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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고대 이집트 역사8: 룩소르신전, 아톤신

Buddhastudy 2023. 5. 3. 19:45

 

 

 

고대 이집트는 혼란의 시기였던 제2중간기 시절

힉소스인들에게 약 150년간의 지배를 받다가

18왕조 제1대 파라오인 아흐모세 1세가

힉소스인들을 몰아내고 이집트 전역을 되찾게 되며

신왕국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이후로, 3대왕 투트모세 1, 6대왕 투트모세 3세가

뒤를 이어 팔레스타인, 시리아 지역까지 점령하게 되었으며

당시 최대강국인 미타닌 제국의 영토까지 노리며

이집트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넓혀나가게 되죠.

 

투트모세 3세는 원정군을 17회나 서아시아로 보내

대제국을 건설하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아멘호테프 2, 투트모세 4, 아멘호테프 3세가 파라오를 이어가게 되면서

이집트의 번영이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투트모세 3세의 아들이었던 아멘호테프 2세는

기원전 1427년에 18세의 파라오가 되어

아버지로부터 덩치가 커진 이집트를 이어받았는데

시리아의 미탄니 왕국과 치열한 경쟁 및 적대관계를 지닌 상태였죠.

 

하지만, 그의 치세 도중에는 북쪽의 히타이트 제국이 강성해지면서

이집트와 미탄니 왕국은 서로 손을 잡으며 화해모드로 돌아서게 됩니다.

 

아멘호테프 2세 다음 왕으로는 투트모세 4세가 뒤를 이었지만

일찍 요절한 탓에 기록은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투트모세 4세는 파라오 자리에 8년 동안 있었으며

이전 왕들과 달랐던 점을 하나 꼽는다면

전통적으로 순수혈통을 자랑하던 근친혼에 둘러싸인 이집트 파라오 왕조에서

그는 외교 정책의 하나로 미탄니 왕국의 왕녀와 결혼했다는 점이죠.

 

그리고, 투트모세 4세의 또 다른 일화로는

10분 세계사 고대 이집트 역사 스핑크스 편에도 잠시 나왔는데요

고왕국 시절부터 1000년도 넘게 묻혀 있던 스핑크스를

다시 복구시킨 왕이 투트모세 4세였습니다.

 

투트모세 4세가 젊은 시절, 사냥을 나갔을 때

스핑크스의 발치에서 잠들었다가 꿈에서 스핑크스가 나타났는데요

꿈속의 스핑크스는 자신을 덮고 있는 모래를 청소해주면

왕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얘기하였고

이에 투트모세 4세는 스핑크스 주변의 모래를 치우는 공사를 시행합니다.

그리고, 현재 관광지에서 볼 수 있는 스핑크스 두발 앞에 놓인 석비에는

그 꿈 이야기가 새겨져 있죠.

 

투트모세 4세가 일찍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인 아멘호테프 3세가 뒤를 이었고

그의 치세는 평화로운 시절을 보였으며

이집트 예술의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외교적으로는 아시리아, 미타니, 히타이트 등의 나라들과 전쟁이 아닌 우호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해 신전과 궁전을 다수 짓게 되죠.

 

여러 가지 건축물 중에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우선 대표적인 신전으로 룩소르 신전카르나크 신전이 있습니다.

 

룩소르 신전은 나일강 동안에 위치해 있으며

고대 이집트의 신전단지로

이 신전은 당시 이집트의 주요 신이었던

아문’, ‘아문의 아내 무트’, 그리고 아문의 아들 콘수에게 헌정되었죠.

 

카르나크 신전은 이집트의 신전 중에서 최대 규모를 보이고 있으며

룩소르 신전 북쪽 3km에 위치해 있는데요

카르나크 신전은 중왕국 시절부터 건축되었으며

잦은 도굴과 지형적 문제로 인해 훼손되면서

당시, 아멘호테프 3세가 복구 사업을 했지만

세월이 흘러서 현재는 전체의 10% 정도만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카르나크 신전은 아문, 무트, 멘투에게 헌정되는 신전으로

각각의 세 개의 신전으로 나뉘고

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아문 대 신전입니다.

 

룩소르 신전으로부터 카르나크 신전까지는

북쪽으로 3킬로미터 가량 뻗어 있으며

이 길은 '스핑크스의 길'이라 불리고

카르나크 신전의 입구에는 양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스핑크스가

양쪽으로 20개씩 세워져 있죠.

 

안쪽에는 후대에 람세스 3세가 아문신에게 바친 신전도 있으며

가장 안쪽에는 이집트의 나폴레옹이라 불리었던

투트모세 3세의 축제전이 있습니다.

 

이곳은 신전의 식물원이라 불리는데

투트모세 3세로 이집트의 번창을 기념하며

국가의 풍요를 기원하고, 축제를 벌이던 장소였다고 합니다.

 

 

 

아멘호테프 3세 시절의 건축물 중 가장 화려했던 것으로는

테베강 서안의 장제전이었지만

범람이 잦은 평지에 가까이 세우는 바람에 모두 없어져 현재는 흔적이 없고

남아 있는 것은 멤논의 거상뿐이라고 합니다.

 

멤논의 거상은 아멘호테프 3세가 건축했던

장제전의 정문을 지키던 두 개의 석상으로

높이가 17m. 아파트 5층 정도의 높이죠.

 

두 개의 석상 중 하나는 거대한 바위를 깎아서 조각을 한 조각품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러 개의 바위를 쌓아가면서 조각을 한 작품입니다.

 

멤논의 거상으로 불려지게 된 이유는

세월이 흘러 그리스 여행객들이 이곳에 와서는

아침 시간에 이상한 종소리가 난다고 해서

그리스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아들 멤논이 생각나

멤논의 거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멤논은 새벽의 여신 에오스와 트로이의 왕자 티토노스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에티오피아의 왕이었는데

트로이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에티오피아 군대를 이끌고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를 돕기 위해 트로이로 떠나게 되죠.

 

그는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어준 갑옷을 입고

에레우토스, 페론 등의 많은 그리스 장수들을 무찔렀지만

결국에는 아킬레우스와의 1:1 대결에서 패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멤논은 새벽의 통치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때 지어진 멤논의 석상은 예전에는 종소리가 들렸지만

세월이 지나며 하나둘 부서지기 시작했고

기원후 199년 로마 제국 시절 로마 황제

셉티무스 세르베루스시절에 보수되어서

이 때부터는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멘호테프 3세는 국가의 번영과 평화를 누리던 왕으로

젊을 때는 사냥을 즐겼고

15세 때는 왕족이 아닌 평민 출신의 티예와 결혼하는

이색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평화로운 시대의 특징이라도 나타내듯이

그는 나이가 들어서는 정치보다는 쾌락을 추구하였고

달콤하고 맛있는 음식도 즐겼는데, 단 음식을 먹는 습관에 의해

결국 치아에 문제가 생기고 잇몸이 쑤시면서

여러 가지 병을 얻어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가 죽었을 때는 첫째 왕자인 투트모시스 왕자가 더 일찍 죽은 상태였기 때문에

왕비인 티예가 잠시 정국을 맡았지만

차남인 아멘호텝 왕자가 해외를 다녀온 후부터는

바로 정권을 넘기게 됩니다.

 

아멘호테프 3세의 생애는 많은 건축물을 아몬 신을 위해 헌정하며 짓게 되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아몬 신보다는

아톤 신에게 귀의했다고 했다는 이야기들이 많은데요

그 이유는 파라오들이 선대부터 정복전쟁을 통해

가져다온 전리품들의 다수를 아몬 신에게 공물로 바치면서

신관들의 힘이 증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신전 창고에는 수많은 전리품들이 산처럼 쌓여갔으며

직접적으로 전쟁터에 뛰어들지 않고 신에게 기도만 올리던 신관들은

모든 공적을 아몬 신 덕이라 추켜세웠으며

왕은 전리품을 신전에 바치는 노예 같은 역할을 맡게 되었죠.

 

이에 아들인 아멘호테프 4세가 기원전 1350년 무렵에 파라오로 즉위하여

눈에 거슬렸던 신관들의 힘을 억누르는 일부터 단행하게 됩니다.

 

신왕국 시대를 이끌었던 아몬 신을

신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종교 개혁을 단행하게 되는데

이를 위해 새로운 신을 내세워 태양신, ‘아톤을 믿는 종교를 선포하게 됩니다.

 

이집트에는 여러 신들이 있기 때문에

즉위 초에는 아톤이 태양신 의 다른 모습이라고 선언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즉위 9년 때는

다른 모든 신들을 부정하며, 아톤만이 유일신이라고 했던 거죠.

 

아멘호테프 4세는 그리 건강하지 못해, 병약했으나

성격이 단도직입적이고, 주변인의 시선을 그리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편이라

사회 기준에서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시선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인지

아버지가 평생 신관들의 눈치를 보던 것과는 달리

지금까지 쌓여온 아몬신의 질서를 뒤바꾸는 일을 시도하게 되었죠.

 

그는 우선, 테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북쪽 아마르나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해 천도를 하였고

수도의 이름은 아케트아텐, ‘아톤 신의 지평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조차도 아몬신의 의미가 담긴

아멘호테프 4세가 아닌, ‘이크나톤으로 개명하게 되죠.

이크나톤은 아톤을 숭배하는 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아멘호테프 4세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태어난 이크나톤은

모든 신전에서 아톤신을 제외한 다른 이름은 지우기 시작합니다.

이 세상의 신은 오직 아톤 신이라고 내세웠죠.

 

아톤신은 모든 민족을 초월한 유일한 신으로서

누구에게나 가호를 베푼다고 선전하였고

아몬-라 신은 오직 사제들만을 위한 신으로

사람들의 피땀 흘려 모은 재물을 빼앗으며 국익을 좀먹는다고 선전했습니다.

 

이로 인해, 과거 아몬 신의 제사장이 가지고 있었던 실권을

이크나톤이 파라오의 힘으로 되찾아오면서

파라오는 국가 통치와 제사장의 임무를 동시에 지니게 됩니다.

많은 사제들은 일자리를 잃게 되고

남아 있는 자들도 궁정 관료 정도의 자리로 머물게 되죠.

 

아톤신의 숭배에서는 신의 모습을 인간적으로 묘사시키는 것을 금지했는데

단지, 둥근 태양 모양의 원반형 모습의 아톤이

빛의 손을 뻗어 왕족에게 은총을 내리는 모습만이 있었습니다.

이는 역사상 최초의 일신교의 모습이기도 했죠.

 

이크나톤에 관해서는 아내인 이집트의 왕비 네페르티티가 유명한 인물로

투탕카멘의 의붓어머니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아이라는 대신관의 딸로 추정되고 있으며

아이는 이후, 투탕카멘이 일찍 죽고 스스로 파라오가 된 자였죠.

, 딸을 이크나톤에게 시집보내면서

아이본인도 왕이 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네페르티티라는 이름의 의미는 고대 이집트어로 미녀가 왔다라는 뜻으로

당시에 상당한 미인으로 추정되는 이름이었죠.

네페르티티의 흉상은 독일의 노이에스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미술사적으로 높은 가치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이집트 미술은 경직되고 형식주의였는데 반해

이크나톤 시대에 와서는 사실적주의적인 미술로 바뀌게 되며

이집트 미술의 발전을 엿볼 수도 있기도 하였죠.

 

종교개혁을 실시한 이크나톤은

오래된 이집트의 전통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으며

새 수도를 건설하면서 예술가들 또한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형식주의를 버리게 됩니다.

 

고왕국 시대부터 이어온 정형적있던 회화와 조각들이

좀 더 입체적이고 동적으로 변화되어

예술계에서는 아마르나 예술이라고도 불리는데요

아마르나 예술은 이집트 예술 중 특이한 양식을 지니고 있어

세계의 많은 미술학자들에 관심을 받고 있기도 하죠.

 

예술을 사랑한 이크나톤은 예술적으로는 조각품들의 새로운 시도와는 달리

일상생활에서는 화려한 건축물을 짓는 것에 대해서는 금지시켰습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평민들이 살아갈 수 있는 평민타운 건설 계획을 하였으며

누구나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집안에 난로와 화장실을 설치했죠.

또한 귀족이나 부자들에게 세금을 거두기 시작했으며

노예들에게도 무급 노동이 아닌,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게 했습니다.

 

귀족들의 특권을 내려놓게 함으로써 평민들에게 자유와 권리를 주었지만

갑자기 생겨난 자유에 대해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르던 평민들은

편안해진 상황을 맞이하게 되니, 부자들을 따라하며 게을러지기 시작하는데요

읽기와 쓰기를 배우라는 왕의 명령도 듣는둥 마는둥 귀찮아하기 일쑤였으며

누구나 잘 살게 하고자 했던 왕의 바램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상황으로 이어져 평화로움에 물든 백성들의 나태함은

결국 10년 만에 정치경제적으로 국가의 기반을 흔드는 지경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평소, 이크나톤에게 악감정을 지니고 있엇던

기존의 아몬을 모시던 신관들과 군대의 권력자들은

흔들리는 국정과 맞물려 왕의 실정을 규탄하고 일어서게 되었으며

이크나톤은 신하들에게 배신당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크나톤의 종교개혁은 10년 만에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의 아들 스멘크카레가 뒤를 이었지만, 3년 만에 젊은 나이로 사망하는데요

스멘크카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기록이 없어

일부 학자들은 네프르티티와 동일 인물이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고대 이집트 8번째 시간으로

투트모세 3세의 영토확장 이후에

신왕국 제 18왕조 왕들 중에서

아멘호테프 3세 때 이집트가 전성기를 맞이해

국가 번영과 각종 건축물을 쌓아올린 내용으로 시작해보았습니다.

 

아멘호테프 4세에 가서는

기존 아몬 신을 몰아내고 아톤 신을 숭배했으며

아멘호테프 4세는 이크나톤으로 이름을 개명한 후

평화로운 이집트 시대를 누리게 되었죠.

 

이로 인해, 예술면에서도 많은 변화를 보였고

평민들도 함께 잘 살아가고자 하는 정책을 펼쳤으나

개혁에 실패하는 내용까지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크나톤이 기원전 1334년에 사망할 무렵

주변국이었던 히타이트와 아시리아 등은

병력을 증가시키며 다시 이집트 주변은

긴장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는데요

다음 시간에는 이집트 역사 9번째 영상으로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