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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무신론자 관점 유대인 역사 2 - 예리코 여리고성 전투

Buddhastudy 2023. 5. 24. 18:55

 

 

 

 

이집트에서 히브리인들을 데려고 나온 모세는

자신들이 정착할만한 지역을 탐색하는 것과 동시에

이동 경로에서 만나는 다른 세력들과의 경쟁을 펼치며

40년 정도 떠돌게 됩니다.

 

떠돌아 다닌 사람들의 수는 성경을 참고하자면

장정이 60만명 정도라고 하니

각각의 식구들을 모두 합쳐 가늠해 볼 때는

300 만명 이상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죠.

 

이에 대해, 실제로는 40년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으며

당시 팔레스타인과 람세스 2세의 전쟁 때문에

혼란한 시대속에서 히브리인들이 정착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을 거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이번 영상에서 다루는 난공불락의 성, 예리코 성은

모세의 사후, 그의 후계자로 임명된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이라는 가나안을 공격하는 곳으로

성경 중에서 가장 전투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유대인 역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예리코 전투를 다루는 것일 뿐이며

이에 대해 기독교적 판단과 비기독교적 판단은

여러분들이 각자가 편한대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또한, 예리코 전투가 실제 있었던 일이냐 하는 진위 여부에 대해서도

영상 후반부에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라는 인물의 본명은

구원을 의미하는 호세아였는데

모세가 새롭게 이름을 붙여주면서

주님은 구원이시다라는 의미를 지닌 여호수아가 됩니다.

 

모세가 정치가, 예언자 등의 성향을 지닌 인물이라면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탐군 12인중 하나로

군인의 성향이 더 강한 인물로

기원전 12세기 경의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죠.

 

여호수아가 리더의 자리를 물려받고서는

약속의 땅가나안을 차지하기 위해

본인의 군사적 특징을 내세워

유대인들이 전투에 능할 수 있는 전투교육을 실시하게 됩니다.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통하여 가나안 공격을 준비하여

마침내, 요르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쳐들어갔고

이에 가나안 주민들은 자신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 항전하게 되죠.

 

예리코의 방어는 생각보다 단단하여, 전투가 길게 이어지자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인들은 차차 전의를 잃어갔는데

이때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데요

성채를 일곱 번 돌고, 제사장이 나팔을 불면서

야훼의 영광을 외치면서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적힌 내용으로는

성에 들어가 성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에 대해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했으며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

은금과 동철 가구는 곳간에 두었다고 합니다.

이를 짧게 요약하자면

침공, 살육, 방화, 약탈이라고도 할 수 있죠.

 

 

그 중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미리 스파이로 숨겨두었던 라합과 그 일가는 살려둡니다.

 

라합이라는 이름은

기독교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는 서양문학에서

순수한 마음씨의 매춘부로 등장하는 이름으로 쓰이기도 하는데요

예리코 전투에서도 히브리의 스파이들을 숨겨준

세계최초로 기록된 매춘부이기도 하며,

이후, 그녀는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의 조상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마을에서 붉은 줄을 내린 성벽 부분만 무너지지 않아서,

라합 일가는 살아남았던 거죠.

 

 

구약성서의 12역사서 가운데 첫 번째 책인 여호수아서에는

모세가 죽은 후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을 공략하고 정복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의 연전연승은 하나님이 이스라엘편을 들어줬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며

이로 인해 여호수아는 야훼를 유일신으로 섬기게 되죠.

 

예리코의 전투라고 지칭되는 곳은 현재 팔레스타인의 제리코이며

한국 개신교에서는 여리고

천주교에서는 예리고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 전쟁은 어떠한 명분이 있더라도

예리코의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영토 침략을 당한 전쟁이었으며

그 당시 서로서로 잡아먹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한다 치더라도

잔혹하고 비윤리적인 행위였다고 할 수 있죠.

 

이 때문에 한국이나 외국에서도 교회에서는

저연령층에게는 구약 성경이 아닌 신약 성경부터 교육을 시키는 편이고

그 중에서도 예리코의 전투 부분은

더욱이 저연령층에게 교육하기가 어려운 문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구약에 나오는 기록들을

신약의 그리스도와 교회를 암시하는 예형으로 파악을 하는데

이를 예형론적 해석이라고 하는데요

좀 더 쉽게 풀어보자면

이스라엘 백성은 교회의 예형이고

홍해를 건넌 일은 그리스도 승리의 표징이라 할 수 있죠.

 

구약 성서의 예리코 전투를 해석하는 가톨릭 입장에서는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을 단기간에 모조리 말살한 것처럼 묘사했지만

이는 그렇게 과장해서 묘사한 것일 뿐

이것은 단지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한 이론적인 설명이었다고 합니다.

 

, ‘우상숭배를 지닌 원주민들만 없었다면 우리는 오염되지 않았을텐데하는 뜻이 담겨 있는 것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일을 기술했다는 거죠.

 

이처럼, 비교적 온건한 가톨릭의 해석과는 달리

정면 돌파를 시도하는 개신교의 해석도 있는데요.

 

20세기초에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나

예일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한 ‘R.A토레이라는 성경신학자는

전 세계에 영향력을 강하게 전도한 신학자로

예리코의 전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가나안과 예리코의 사람들 전체

즉 노약자와 갓난 아기까지 멸해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그만큼 그들의 민족 죄악은 심각한 것이다.

이 죄악은 너무나도 심각해서 현대사회의 암세포와 같은 것이었고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도덕적 암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셨다.”

 

성경에서는 이후로도 가나안 인들의 바알 신앙을 가장 경계하고 금하게 되는데,

좀 더 자세한 것은 추후 페니키아인의 역사에 대한 영상을 제작할 때, 정리해보겠습니다.

 

이에 반해, 비기독교적 의견으로는

앞서 언급했던 가톨릭과 개신교의 설명 역시

신앙을 믿는 사람들의 믿음을 확고하게 하기 위한

수단과 변명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죠.

 

에리코 전투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부풀어진 것인가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논란을 야기하고 있는데요

학계에서는 여호수아의 기록들과 고고학적 증거들을 조합해서 추론할 때는

이집트를 탈출한 수천명 정도의 유대인들이

토착민들을 완전히 멸하였다기 보다는

전투와 협정, 공존 등의 과정을 거쳐

고원지대를 중심으로 가나안 땅에 정착했다는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구약성경에 묘사되는 생동감 있는 에리코전투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견해에 따르면

시기상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죠.

 

 

고고학자들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걸쳐

예리코 전투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그곳을 발굴하기 시작했는데

기원전 16세기에 예리코는

이미 사람이 살지않은 폐허 상태라고 밝히게 됩니다.

 

이는 여호수아기의 배경으로 추측되는 기원전 14세기와는

200년 정도의 차이가 있으며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에 왔을 적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대학살극의 사실 자체가 없었다고 추정하고 있죠.

 

뿐만아니라, 당시 모세의 탈출에서부터

뒤이어 여호수아가 이끄는 히브리인들은

다른 도시를 공격해서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군사 집단이 되지 못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후의 행보를 살펴볼 때면

블레셋인들에게 지배받는 세월이 있는데

블레셋은 당시 바빌론이나 이집트 같은 강대국도 아닌 부족 연맹체로서

이러한 부족 연맹체에도 지배를 받았던 이스라엘의 전투력은

매우 약했을 것이라는 거죠.

 

여호수아의 강력했던 전투 묘사가 담긴 가나안 정복전쟁에 대해서

분석하는 의견으로는

역사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오랜 세월 동안 핍박받고 살아가던 유대인인들에게

그래도 우리가 옛날에는 어느 도시나 박살낼 수 있는 강력한 민족이었다라는

무용담을 적었을 거라 분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다른 분석으로는 예리코의 전투는

특정 의도가 담긴 묘사로 보기도 하는데요.

유대인들이 가나안 원주민을 모두 없애고 문화까지 모조리 없앴다면

순수하게 일신교인 야훼 신앙을 지켰을 수 있었을 거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함이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어쨌든, 에리코 전투라는 사건은

성서학자나 고고학자에게 관심의 대상이고

이는 종교적으로는 큰 파급력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예리코 전투 승리 이전에 유대인들의 조상인 히브리인은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했던 이집트 난민 출신이었는데

예리코를 탈취함으로써, 자신들의 조국을 얻게 된 셈이죠.

 

이는 현재의 유대인이 이스라엘을 차지하는 근원적인 명분이며

시오니즘의 당위성이 되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시오니즘이라는 것은

현대 사회까지도 뿔뿔히 흩어져있던 유대인들이

민족 국가 건설을 위한 민족주의 운동을 의미하는데

19세기 후반, 세계 각지에 흩어져있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독립 국가를 건설하자는 운동을 시작했었죠.

 

이로 인해 1933년까지 팔레스타인에

24만 명의 유대인이 모여들어 아랍인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수많은 갈등을 야기하게 되었는데

언젠가 이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깊게 다루어보겠습니다.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한창 무거운 이야기를 전개했는데

예리코의 성벽에 대해, 애니메이션 속에 나왔던

조금 가벼운 예제를 들어보겠습니다.

 

1995년에 가이낙스사에서 제작된 에반게리온은

당시 파격적인 연출과 스토리로 인해

이례적인 상업적, 비평적 성공을 거두게 되며

9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을 대표하는 작품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현재 30, 40대 애니메이션 덕후다 하시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봤을 법한 작품이기도 한데요

작품에는 교복을 입은 주인공인 이카리 신지

여러 명의 등장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중 또래의 여학생 아스카가 등장합니다.

 

둘은 보호자 아래에서 같은 아파트에서 동거를 하는데

하루는 밤에 보호자가 외출을 해서 집을 비우게 돼서는

남녀 둘이서만 집에 남게 된 거죠.

 

그 때 아스카가 신지를 보며

이 문은 이제부터 예리코의 벽이야, 절대로 넘을 수 없어라고 경고하죠.

신지에게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였지만

나팔소리와 유대인들의 함성소리만으로도 무너진 벽처럼

신지 마음 먹기 따라 결과가 달라지니

벽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의미가 담겨있기도 합니다.

 

오늘은 유대인 역사 두 번째 시간으로

지난 영상 유대인들을 이끌었던 모세의 이야기에 이어

여호수아의 예리코 전투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세계사를 정리하다보면

특정 사건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궁금증은 늘 갖게 되는데요

각 민족이 자국의 역사에 당위성을 부여하려고 하는 움직임은

항상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 영상은 유대인 역사를 다루는데 있어서

성경 관련 자료를 참고하였고

그중 시오니즘의 발단이 될만한 예리코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시오니즘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단지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 소수파만을 의미했지만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 내의 유대인들로 인해 주도되었고

이러한 활동 등은 세월을 거쳐 많은 사건들로 전개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세계적 국가들 사이에 민감한 주제로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