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윤홍식_깨어있음

윤홍식_[깨어있음_1단훈련] 1_3 양심과 욕심에 대한 이해

Buddhastudy 2013. 1. 6. 20:02

출처 : 홍익학당

  

우리는 아무리 수행을 해도 에고에서 벗어날 수 없죠. ‘에고 버린다.’ 이런 얘기 아예 하지 마시고요. 깨어있는 것도 에고와 함께하는 겁니다. 그 에고가 강할 때는 내가 깨어있다는 거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에고를 더 내려놓으면 참나와 더 하나 돼서 있으면 그런 생각도 안 일어나죠. 그래서 에고가 그렇게 소리를 낼 때 더 내려놓으시는 게 맞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참나를 느낀다 하더라도 에고를 가지고 느끼는 겁니다. 참나에 대한 미묘한 느낌들도 에고가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참나와 둘이 아닐 때는 에고와 참나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한 겁니다. 에고가 원래 참나에서 나온 거기 때문에 자기 뿌리를 만나면요, 참나와 하나처럼 돌아갑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느끼고 여러 가지 에고가 느끼는 것들을 느낀다면 에고도 같이 돌아가고 있는데, 참나와 이견이 없습니다. 참나가 그렇게 강할 때는요, 에고가 작동을 하더라도,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더라도 참나랑 이견이 없습니다. 그때는 참나의 확장이에요. 에고가. 그런데 이 참나로부터 조금이라도 거리감이 생기면서부터 에고가 자기 목소리를 내죠.

 

그러니까 에고를 버릴 게 아니라 에고가 자기 목소리를 낼 때마다 참나로 잘 누르는 게 답입니다. 노자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백성 중에 누가 욕망을 부리는 놈이 있으면 내가 통나무로 눌러버릴 것이다.] 그때 말씀드렸죠? 제 노자강의 때 했었죠. 통나무로 어떻게 하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통나무가 참나를 말합니다. 쪼개지지 않은 원목, 순수한 우리 의식. 순수의식으로 눌러버리겠다. 에고를 없애는 게 아니라 에고가 잡음을 내면요, 에고가 자기만 살겠다고 목소리를 낼 때마다 누가 눌러줄 게 아니고 자기가 그렇게 해야 되는 겁니다.

 

통나무로 눌러 버리세요. 노자에 나온 것처럼 참나로 눌러버리세요. 그러면 에고가 참나의 뜻에 맞추는 게 수행입니다. 에고가 참나에 이견을 보이지 않게 하는 게 수행이에요. 그래서 어디까지 가면 우리가 아는 사대 성인들은요, 에고를 다 조절 잘하신 분들입니다. 에고를 없앤 분들이 아니고요.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나요? 내 안에, 나라고 하는 건 에고입니다. [예수님의 에고 안에 아버지 있고 아버지 안에 나 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되요. 이렇게 서로 이견이 없어야 되요. 투명해야 되요. 부자간에. 에고는 자식이고 참나는 아버지입니다. 뿌리니까요. 부자간에 투명해야 됩니다. 모녀간에 부자간에 투명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해하시겠죠? 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나요? [내 뜻대로 하지 말고 아버지 뜻대로 하세요.] 예수님의 에고는 뭐라고 다른 이견도 조금씩 있는 겁니다. 이견이 아주 없지는 않죠. 에고인 한에는. 그런데 아버지한테 맞춰버리잖아요. 요정도 성숙한 에고. 공자님이 뭐라고 하셨냐하면 從心所欲不踰矩종심소욕불유구. 여기서 마음 가는 데로 했는데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즉 에고가 하자는 대로 다 해 봤는데 참나에 어기지 않더라. 에고가 얼마나 성숙한 겁니까? 어리석은 에고는 엄마가 분명히 안 사줄 텐데. “나 저거 갖고 싶어. 나 이거 갖고 싶어.” 다 얘기해요. 노련한 애는 어떻게 얘기합니까?

 

저걸 원하긴 하지만 엄마 뜻대로 하세요.” 요정도 찔러보면 많이 찔러본 거고요, 다음에 뭐라고 하나요? “얘야 네 맘대로 골라라.” 했는데 엄마 마음에 드는 것만 고르고 있어요. 이걸 에고끼리 보면 이게 하나가 지금 노예가 된 거지만, 참나하고 관계에선 노예가 돼야 됩니다. 에고가 노예가 돼야 되요. 참나와 관계에선 내가 종이 돼야 됩니다. 에고가 종일 때는 에고도 축복이고, 참나도 축복인데 에고가 주인 행세하면 다 망칩니다. 나의 인권은 어디 있느냐? 이러지 마시고. 그 인권이 참나까지 다 포함된 거니까. 에고가 이상한 소리를 하면 남의 인권을 해쳐요. 그러니까 에고를 적절하게 처벌해가지고 자기 자리를 앉혀야 됩니다.

 

그래서 논어나 중용이나 대학에 다 보시면 에고한테는 늘 경계하고 조심하고 공손하라. 끝없이 얘기합니다. 에고가 조금만 오판을 하고 건방지면 이상한 일이 나와요. 그러니까 아까도 얘기했지만, 평생을 선으로 살다가도 말년에 잠깐 정신 줄 살짝 놓으면은 오만이 싹트고, 에고가 이상한 짓을 합니다. 그러니까 에고를 평생 관리할 대상이고, 참나만이 에고를 제대로 관리할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답변이 됐나요? .

 

 

 

 

Q2. (04:48)

. . 설명을 한번 드려볼까요? 우리 마음을 계란처럼 생각하시고요, 흰자가 에고, 노른자가 참나. 일단 이렇게만 구분하시면 편하죠. 이 노른자를 유교에서 良心양심이라고 부른 겁니다. 맹자가요. 맹자가 쓴 말이에요. 맹자가 또 本心본심이라는 말도 써요. 본심. 본래의 마음, 양은 선량한 마음이라 해서 좋은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내 마음 중에 제일 좋은 마음. 그런데 이 양심을 좋은 마음이라는 단순한 의미로 쓴 게 아니라 오염되지 않는 마음이라고 쓴 겁니다. 맹자는. 그러니까 선천적인 마음. 후천적으로 가르치지 않아도 본래 너무나 좋은, 갖고 있는 탁월한 마음이 우리 안에 있더란 겁니다. 그래서 순수의식이라고 보시면 돼요. . 이래서

 

양심과 참나는 같은 거고요. 이 참나를 불가에서는 本性본성 그럽니다. 본래의 성품. 요 때 성은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는 참나라는 뜻으로 쓰고 있는 거죠. 본성. 본래의 성품. 佛性불성. 부처의 성품. 그런데 이거 하나만 구분해주세요. 유교에서는 마음이라고 쓸 때는 의식인데 유교에서는 유교에서 만약에 본성이라고 쓰면요. 요 때의 성은요, 마음속에 살아있는 원리를 의미합니다. 유교에서만 본성, 그 본성이 불교에서 쓴 말이면은 참나를 말한 거 맞고요. 참나는 의식이잖아요. 순수의식이거나 에고의식이거나인데 유교에서 본성이라는 거는요. 참나에 새겨져 있는 공식을 의미합니다. 참나의 속성, 순수의식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 있겠죠.

 

당장 말에도 이런 거 있죠. 순수의식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느냐? 상락아정_항상 되고 즐겁고 늘 나이고 청정하다. 속성들이죠. 요 속성들을 본성이라고 합니다. 그 참나가 가지고 있는 속성이라는 의미로 써요. 그러니까 유교와 불교는 조금 구분해서 보십시오. 불교에서는 본성이 곧 불교에서는 眞心진심, 一心일심 그러죠. 한마음 참마음 본성 다 같은 의미로 불성을 쓴 다면요, 유교에서는 심이라고 쓸 때는 마음이라는 거는 우리 몸의 주재하는 거니까 의식이 맞고요. 본성이라고 할 때는 그 마음속에 살아있는 성질, 법칙들을 의미한다고 보시면 돼요. 즉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양심이 하나님 자리. 성령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면, 본성은요,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 하나님이 따르고 있는 법칙들. 이해되십니까? 그러니까 유교에서 본성은 뭘까요? 인의예지에요.

 

본성 그럴 때는 인의예지를 의미합니다. 양심 그럴 때는 인의예지의 마음, 인의예지 그대로 돌아가는 마음. 그러니까 그런데 한 가지 헷갈리실 게 하나 있어요. 여기까지는 그래도 이해 잘 되시죠? 그런데 우리가 흔히 쓰는 양심은 요걸 이렇게 안 쓰죠. 당장에요 제가 만약에 사단 노트를 쓰라고 했다고 치죠. 사단이라고 하면요 네 가지 단서입니다. 단서라는 뜻이요, 요게 땅에서 이렇게 싹 난 거거든요. 싹이에요. 싹수가 있다. 없다. 싹을 보고 요놈이 어떤 놈인지 알거든요. 즉 네 가지 단서에 측은지심. 우리 마음에요 사양의 마음, 또 시비를 따지는 마음, 부끄럽고 불의를 못 참는 마음. 요 네 가지가 있는데. 요 네 가지 지금 이 양심일까요? 에고일까요? 사단은요?

 

~ 불쌍해하는 이 마음은 참나 아니지 않나요? “아 불쌍해. 아 열 받어. 아 부끄러워. 아 자명해. 아 찜찜해.” 요건 에고에요. 사단은 에고에요. 에고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요. 요거 구분하시겠습니까? 당혹해하시는 거 같은데. 사단이 에고라는 거 아시겠습니까? 참나는 부끄러워하고 그렇지 않지 않나요? 이상하지 않나요? “아우 측은해.” 참나가 그럴까요? “아우, 측은해.” 생각인데요. 감정인데요. 다 에고에요. 에고의 두 가지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에고 무시하시면 안 돼요. 지혜와 자비도 에고에요. 무지와 아집이 에고면 지혜와 자비도 에고죠. 속성상. 물어봤는데 모르면은 모르는 거죠. 무지한 거죠. 참나가 모른 게 아니고 그 사람 에고가 모른 겁니다. 그렇죠.

 

지혜니 자비니 다 에고입니다. 남한테 밥 한 그릇 해주는 것도 에고가 하는 거지. 하는 거는 에고가 한다고요. 요 느낌 아시겠어요? 즉 에고가 자기 뜻대로 움직일 때는 욕심이라고 하지만, 에고가 참나가 에고를 거쳐서 그대로 나올 때는 그것도 양심이라고 합니다. 양심은요, 참나도 양심이지만 작용할 때도 양심이라고 부르는 게 있어요. 뭘 양심이라고 하냐 하면요, 참나 뜻 그대로 하는 에고를 양심이라고 그래요. 참나도 양심이지만, 순수한 마음이라는 의미에서. 에고가 참나랑 딱 하나가 됐을 때 이견이 없다고 그랬죠. 그러면 참나가 , 불쌍해하자,”라고 했을 때 불쌍하다.”라고 에고가 외치면 그것까지도 참나의 그대로 마음이잖아요.

 

그러니까 에고가 하는 짓이긴 하지만 참나를 그대로 따르는 에고와 참나랑 등을 진 에고가 있습니다. 이게 힌두교에서도 두 가지가 딱 갈려요. 힌두교에서도 이거 정확히 얘기합니다. 우리가 가진 에고 중에 좋은 에고와 나쁜 에고를 나눠요. 그럼 수행은 뭐냐 하면요. 처음에 참나를 정확히 알고 찾으시면요. 견성하신 겁니다. 어느 수행단체에서도 돈오에요. 점수는 에고를 착한에고로 만드는 게 점수입니다. 그런데 돈오돈수파는 뭐를 주장하는 걸까요? 참나 찾았으면 됐지 에고는 관심 없다가 돈오돈수파에요. 그래서 그 에고들이 무섭습니다. 관리가 되지 않아요. 이런 사람 치료할 수 있을까요? 갸루상? 갸루상 같은 사람 치료하겠습니까? “난 사람이 아닙니다.” 하는 사람은요. 치료를 못 해요. 이해되세요?

 

몸이 아파요.” “몸 치료해 주세요.” 하면 몸을 치료해 줄 수 있는데. “어디 어디가 아파요.” “저 몸 없는데요.” “몸이 없데요.” “에고가 없는데요.”라고 주장하는. 돈오를 해가지고 잘못된 고정관념이 들어가버리면요. “난 에고가 없다.”고 생각해요. “난 에고가 아닌데요.” 갸루상 아닙니까? 치료를 어떻게 해요? 아니 건드리면 계속 무지랑 아집이 보이는데 에고가 없데요. 밥은 뭐로 먹느냐? 나는 참나래요. 밥 먹고 할 짓 다 해요. 자기한테 유리한 건 하나도 안 빼고 다 합니다. 그런데 물어보면 에고가 없데요. 이게 수행자를 아주 잘못된 함정입니다. 빠지기 쉬운. 돈오한 이후에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우리 학당에서는 어떻게 말씀을 드리나요?

 

돈오는요 참나를 정확히 아신 거는요. 정신계의 아이패드라고만 제가 얘기 해가지고, 갤러시탭이라고, 정신계의 스마트폰을 구입하신 겁니다. 돈오는 구입하신 거에요. 점수는요? 잘 쓰시는 거에요. 그런데 구입은 했는데 계속 전화 거는 데만 쓰시고 계시다. 계속 발각이 되는데 난 아니라고 우기신다. 분명히 전화만 걸고 있다는 게 포착이 됐는데요. 참나 깨쳐가지고 자기 마음 편한 데만 쓰고 계시다고 그러면, 남의 마음 괴롭히는 데 쓰고 계시다 그러면, 잘못 쓰고 계신 거잖아요. 돈오 이후에 점수까지 가야 되니까. 유교입장에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요? 본래의 양심을 찾아서 이런 사단을 펼친다고 설명할 수도 있어요. 돈오와 점수를.

 

사단은 에고가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단칠정론, 우리가 선밀히 따질 때는요. 사단도 감정으로 보고 따지는 거에요. 좋은 에고와 나쁜 에고를 가지고 사단칠정론이라는 거는 내 욕심부리는 에고와 사단이라는 참나 뜻대로 가는 그 에고, 이 두 개의 관계를 어떻게 볼 거냐. 가지고 연구한 겁니다. 율곡은요, 율곡의 주장이 이겁니다. 사단도 에고라는 거죠. 즉 칠정이다. 칠정 안에 사단 있다고 봐야 된다고 주장하고. 퇴계는 두 에고는 철저히 분리하자. 칠정은 그냥 에고, 사단은 좋은 에고 칠정은 나쁜 에고 딱 갈라서 보자. 율곡은요, 칠정을 에고를 대표한다고 보고, 사단도 에고의 작용이니까 칠정 안에 있다고 보자. 칠정이 사단 안에 있다고 보자는 율곡 학설과 칠정과 사단은 둘이 못 놀게 해야 된다. 찢어놔야 된다라는.

 

결국, 이거는 에고 안에서의 구분입니다. 용어의 차이지 결국은 내 감정 중에 참나에 맞는 것도 있고 어긋난 것도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불쌍한 사람 봤을 때요, “아이고 불쌍해하는 감정이 확 일어나는. 이거 분명히 에고잖아요. 내가 불쌍한 거지 다른 사람이 불쌍한 게 아닙니다. 지금 내 감정에 내가 못 이기는 거지. “, 열 받아.” 도가니보고 , 열반아.” 이러면 내 감정이죠. 그런데 그게 양심에 내면에 있는 양심에 합당하면 이것까지 양심인 거고, 합당하지 않으면 욕심인 겁니다. 과한 거에요. 그렇게 화낼 일이 아닌데 화내고 있으면 뭔가 욕심이 붙은 거에요.

 

내가 어렸을 때 어떻게 살았는데. 자기 경험이 들어가고, 그러니까 어떤 사건을 판결하는데 판사가요 내가 어렸을 때 당했던 그것까지 집어넣어 판결하면 안 되겠죠. 거기서부터는 욕심이죠. 그런데 공정하게 이거는 아니다.” 양심에서 얘는 이 정도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탁~ 얘기할 때는 참나가 그대로 부연 된 거죠. 그래서 참나는 에고를 통해서만 구현되기 때문에 에고가 참나랑 하나가 돼서 구현될 때의 마음도 양심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거 낯설게 아니신 게 노자는 이걸 뭐라고 했나요? 노자가요, 여러분 명상하시는 분도 이 논법을 그대로 쓰십니다. 노자가 이걸 무위라고 했습니다. 참나는 진짜 하는 게 없어요. 그런데 무위면은 참나만 무위인가요? 내가 남한테 선행하는 거 절대 무위가 될 수 없나요?

 

예수님처럼 왼손이 주고 오른손이 모르면 되지 않나요? 에고가 작동하되 참나 뜻 그대로 할 때는 에고도 무위라고 합니다. 노자에도 다 그렇게 돼 있어요. 그래서 이게 새로운 건 아닙니다. 에고가 참나 그대로 할 때는 분명히 한 게 있는데도 무위라고 그래요. 보시바라밀. 무상보시가 무위잖아요. 생각해 보십시오. 참나는 뭘 실제로 줄 수는 없어요. 참나는 육바라밀이 꽉찬 순수의식이지 줄 때는 누가 주나요? 특정에고가 좋은 마음을 일으켜서 줍니다. 보시를. 줘놓고도 내가 준 게 아니고 참나가 준 것입니다. 라고 해버리면 그 에고마저도 다 그대로 정화가 돼 버려요. 무상 보시가 돼버려요. 보시는 에고가 한 건데 참나 덕이라고 회향을 해버렸기 때문에 참나 그대로 난 한 것뿐이라고, 나는 거들었을 뿐이라고 하니까 그 참나 에고까지도 그대로 바라밀이 돼 버려요.

 

보시바라밀이 돼버려요. 궁극의 보시가 돼 버려요. 이해되십니까? 그런데 욕심으로, 만약에 에고가 참나는 전혀 동하지 않았는데 에고가 빨리 보시해줘야겠다. 그래야 내가 체면도 살고 뭐가 살겠다. 줘버렸어요. 그럼 이 에고는 보시바라밀이라고 안 합니다. 이 에고가 한 일을. 그냥 보시한 거고 포인트 좀 쌓은 거죠. 자기를 위해서 포인트를 쌓은 거지. 양심도 여기까지 좀 이해하시면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

 

 

 

 

Q3(17:10)

이번에는 영, 영은 노른자고요, 혼이 흰자면, 이게 껍질이 돼야 되나요? 육은? 육은 껍질이면 흰자가 혼? 노른자가 영. 이렇게 구분해보십시오. 우리가 흔히. 이거 구분하셔야 됩니다. 영혼 그러죠. 그럼 우리가 영혼이 영은 참나고 혼은 에고. 이렇게 분석하시면 안 돼요. 신령스럽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영혼을요 찢어서 얘기 하면은 영이 참나고 혼이 에고인 거고요. 우리가 흔히 영혼 그럴 때는 신령한 혼이라는 뜻이에요. 그냥 형용사에요. 혼이 신령하잖아요. 우리 육체보다 신령하지 않나요? 보이지도 않고 만져볼 수도 없는데 울고 웃고 다 하는데요. 그런 의미로 쓰는 겁니다. 영혼. 영혼을 굳이 찢어서 부르겠다. 하지 마시고.

 

그러니까 그냥 영계 그러잖아요. 영계가 참나의 세계는 아니죠. 그냥 영혼들의 세계라는 뜻입니다. 다양한 응용은 끝도 없이 다양합니다. 그래서 상황상황마다 잘 봐주셔야 되요. 정신 그러면요, 精氣神정기신의 줄인 말로도 쓰지만, 다르게 얘기하면 정밀한 신. 그냥 그런 뜻이에요. 형용하세요. 대게 정밀한 신. 우리 정신이 대게 정밀하다는, 영혼. 이렇게 쓸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저자가 이걸 쓴 사람이 어떤 의도로 썼나? 정기신의 줄임말로 썼나? 이거 파악하기가 어려워요. 그러니까 그 전후 문맥에서 봐야 되요. 무슨 의도로 이 말 하고 있나. 영혼 그러면 이게 참나와 에고를 말하는 건지. 그냥 혼을 말하는 건지.

 

~ 여기까지 하고 그럼 영은 뭐냐 하면 영은 뭐겠습니까? 순수의식이요. 양심이요.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단의 양심이 아니고 그거보다 뿌리로서 양심이죠. 그다음에 알아차림 이렇게도 부를 수 있죠. 자 이게 그냥 영이에요. 영의 특징은 뭔가요? 생각감정 오감이 없어요. 그런 게 없어요. 이게 육신 차원이 있어야 오감이 생기는 거고. 혼은요. 크게 세 작용을 합니다. 지성, 감정, 의지. 요걸 부려야 인격입니다. 요게 인격의 3요소죠. 이걸 갖춰야 인격이에요. 에고에요. 에고를 하나의 자아라고 보셔야 됩니다. 에고를 죽일 놈이렇게 보시면 안 돼요. 에고는요, 여러분이 현상계에 접속할 때 갖고 계신 아이디에요. 에고 없으신 분은요. 이 현상계에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현상계는 에고를 가지고만 들어올 수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 앞에 나타날 때라도 임시 아이디라도 갖고 나타나지. 얼굴에 점이 있든 뭐가 있든. 뭐하나 에고의 속성을 갖추고 나타나지 그냥은 못 나타나죠. 즉 우리와 접속이 불가능해요. 그러니까 아이디를 없애겠다고 수행하시는 분들이 전 이해가 안 됩니다. 내 계정을 박탈해야지. 열심히 수행해서. 똑같아요. 아이디 박탈된 거랑. 이 아이디 가지고 좋은 일 많이 하시라는 게 수행의 대승사상이고. 사대성인은 다 그 얘기를 하십니다. 그래서 혼이 있다는 거는 이겁니다. 그래서 뭐가 하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느냐하면. 이왕 이 얘기가 나온 김에. 영이 참나고, 혼이 에고는 이 속성을 가지고 있다. 생각감정 오감이라고 얘기해도 되겠죠. ~ 육신 물질이 있고요. 이렇게 있는데. 그러니까 우리가 영을 만나려면 혼 밖으로 나가면 육 밖으로 나가면 뭐가 있을까요?

 

세계밖에 없어요. 육의 대상인 세계. 뭐로 이루어진 세계인지도 알 수 있죠. 이 육신이 가지고 있는 감각기관이 뭐가 있나요? 색깔_눈에 상응하는 색깔. 소리. . 냄새. 또 뭐 있죠? 촉감. 이거밖에 없어요. 세계는. 그러니까 여러분이 하느님을 만나겠다고 밖으로 나가면 100% 실패하는 이유입니다. “나 하느님 봤어.” ? “좋겠네.” 하느님의 색, 소리, , 냄새. 이걸 본 거죠. 촉감. 그게 뭔 의미가 있습니까? 하느님의 거죽을 본 거에요. 하느님의 영을 봐야죠. 영을 보려면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얘기하신 게 있죠. [하느님은 영이시니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라.] 그냥 예배드려서 하나님한테 통하지 않습니다. 내가 혼을 내려놔야 되요.

 

내 지성, 내 의지, 내 감정에 다 내려놔야 돼. 이거를 가톨릭에서 묵상 잘하시는 분이 뭐죠? 무지의 구름 보면 무지로 들어가 버리라고 얘기하고, 무지의 구름으로 들어가라. 그래야 하나님을 만난다. 또 어두운 밤. 뭔가 어둠이 내려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런 것들이 살아서 움직이면 안 돼요. 그래서 이걸 내려놓고 참나를 만나는 거 자체가 경배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몰라하시고 몰라하고 순수의식으로 존재하시면 그게 하나님하고 진짜로 만나는 거고 그게 하나님한테 경배드리는 거에요. 내 에고를 바친 거에요. 하나님한테. “내 에고를 바치겠습니다.” 하고. “병들고 힘들고 수고로운 내 에고 바치겠습니다.” 하고 쉬실 수 있나요? 그게 진짜 예배인데. 이렇게 하나님 만나고 시작해야지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힌두교 경전 같은 거 보면 감동스러운 게 이런 경전 다른 경전만 보다가 밖에 있는 하나님을 막 얘기하는 경전만 보다가 힌두교 경전 보세요. [내 안에서 항상 하시고 빛나시고 지복이신 아트만께 경배드립니다.] 하고 시작해요. 내 안에 영한테 경배를 드리고 시작해요. 천도교도 그렇죠. 향아설이라고 아까 제사를 나한테 제사지내는 방법이 있어요. 물 하나 떠 놓고. 내 안에 있는 하눌님한테 제사 지냅니다. 하눌님하고. 그런데 하눌님하고 바로 만나는 거 이상에 물 떠놓고 이렇게 하는 거 이상의 하나님하고 바로 만난다는 거죠. 에고가 하느님을 만나야 그게 경배를 드린 거지.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모르는데 어디를 향하는, 누구를 위한 경배입니까? 말이 안 되겠죠.

 

그러니까 경배 제대로 드린다는 거는 예수님 말대로 하시면 돼요. 영과 진리로만 예배를 드려야 되요. 혼의 세계에서는 진리가 없습니다. 진리의 그림자들이 있지. 진리 그 자체. 영에만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우리가 에고의 작용을 멈추셔야 되요. 왜그러냐하면 보십시오. 여러분의 지성감성의지는 오염돼 있어요. 현상계에.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보고 들은 거에 오염돼 있지 않나요? 나 오염 안 됐다.”고 말하실 분 있나요? 성령 그대로만 판단하고 있다고 하실 분 있나요? 오염돼 있어요. 그래서 이걸 내려놓으시고 영하고 만나야 되는 겁니다. 요 얘기하나 드리면서 뭔 얘기를 아까 드리려고 그랬지?

 

많은 분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생각하시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 논리로는 안 맞는다는 거 아시겠습니까? 지성감성의지는요 혼의 영역입니다. 성령을 자꾸 이렇게 파악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아까 기도 얘기도 나왔지만, 기도드리고 하다보면 내가 기도드린 대상이 좀 더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대상이길 바라겠죠. 방편으론 좋은데. 쉬바신, 비쉬누신, 브라마신.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와이프가 누구고. 이렇게 얘기하면 인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제우스 와서 하는 일이 인간계 와서 여자들 밤에 납치하고 요즘 흉악범이랑 뭐가 다릅니까? 그런 짓을 자꾸 해요. 신을 인격으로 이해해 버리면요, 우리 에고 노름에 빠져버려요. 내 에고에 투영된 그 신의 에고적인 면을 가지고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짓을 하도 하니까 그리스 때 희랍철학이 처음 나올 때 소크라테스가 쓴 글에 그런 게 나옵니다. 처음에. 신들한테 경배드리는 사람들한테 찾아가서 신이 하는 짓 보면 맨 불륜에 뭐에 뭐에. 왜 경배드립니까? 정의가 뭡니까? 신이 하는 게 정의다. 신이 하는 게 정의다. 그럼 신이 불륜도 하는데요. 그럼 말이 탁 막히죠? 신이 하는 거면 다 정의입니까? 아니면 정의라서 신이 하는 겁니까? 이런 걸로 그 당시 희랍지식인도 헷갈리는 거에요. 진리를 갖다가 영과 진리가 안 되는 이유입니다. 에고의 놀음에다 투영을 해버리면 신이 다 왜곡 돼버려요. 인간적이 돼버리면 믿고 따를 수가 없어요. 제우스 하는 그대로 사십시오. 이 말 어떻게 해요? 그럼 밤에 돌아다니지도 못하게 될 텐데요? 세상이? 말이 안 되죠.

 

이게 힌두교도 그렇고 그리스 쪽도 그렇고 기독교 쪽도 그렇습니다. 성령이 나한테 울고 웃고 화내시고 이런 분으로 생각해요. 자꾸 여호와가. 이러니까 자꾸 개인적인 에고적인 신앙으로 가는 겁니다. 여호와가 나한테 너만 예쁘데. 너 내가 제일 예뻐한데. 이런 거 듣고 싶어 하는 얘기들을 자꾸 들었다라고 얘기를 시작하면 우리입장에선 뭐라고 판단해야 되겠습니까? 에고 놀음에 빠져 있구나라고. 그런 생각 자체를 내려놔 봐. 그래야 성령을 바로 만날 거야. 이 말이 나오지 않을까요? 속에서? 이런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꾸 인격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하지 마세요. 성령은요. 영은 혼을 초월해 있는 존재라서 귀한 거고, 그 영이 혼을 통해서 얘기할 때는요. 내 목소리로 들린다는 것도 아셔야 돼요.

 

혼이 아무 작용을 안 하는 자리가. 영이 하느님이 무능한 자리가 아니죠. 별짓 다 하시죠.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내 혼으로 하여금 그런 소리를 듣게 하고 그런 말도 듣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이 들리고 소리가 들리고 모습이 보이고 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내 에고를 통해서 본 거고 그 너머에 있는 신 자체를 바로 느낄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안 그러면 보고 듣고 하는 거에 빠져버리면 에고의 세계에서 자기가 신을 만들어 버려요. 인간은 다 영성이 있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가 신을 갑자기 얘기하다가도 그건 제 에고가 느끼는 신이지. 이 순수한 영 자체는 아니잖아요. 이런 걸 서로 감안하면서 얘기를 나눠야만 정확한 얘기가 되고. 자명하게 영혼육에 대해서 이해하는 자체가 이 우주 전부이기 때문에 우주를 이해하는 게 됩니다.

 

우주도 혼의 세계, 물질계, 이런 정신계. 그다음에 순수한 하느님의 세계. 이것 말고 다른 게 있을까요? 이해되시죠?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만날 수 있는 세계라는 건 육신과 같은 세트입니다. 재미있는 게 이 몸하고 요 세계는 한 세트에요. 이것도 아셔야 되요. 이거 한 세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육신을 버리고 죽으면요. 혼이 지닌 몸과 한 세트인 세계로 갈 겁니다. 꿈속. 여러분 꿈속에서는 꿈의 세계죠. 이해되십니까? 여러분 의식해 보세요. 이 몸하고 이 세계는 한 재료죠. 꿈을 꿀 때 꿈의 몸은요, 꿈의 세계랑 한 재료죠. 다 이런 공식이라고 아시면 우리가 죽은 뒤에 사후세계 간다면 가정을 해보죠.

 

어떤 세계일까요? 혼하고 한 세트인 세계겠죠. 물질계가 아니라. 그래서 우리는요. 이 영이 천부경에서 나온 게 이겁니다. 천부경에서 이걸 본심이라고 하죠. 본심이 태양처럼 광명한데 用變不動本용변부동본. 혼이나 육이나 이런 작용들은 계속 변하는데 뿌리는 절대 안 변한다. 여러분은 끝없는 우주여행을 하시는 겁니다. 이 변치 않는 영의 신과 하나인 이 자리에 뿌리를 두고 혼과 육은요, 다양한 세계를 겪으시면서 계속 우주를 돌아다니시면서 에고를 성숙시키고, 남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그래서 홍익인간 이상의 답이 없다는 게 이런 겁니다. 참나 찾아야지가 답이 아니고요. 홍익인간 해야지가 더 큰 이념인 이유가 인간은 이게 실존이기 때문에 나는 죽으나 사나 우주를 계속 여행하는 우주여행자에요.

 

나를 성숙히키면서 나를 도와주면서. 그래서 홍익인간 이상의 다른 답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대승불교가 나오는 겁니다. 자리이타 말고는 없더라. 자리이타란 말 자체가 에고의 세계를 인정한 거 아닌가요? 나도 살고 남도 살려줘야 된다. 참나에선 하나니까. 이런 큰 식견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시는 분이 대한민국에 많다면 대한민국 자체가 바뀌어 버리죠. 그러기 전에는요, 남 믿지 마세요. 저 사람이 해결해 줄 거요. 역사상 그런 일은 있을 리도 없고, 하느님도 그거 못 해줍니다. 내가 바뀌어야지. 내가 내 안의 영을 찾으시고, 영에서 답을 해결해가지고, 혼을 영으로 성화시킨다고 그러죠. 정화 시키는 분들. 예수님이 이런 말도 하셨습니다.

 

[너희는 빛의 자녀이니] 혼은 자식이라고 그랬죠. 빛의 자녀니. [빛처럼 온전해 져야 된다.] 뭐가 온전하지 않나요? 지금? 영이 온전하지 않은 게 아니죠. 혼이 온전하지 않죠. 혼과 육이. 육이 이상한 짓을 하고 혼이 맨 이상한 생각하고요. 그러니까 뻘 짓 안 하고 뻘 생각 안 하는 게 혼육을 온전하게 하는 이치입니다. 뭐 이 정도 말씀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Q4, (30:29)

. 맞습니다. . 정확하십니다. 그러니까 좀 더 부연하자면 영성지능이 뭔지 아시겠습니까? 지능을 우리가 누구한테 따지나요? 혼한테 따져요. 혼이 뭔 재능을 갖고 있느냐는 거죠. 공간지능, 신체운동지능_남이 뭔가 동작을 보여주면 금방 따라 해요. 주먹을 이렇게 때려야 해도 누군가는 계속 이상하게 때릴 수 있거든요? 신체운동지능이 떨어지니까 몸이 내 맘대로 안 움직이는 겁니다. 누군가는 전혀 노력 안 기울이고 배우지 않았는데 금방 따라 해요. 그러니까 안 배웠는데 금방 따라 하는 게 재능입니다. 지능이죠. 그게 지능이에요. 그래서 신체운동지능이 좋은 친구는 그냥 해요. 그런데 남이 그걸 만들려면요, 업을 쌓아야 되요.

 

그래서 이게 불교 인과론이 또 일리가 있는 게 왜 누구는 그게 돼서 나오고. 누구는 나와서 열심히 해도 그게 안 되느냐는 거죠. 평생을 해도 그게 안 될 수가 있어요. 누구는 쉽게 이걸 하는 데, 쉽게 그거 하려면은 어머 어마한 세월을 기울여 내가 만들어야 되는. 이게 인과론으론 설명이 되죠. 인과론으론. 이건 전에 하던 사람이 오면 쉽게 되고. 넌 이번에 처음 하나보다. 처음 춤을 추나 보다. 춤이 잘 안 추어지면요. 모차르트는 음악을 하다가 왔나 보죠. 음악이 금방 되죠. 이런 식으로. 그럼 이런 여러 지능이 있는데요. 다중지능이론에 8가지를 쳐요. 인간친화지능_금방 사람 사귀는 것도 지능입니다.

 

상대방이 보내는 무언의 어떤 그런 신호들을 금방 읽어낸다는 겁니다. 마음까지. 표정, , 말의 뉘앙스, 금방 읽어내서. 그러니까 말만 가지고 말의 뉘앙스를 금방 읽어내는 것은 언어 지능이 있어요. 언어지능. 그다음에 수학지능. 계산을 금방 논리적으로 잘 풀어내는. 그런 사람들은 복잡한 수식을 봐도 금방 질서를 찾아내겠죠. 그런데 국어, 국어 잘하는 친구. 수학은 못하는데. 언어지능만 높은 겁니다. 말은요. 논리 수학지능이랑 뭐가 다르냐 하면 말은, “밥 먹었느냐?” “~.” 이 말은 어마어마한 뜻이 담겨있지 않나요? ~. 이걸 못 읽어내면요, 논리수학지능만 개발된, 이과 취향이 문과 취향이란 다른 이유가 딱 떨어져야 되는데 애매한 것들이 많아요.

 

언어들은 진짜 애매해요. 문맥에 따라서 읽어내야 되는 게. 그러니까 문과지능은 이거죠. 언어 지능이 있어야 다양한 뉘앙스를 금방 읽어낸다는 거. 그래야 글을 읽어낼 수가 있어요. 그런 언어지능. 다 틀립니다. 자연지능, 자연관찰지능, 자연물을 보고 금방 질서를 발견하는. 수식도 아니고 자연의 움직임에서 금방 찾아내는 지능이오. 그러니까 파브르가 곤충기를 쓰는 것처럼요. 곤충이나 뭔가 실험을 잘하는 과학자들이 이 지능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자연은 현상만 보여주는데 현상을 보고 법칙을 찾아내는 지능을 말해요.

 

공간지능은 건축가나 미술가한테 필요하고요. 공간을 빨리 파악 못 하면 길을 못 찾죠. 공간지능이 떨어지면 뭔가 배치가 잘 안 돼요. 청담동하고 압구정동이 배치가 잘 안 되어서 이쪽 가면 뭐가 있을까 해서 가보면 딴 동네가 나오고. 이런 지능들. 신체운동지능. 음악지능. 모차르트가. 대충 다 나왔죠. 이런 지능들이 있는데. ~ 또 하나 있죠. 자아 성찰지능. 이 지능이 없으면요, 지능가지고 실험하는 걸 봤더니 이 지능 중에 제일 잘하는 지능이 있고, 강점이 되는 지능이 있고 약한 지능이 있겠죠. 단점이 되는 지능.

 

이 강점이 되는 지능들을 개발하고 더 개발하고 단점을 보완하는 게 지능을 잘 관리하는 핵심 요결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보면은 자기가 제일 잘하는 지능 세계가 자기하는 직업에 맞는 사람들은 불만이 없어요. 자기 직업에. 자기가 남보다 쉽게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먹고 살고 있는 거니까요. 거기서 명예도 얻고 돈도 얻고 있으니까. 그런데 자기가 잘하는 이 세계랑 안 맞는데 가 계신 분들은 계속 불만이 있어요. 양심이 알고 있어요. 내가 지금 잘못된 자리에 있다는 걸. 그러니까 내가 갖고 있는 재능이랑, 재능은 내가 갖고 있는 거죠. 지금 내가 처한 환경이 전혀 맞지 않다라는 걸 계속 자각을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요게 하나가 중요하고. 자기가 맞는 지능으로 가야 그 불만이 사라진다는 거 하나랑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 지능에서. 또 하나는 크게 성공한 달인이 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지능 중에 자아성찰지능이 없이 달인이 된 사람은 없더라는 거에요. 김연아나 누구처럼 금메달을 딴다거나 뭐 하나 할 정도로. 일가를 이룰 정도가 되려면 자아성찰 지능이 있어야 되요. 자아성찰은 자기의 객관적 위치를 정확히 알고 반성할 수 있는. 자기의 잘잘못. 반성하는 지능이. 영성지능에 제일 가깝습니다. 자아성찰지능이. 자기를 반성하는 지능이에요.

 

그래서 자아성찰 지능이 있는 사람은요. 누가 아부해줘도 좋아하지 않아요. 내가 나를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나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요. 그런 사람들한테 가서 막~ 아부해봤자 저 자식! 뭘 노리고 저러나?” 오히려 안 좋은 소리 듣습니다. 사람 봐가면서 해야 돼요. 자아성찰지능은 자기가 자기를 너무 객관적으로 봐서 문제인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그 지능이 있어야 그 금메달 따죠. 자길 정확히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8가지 지능인데요. 저는 제가 채근담 쓴 책에도 있지만 가운데 영성지능을 박아놔서. 제가 다 그려서 써놓은 채근담 책에 해 놨어요. 예전에. 그런데 최근에 영성지능이 아홉 번째 지능, 영성지능해가지고 다큐에서 했더라고요.

 

그래서 내용도 거의 제가 써 놓은 거랑 유사해서 다행이다 했습니다. 제가 이상한 얘기 써놨으면 찜찜하잖아요. 그 영성지능이란 이런 겁니다. 찜찜해하는 지능이에요. 다른 말로. 사단. 양심을 얼마나 쓰고 사느냐에요. 알고 쓰고 하는 지능. 그래서 영성지능은 철학지능이고 도덕지능이에요. 영성지능은 다른 지능이랑 다르게 다른 건 다 재능이라고 부를 수가 있어요. 다른 8가지 지능은 혼이 가진 8가지 지능은 재라고 부른다면 동양에서 그 마지막 9번째 영성지능은요. 덕이라고 부를 요소에요. 틀려요. 그래서 도덕지능이에요. 즉 인간친화지능이 아까 사기 치려고도 쓸 수 있지만, 남의 마음을 금방 읽어내는 지능인데.

 

이 영성지능은 우주에서 인간이 어떤 의미인가? 인간끼리는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삶인가. 이걸 아는 지능이기 때문에 당연히 인간친화지능이 높은데 영성지능이 높으면 높을 겁니다. 그런데 다르죠. 그 재능을 어디다 쓰나요? 이 둘 관계가 더 나은 방향으로 쓰는데 인간친화지능만 높다면 재주만 좋다면요? 사기 치는데 쓰겠죠. 이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영성지능이 엄청 중요합니다. 그래서 양심을 얼마나 알고 하느냐 하는 지능입니다. 얼마나 쓸 수 있는가 하는 지능이라고 보시면 돼요. 이해하고 있고 쓰고 하는 지능. 그래서 정신계에서 1지보살, 2지보살, 3지보살. 이렇게 불교에서 경전에 나온다면 그거는요, 영성지능으로 밖에 나뉘지 않습니다. 다른 거로 나눌 근거가 없어요.

 

불교에서도 뭐라고 하나요? 정확히? 육바라밀을 더 잘한다고 합니다. 그럼 육바라밀이오? 보시_베풀고. 계율 지키고, 인내하고, 지혜롭고, 마음의 평정심 유지하고. 육바라밀 다 그건데요? 그걸 더 잘할수록 영성지능이 올라가는 거고, 그게 123지보살해서 정신에서 태권도 바둑 단처럼 9단까지 10단까지 계산을 하는데 다 그거로 계산합니다. 그럼 그게 뭔가요? 참나가 19단이 있을 리가 없죠. 전지전능한데. 돈오만 하면 미쳐버리는 이유가 참나를 찾으니까 너무 좋아가지고 미쳐버리는데, 잠깐 미쳤다가요. 삼매에 미친 거죠. 황홀경에 미쳐있다가 나를 탁 돌아보면 무서운 걸 알아냅니다.

 

혼이 그대로 있다는 걸 알아내요. 여전히 돈 여자에 환장하고 있는 내 자신이 있다는 걸 알아냈을 때, 진짜 그때 수행이 시작됩니다. 그걸 못 보고 있을 때는요. 정신이 없을 때요. 참나가 너무 어두운 길 갔다 갑자기 빛을 보면 눈이 부셔서 눈이 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시 시야가 안정되고 보니까 내 처지가 그대로 있다는 걸 알아내요. 그게 1지 보살이에요. 그래서 2지 보살은요. 혼이 양심을 좀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노력하고 해서 234지에서 7지에 올라가고 하면 7지 보살이 되면 불가에서 성인이라고 표현하는데 그정도 되면 양심을 거의 영을 구현해요. 거의 영 대로 살아요. 7지 보살까지 가야. 그 전에는 하다가 말다가 하다가 이상한 짓 하다가 이게 계속 반복됩니다. 이렇게 어려운 길입니다.

 

그러니까 혼을 닦는다는 게 어려운 거지. 영을 찾는 거는 지금 우리 학당만큼 쉽게 영 찾게 해 드린 데 있나요? 그런데 왜 제가 이러냐 하면 영 찾는 거 빨리 찾으셔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다음이 진짜가 시작되기 때문에. 나의 인격을 개조하는 작업이 시작돼요. 어떤 명상가들이 서양에서 도는 명상들은요. 다 이거 돈오하면 끝이라고 주장하는 데가 많기 때문에 [명상은 인격을 바꾸는 게 아니다.] 하고 시작해요. [인격 바꾸려고도 하지 마라. 그냥 참나를 알고 참나와 하나 되면 끝이다.] 요런 말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 옆에 가지 마세요. 여러분한테 괴롭히실 겁니다. 본인은 에고가 없다고 생각해요. 더 무섭죠. 이해되십니까? 그중에 자질이 좋은 사람들 영성지능이 낮아서 그래요.

 

영성지능이 높으신 분이 만약에 깨어나신다면 그렇게 절대 얘기 안할 겁니다. 주변을 훨씬 더 평화롭게 만들고 주변 사람들을 도와줄 겁니다. 그게 영성지능차이에요. 그래서 혼의 등급의 차이. 영성지능의 차이라고 보시고 여러분이 공부하실 것도. _참나를 알고. 영성지능_참나에 대해서 더 이해하고 더 표현하고 하는 능력이 더 높아지시기만 하면 누구나 큰 성인들이 되실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

 

 

 

 

Q5 (40:35)

간단합니다. 무의식이 어려운 게 아니고 참나냐? 에고냐? 구분이 명확해야 되겠죠? 참나는 뭡니까? 나와 남이 하나인 납니다. ‘라는 건 똑같은데요. 여러분이 라고 말할 필요도 없고 라고 느끼시죠? 내가 있다는 걸 아시죠? 그런데 그 라는 느낌이 남하고 구별돼있는 느낌이신지. 아니면 남하고 나를 나눌 수 없는 라는 느낌이신지. 그것만 차이입니다. 그게 참나와 에고의 차이에요. 같은 인데. 그래서 에고마저도 참나의 작용이라고 하는 겁니다. 참나가 없이. 라고 하는 우주를 나로 여기는 그런 라는 존재감이 없이는 어떻게 작은 나의 존재감이 있겠습니까? 제약된 라는 느낌인데요.

 

그러니까 그게 우리 몸과 코너에 갇혔을 때는 제약된 라는 느낌이 나오는데, 거기서 벗어났을 때는요. 즉 여러분이 [모른다] 하셔가지고 이름만 딱 내려놓고 계시면 [요거 내 몸뚱인지 모르겠다.] [나 아무개인지 모르겠다.]하고 계셔보십시오. 지금. 무조건 모른다고 잡아떼세요. 모르시죠? 모르는지도 모르시죠? ~ 그런데 나라는 존재감이 있거든요. 그거는 신에 가까운 납니다. 참나에요. 지금 눈에 보이는, 저랑 여러분도 구분하지 마셔야 됩니다. 저 사람은 아무개고 자는 아무개다. 다 모른다고 해보세요. 보이고 들리고 하는 모든 것들을 나랑 구분하지 말아보세요. 그래야 신에 가까이 간다니까요.

 

이해되십니까? 그게 참나고 에고는 라고 하는 게 있어요. 남하고 구별되는 란 느낌. 그러니까 아까 무의식은요. 무의식은 누구의 무의식입니까? 무의식에는요. 어떤 습관이 저장되어 있지 안 나요? 누가 저지른 짓이 저장되어 있나요? 무의식도 에고 겁니다. 무의식이 다 에고다. 라고 말하기 힘들겠지만 그렇죠. 그렇죠? 이해되십니까?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는 게 내 거 아닌가요? 내가 저지른 짓 아닌가요? 그리고 그 무의식에 있다가 솟구쳐서 하라고 하는 게 다 나한테 하라고 하지 않나요? 내 무의식이 남한테 뭘 시키지 않지 안 나요? 나한테 시키지. 이해되십니까?

 

무의식도 깊이 들어가면요. 참나의 작용으로서 무의식이 있다면 참나겠지만, 그 업을 관리하고 하는 거는 여러분이 하시지 않지 않나요? 무의식에서도 쪼개볼 수 있겠죠. 굳이 쪼개보자면 뭐가 있을까요? 무의식에. 우주를 나의 모든 내가 저지른 모든 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를 관리하고 있는 그 무의식이라면 참나에 가깝죠. 그건 하느님의 작용이잖아요. 거기 담겨 있는 내용과 그걸로 인해서 내가 어떤 내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그 자리. 그런 무의식적 측면에서 볼 때는 내 거죠. 분명히 내 거죠. 그래서 무의식도 그렇게 나눠서 보면 다 갈라집니다. 불교에서도 무의식의 영역이 7식과 8식인데, 7식은 에고고 8식은 참나입니다. 아뢰야식이라고이건 신의 작용이에요. 참나의 작용이에요. 8식은. 무의식중에 8식은.

 

8식이 하는 일이 업보를 가지고 있다가 업보를 탁탁탁 적당한 때에 내 마음에 떠오르게 해가지고 내가 그 일을 당하게 만듭니다. 여러분이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거는요, 8식의 작용이에요. 원수를 내 앞에 딱 불러다 놓은 거는 8식의 작용이에요. 8식은 참나에요. 에고는요? 에고라는 무의식은요, 우리 내면에 의식 배후에 있지만 무의식이지만. 그거는 내 거죠. 내 의식하에서 작용하는 그런 무의식. 무의식도 다르죠. 하느님도 내가 못 느끼는, 영이 내 안에서 작용하는데 내가 못 느끼면 일종의 무의식이죠. 그런데 일반 무의식이랑 다르니까 초의식이라고 불러주는 거고.

 

이 초의식에 작용으로써 우리가 무의식이라고 여기는 게 있고요. 순수한 내 에고가 하는 짓인데 내가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인데, 내 마음의 작용인데 내가 의식 못 하는 걸 무의식이라고 한다면 그건 에고 거겠죠. 그렇죠. 그래서 그게 누구? 나한테만 귀속되는 작용인지 우주적인 작용인지를 분간해보시면 참나와 에고를 갈라보실 수 있을 겁니다. . 이렇게 말씀드릴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