진 생각이다.

번뇌망상을 일으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존을 이해하고 그에 순응할 줄 안다.

참으로 고차원의 존재인 것이 틀림없지만

그것 역시 분별이다.

眞我不二의 시각으로 절대를 품어도 마찬가지이며

더 나아가 무아를 왕래하며 해탈을 도모해도 변함이 없다.

이 모든 것은 생각의 분별 노름이다.

생각이 가아도 만들고 眞我도 만들고, 무아의 절대, 해탈도 만든다.

생각의 , 그건 정녕 벗어날 수 없는 차원의 궁극적 한계이던가!’

 

싯다르타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세 명의 스승으로부터 배운 깨달음의 경지는

결국 생각의 분별이 조장한 꿈결 같은 것이었다.

당대 최고의 스승을 모시고 목숨을 바쳐 가며 수행에 매진했건만

남은 건 허무함뿐이었다.

 

싯다르타의 절망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라마푸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에게 다가왔다.

 

의심병이 다시 도졌구나.

자네가 이룬 해탈은 논리와 의심, 증명마저도 머무름이 없는 경지이네.

해탈 삼매에 들었을 때 어디 그런 것들이 떠올랐던가?

자네가 다시 해탈 삼매에서 깨어나 생각을 일으키니

또 다시 의심이 생겨나는 것이지

하지만 스승님, 해탈 삼매가 저 돌멩이와 뭐가 다릅니까?

돌멩이 역시 일체의 머무름이 없는 상태로 의심 없이 삼매에 들어 있지 않습니까?

저런 상태로 영원히 있은들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저런 영생은 필요치 않습니다.”

싯다르타는 속에 담은 생각을 가감 없이 꺼냈다.

 

이보게, 자네는 가아가 꿈꾸는 영생이나 열반을 기대하고 있는 것일세.

원래 자연은 저 돌멩이처럼 영생하는 것이네.

희로애락을 비롯한 일체의 감정이 없이 저 돌멩이처럼 저렇게 청정히 존재만 하는 것일세.

깨달으면 뭔가 대단한 것을 얻으려는 생각부터가 잘못된 것이지.

좋고 나쁜 모든 것이 소멸된 상태에서 무심으로 존재만 할 뿐이네.

이것이 참된 실존이며 깨달음의 세계이네

 

 

라마푸타는 잠재된 욕망으로 인해 무너져 내리는 싯다르타를 안타까워 했다.

깨달음으로 뭔가를 얻으려는 생각 자체가 문제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싯다르타의 생각은 달랐다.

깨달아 돌멩이처럼 될 바엔 차라리 번뇌망상에 휩싸여 살다

이슬처럼 사라지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스승이 자신의 의심병을 지적하는데

의심을 버리면 오히려 수행이 구겨진다고 생각했다.

어떤 경지에 올라도 의심 줄을 놓으면 안 되며

의심이 일모도 생각나지 않는 자리에 이르러야 비로소 깨달았다 할 것이다.

 

 

라마푸타의 설득에도 싯다르타의 닫힌 마음은 열어지지 않았다.

라마푸타는 그런 그를 안타까움 대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수행의 마지막엔 의심마저 놓아 버려야 하네.

그런데 아직은 그것이 이른 것 같네.

나의 가르침은 여기까지이니 자네의 길을 가도록 하게.

한 가지만 명심하게.

내가 전수한 해탈 이상의 경지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싯다르타는 자신을 이끌어 준 라마푸타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었다.

그리곤 아무런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나 숲으로 들어갔다.

깨달음의 꿈에 흠뻑 취해 있다가 깨어난 자신을 돌아보며 정처 없이 걸었다.

가끔은 번뇌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자신을 바라보며

그냥 해탈 삼매에 들어가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싯다르타의 불굴의 구도욕은 그런 안일한 생각을 미뤄냈다.

싯다르타는 입술을 깨물며 마음을 다독였다.

무상의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

 

 

.....

 

싯다르타의 구도행

그것이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됐던 것은

오로지 의심 하나 때문이었다.

眞我와 절대, 그리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서도

의심을 놓지 않았던 싯다르타를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는가.

혹시 당신은 그 정도 경지에 오르지 못했음에도 의심을 놓고 있지는 않은가.

 

 

불제자를 자처한다면 세존이 했던 것처럼 의심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당신의 스승을 비롯해서 세간에 깨달았다는 선지식들을 의심하고

역사적 고승들을 의심하고

더 나아가 불법과 붓다마저 의심하라.

 

그리고 당신이 이룬 경지가 무엇이 되었든 의심하라.

그 의심에 화두를 통해 증득한 반야를 실어 냉철하고 논리적으로 파고들어라.

 

기름이 다하면 불이 꺼지듯 의심 역시 그 끝에 이르면 저절로 소진한다.

그렇게 해서 남은 것이 바로 온전한 앎인 全知이다.

全知가 없는 각성은 무상정등각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세존이 세 명의 스승을 떠나 홀로 서게 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