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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_[깨어있음_1단훈련] 1_9_3 명상의 핵심 '참나' 만나기(견성)

Buddhastudy 2013. 2. 3. 20:38

출처 : 홍익학당 => 윤홍식의 명상 이야기

  

생각은 없어지실 거에요. 그런데 나는 있거든요. 그게 참나에요. 이 느낌을 절대 잊지 마세요. 평소에도. 고요하시죠? 뭔 소리가 있나요? 거긴 번뇌도 없어요. 모르는데요. 일상에서 이 느낌을 계속, 이 느낌이 계속 흐르시면 견성하신 겁니다. 일상에서도 이 느낌이 계속 흐르시면 돼요. 틈날 때마다 이 자리를 자꾸 돌아봐 주셔야겠죠. 계속 주의 환기만 하시면 돼요. 컵을 봤어요. ~ 컵하고 빠져서 그 자리를 놓치면 견성에서 그 참나 안주상태가 아니고요. 컵을 보고 와~ 하는데도요. 그 내면의 고요함을 계속 느끼고 있다면 이게 動靜一如동정일여에요.

 

뭔 짓을 해도 그 자리가 늘 있어야 돼요. 그럼 견성하신 거에요. 동정일여만 하면 견성하신 거에요. 寤寐一如오매일여니 뭐니 자꾸 세우는데요. 다 상이고요. 참나가 늘 할 수 있으면 돼요. 깨어 계실 때만이라도 참나가 늘 함께하시면요. 주무실 때 그거 어디 가지 않아요. 평소에 내가 한 시간 지켜봐서 한 시간 동안 나랑 늘 함께하는지 확인하시면 사실은 견성은 어렵지 않아요. 그러니까 지금 이 느낌을 잡으시고. 이게 일반인도 다 견성하고 있는 게요, 생각이라는 게 계속 있지 않지 않죠. 하나가.

 

요놈이 나타났다. 사라지고요, 그다음 놈이 또 나오고요. 그다음 놈이 또 나와요. 그럼 요 사이를 딱 잘라보면 요 때가 있어요. 생각 없을 때 있으세요. 그렇죠? 계속 생각하고 계시지 않아요. 고민하다가두요 잠깐잠깐 고민이 멈출 때가 있어요. 왜냐하면, 생각이 계속 있지는 않거든요. 그럼 그 틈에는 뭐가 있을까요? 요 때. 나는 분명히 있었죠. 나라는 존재는 있었는데 생각은 없었어요. 그럼 그거 참나에요. 여러분 하루 종일 계속 참나를 보고 사세요. 얘는 늘 있죠. 늘 있는 자리인데 이대 얼핏얼핏 드러난다는 거죠. 존재가.

 

늘 있는데 생각에 가려졌잖아요. 지금. 그러다가 생각 사라지고 나면 나타나요. 생각 있다가 생각 사라지고 나면 나타나요. 그럼 요 잠깐 잠깐의 틈이 있어요. 내 자신을 만나고 있어요. 계속. 하루 종일. 그렇죠. 그냥 나는 절대 상을 세우지 마세요. 나는 별거 아닙니다. 그냥 존재감이에요. 지금 여러분 있다고 느끼시죠. 본인이 존재한다고 느끼시는 그 느낌은 생각 아닙니다. 생각 안 하셔도 그건 있어요. 존재감? 그죠? [모른다] 해보시면 돼요. 성함 모르시죠? 여기 어딘지 모릅니다. 저 누군지 모르고요. 그냥 그러고 계셔보세요.

 

요게 참나입니다. 순수한 상태잖아요. 하나도 안 보탰잖아요. 그게 참나에요. 생각 생각 끝날 때 우리는 계속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걸 찾아내신 분들은 이 생각 중에도 이 자리를 찾아내세요. 생각 중에도 있죠? 제가 말하고 있는 중에도 제 존재감이 있어요. 저는 그걸 느끼면서 그냥 살뿐이에요. 제가 말하고 뭐하고 해도요, 저는 느끼고 있거든요. 화를 내고 욕하고 있더라도요. 제 존재자리를 늘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죠. 그러면 견성이에요. 참나에 안착했다고 그래요.

 

그러면 가만히 있을 때, 일없을 때는 아예 생각 다 지우시고 그것만 보시고요. 일 생기면 일하시면서도 그 존재감을 놓치시면 안 돼요. 가부좌 틀고 이래야 수련되는 건 아닙니다. 이거는. 단학은 좀 그렇게 하셔야 되는데요. 참나 찾기 공부는 안 그래요. 일상에서 계속 지금. 참나가 움직인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나라는 존재감은 한 번도 끊긴 적이 없는데요. 잠을 자건. 꿈을 꾸건. 여러분이요. 잠을 주무시건 꿈을 꾸건 깨어서 생시로 돌아다니시건 요거 배후에 있어요. 나라는 존재감을 대주고 있어요.

 

내가 자고, 내가 꿈꾸고, 내가 울고 웃고, 하시잖아요. 요 나라는 느낌 계속 갖고 계시냐는 거죠. 나라고 말하진 않죠. 그냥 존재감이죠. [모른다]하시면 그 존재감 느껴지시죠? 모르실 게 아니에요. 모르신다는 생각을 안 하시면 돼요. 아시는 거에요. 내가 나를 왜 모르겠습니까? 어떤 모양일 거라고 생각하니까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모양도 아니에요. 지금 느끼신 그거에요. 이 느낌은 매일매일 달라질 수는 있어요. 하지만 그거에요. 아시겠죠? 요거 계속 느껴보세요. 이야기하다가도 느껴보시고요, 강의 듣는 중에도 강의 듣는 나를 느껴보세요. 그 자린 고요해요.

 

이걸 영혼육할 때 영의 자리입니다. 혼은 시끄러운 자리에요. 혼은요, 알고 떠들고 울고 웃고 그래요. 그런데 이건 안 그래요. 영은 존재해요. 성경에 예수님이 하나님한테 예배드릴 때 영과 진리로 하라고 그래요. 나머진 다 시끄러워요. 이걸론 예배가 안 됩니다. 내가 이렇게 고요함이 있으면요. 보세요. 여러분이 생각감정오감만 내려놓으시면요, 요기다가 생각감정오감을 넣어도 마찬가지예요. . 요걸 넣어도 마찬가지예요.

 

이걸 넣어도 그걸 바라보는 나기 때문에 예배드릴 때 하나님을 뵙고 싶을 때는 내 순수한 나를 보고 싶을 때는 요 생각 너머에 있는 나란 존재감만 느끼시면요, 이게 영의 자리라 여기에는 고요나 평안이나 행복감이 그냥 따라와요. 이건 하나님의 속성인데요. 요넘이 그냥 일어나요. 이것도 똑같습니다. 사랑하려고 하고요 정의로워지려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니에요. 그냥 내려놓으시면요. 여러분의 아주 초기화된 마음, 순수한 마음만 느끼시면요. 모든 게 퍼팩트해져요. 그래서 Rinpoche린포체분이 부처에 이르는 고속도로를 타신 거라는 거에요. 이걸 아신 분은 고속도로를 타신 거에요.

 

하나님하고 하나 되는 고속도로 타신 거에요. 이거 모르는 분 마음은 늘 시끄러워요. 왜냐하면, 늘 이것만 보이거든요. 요 생각 끝나면, 요 생각하고 있고, 이 생각 끝나면 이렇게 가고 있어요. 책으로 치면 글자만 따라 가고 있어요. 여백이 하느님인데요. 여백이 우리 순수한 마음인데 글자만 따라가고 있어요. 여백이 없는 거 마냥 사세요. 그런데 우리는요. 이 글자 다음에 이 글자 읽을 때 그 사이에 여백을 봐요. 계속 참나를 보고 있어요. 이해되시죠? 안 어럽죠?

 

이거 상식적으로. 어려운 얘기는 아니겠죠. 누가 들어도. 이거를 실제로 하시고 사시면 견성자입니다. 인도 가면 이거 이분들 생존해탈자라고 그래요. 왜냐하면요 살아서 천국에 살고 있거든요. 남들은 다 요것만 보는 사람이 지옥에 삽니다. 요상요상요상요상보면 지옥고입니다. 하나도 내 뜻대로 되는 게 없어요. 그런데 이 사이에 여백을 보고 계시는 분들은 평안합니다. 요 글자가요, 다 여백 안에 존재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늘 여유로워요.

 

그런데 이 글자에만 집착하면 울고 웃고 합니다. 요 내용에 따라서 울었다 울었다 하는데요. 이 모든 게 다 텅 빈 종이 안에서 일어나는 글자놀음이라는 걸 알면요. 여유로워요. 그래서 늘 평온하고 늘 초연하고 이런 게 하나님의 신성의 발현의 특징이에요. 방금 [모른다]하실 때 그 마음이 돼요. 그렇죠? 그러니까 하나님 마음이랑 멀지 않아요. 그 마음은. [모른다]만 계속하시면서, [모른다]를 습관적으로 하시는 게 아니고요 [모른다]했을 때의 느끼는 그 존재의 고요함. 그거를 늘 느끼시라는 거에요. [모른다]도 방편입니다.

 

[모른다]고 하는 이유는요, 그래야 생각이 놔져요. 막 들고 있는 이 글자를요, 잠시 놔야 여백을 볼 거잖아요. 그러니까 글자로부터 여백으로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우리가 [모른다]는 말을 하는 것뿐이에요. [모른다]고 그러면 우린 여백을 보게 되요. 그런데 그전에는 글자만 보고 있어요. 모르시죠? 편하시잖아요. 모르니까. 안다고 하면요. 골치 아파요. 이게 옳은가? 저게 옳은가? 이게 맞을까? 저게 맞을까? 시끄러운데요. 내려놓고 모른다고 있으면 편해요.

 

요게 무위입니다. 거기서 하는 사랑이 무위에요. 거기서는요. 이 자리를 정확히 아신 분들은 생각감정오감이 없느냐? 안 그래요. 생각감정오감이 다 있어요. 그러면요, 나라는 걸 정확히 알고 이 영과 영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은요. 생각을 하면 지혜로워지고요. 나를 띄고 생각하거든요. 감정을 내면 자비롭고 오감을 쓰면 정의를 실천하는 데 쓰지 절대 불의에 안 써요. 그래서 전지전능자비라는 신성이 가까워져요. 요거 하나 때문에요.

 

요게 안 나오면요. 내가 생각하는 지혜, 내가 생각하는 자비, 내가 생각하는 능력은요, 다 이거는 에고 놀음입니다. 결국, 돈 많이 벌고 싶고, 성공하고 싶고, 남위에 서고 싶고, 남보다 더 자비롭고 싶고, 남보다 더 지혜롭고 하는 게 붙어요. 요거 떼버린 요 마음에서 나와야 그런 비교나 이런 거 없어요. 그냥 나 같아서요. 남을 보면 나 같아서 지혜가 생기고요. 저러면 안 될 텐데 하는 게 보이고, 자비가 생기고, 실제 해주는 힘이 생겨요.

 

무위입니다. 요게 유위고요. 에고로 하면 유위고. 순수한 나라는 존재의 고요한 자리요. 지금 느껴보시면 알지만, 거긴 나라는 주장이 없어요. 나나 내 것을 안 세워요. 그죠? 그런데 여기서 한 생각 그걸 잊어버리면 내가 생겨요. 그렇죠? 또 느껴도 이게 진짜 실전 팁인데요. 나라는 존재 고요함을 느끼셔도요. 천리. 고 부분이 유교에서 천리라고 하는 건데요. 인욕부분이 있고 에고의 욕망이 있고, 천리 부분이 있으면요. 요게 50넘어야 됩니다. 그래야 내 뜻대로 돼요.

 

아무리 내면의 고요함을 느꼈다고 해도요. 본래의 이치가 내 안에서 돌아간다고 해도 요게 요정도 약하면 인욕이 이 정도면. 알아차림, 초연하게 하는데 끌려가요. 그 행동을 하고 있어요. 죄가 되는 행동을. 고요하긴 한데 하고 있어요. 습관의 힘이 더 강하니까. 무의식에서 나오는 그 욕망으로 하고 있어요. 그런데 50이 넘어가야 인욕을 제압해요. 그러면 고요함이 더 강해지니까 , 뭔 짓이야?” 이렇게 돼요. “나 배부르기 때문에 더 먹을 필요가 없어.”라는 게 나와요.

 

그래서 여기서 느끼는 고요함 행복 그런 초연함 때문에 자기 행위가 바로잡아져요. 이거 아니고는요, 그 존재의 고요함을 안 찾고. 이게 기독교로 말하면 성령자리인데 이거 없이 내가 에고의 힘으로 내가 선을 하겠다. 이런 게 유위입니다. 노자가 다 반대한. 그건 딱딱한 행위고요. 사람 잡을 행위에요. 결국에는. 피해자가 나와요. 자기도 피해를 보고요. 옳지 않은 선을 밀고 나가면요, 아까 오셨던 분처럼 뭔가 주위를 다 피곤하게 만듭니다. 자명하지도 않은 걸로요. 자기도 구제가 안 되는 걸 남한테 얘기를 하고 다니니까요.

 

그래서 요게 첫째입니다. 천리. 이게 무위에요. 이건 여기에 유위죠. . 유위가 무위를 압도하면 요 정도로 내 내면이 평화로우면, 불가에선 이걸 하나님 자리를 뭐라고 하냐 하면 다 똑같은 표현입니다. 불교식으로 常樂我淨상락아정이라고 그래요. (즐거울 )자입니다. _영원하고 이게 도덕경에 나오는 상이라고 하는 게 오늘 나올 거에요. 영원한 자리에요. 거기에는. _지복이고요. _나라는 존재가 가장 생생해요. 에고가 아니고요. 나란 존재감만 생생한 자리에요. _청정해요. 어떠한 오염이 안 돼요. 불순물에. 욕망에. 이 자리가 아니고서 어떻게 이걸 정화하겠습니까?

 

에고는 정반대입니다. 무상하고요. 고통스럽고 내 것이 없어요. 결국에는 실속이 없어요. 아무리 떠들지만요. 이 에고에 빠져있기 때문에 참나를 몰라요. 청정하지 않아요. 늘 오염돼 있죠. 그래서 우리가 상적으로 가는 것. 노자에서 이걸 習常습상이라 그래요. 상을 영원한 자리를 연습하기라고 그래요. 習常습상이란 용어를 씁니다. 같아요. 불가에서 이 상이라고 하는 거는. 영원한 자리는 도 아니고는 영원하지 않겠죠. 그래서 그 영원한 자리를 지금 맛보신 겁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고요한 그 느낌만 영원해요.

 

왜냐하면요 생각감정오감은 하루 종일 시끄럽거든요. 그 너머서 있는 그 자리. 지금 느끼시나요? 어떻게든 느껴보세요. 느낌이 희미해도 좋아요. 왜냐하면요 우리가 태양 못 봐도 돼요. 지금 태양밖에 안 떠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이렇게 환하게 볼 수 있는 건 태양빛이죠. 태양 빛 아니면 지금 더 추워졌을 거에요. 그러면 태양의 빛과 열기를 지금 몸으로 느끼고 있어요. 그런데 태양이 눈에 당장 안 보인다고 없다고 생각해요. 그게 우리 상태에요.

 

그런데 아시는 분은요. 아시는 분은 약간의 고요함도 그게 하느님에서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참나를 절대 안 놓쳐요. 한번 맛보신 분은. 그렇게 단계적으로 안 하셔도 되죠. 그것도 한 방편은 될 수는 있어요. 그런데 좀 번잡하고요. 막 계속 쪼개야 되잖아요. 그냥 무심하시는 게 좋아요. 그냥 아무 생각 없으신 상태. 주무시지는 않잖아요. 그렇죠왜냐하면요 이 몸을 아무리 쪼개도요. 차원이 다른 얘기라서 그래요. 그렇죠.

 

뭐냐 하면요 4차원 세계를요, 3차원에서 입자를 쪼갠다고 4차원을 알 수 있을까요? 요걸 아무리 분해한다고? 좀 다른 차원의 얘기에요. 하나의 방편은 되는데. 결국에는 3차원 전체를 통으로 무시하시는 게 답이에요. 제가 4차원가고 싶으면요. 3차원의 특징이 뭐냐 하면 부피감이잖아요. 입체감을 제가 잊어버려야 되요. 내 몸이 물질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리고 모른다고 계시면은요. 이 정신은 더 고차원하고 통해있기 때문에 제가 고차원을 느껴요. 왜냐하면, 뇌에서요 시공간을 못 느껴요.

 

그러면 제가 3차원에 있다는 걸 못 느끼게 돼요. 그러면 그때 느낀 차원대가 다르죠. 전혀. 3차원대랑. 고 느낌이에요. 이걸 통으로 잊어버리세요. 내 몸감정생각 아무튼, 순간순간 조금이라도 변하는 놈들은 싹~ 그냥 통으로 무시하세요. 그러면 고요한 내 상태만 나와요. 그런 거에 대해서 걱정도 안 하고 있는 내 상태. 고것만 영원합니다. 인간한테서 다른 게 있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이 다 똑같아요. 그래서 이 정신수련 가면은 이론은 세계 전체 종교가 서로 다른데요. 정신수련 가면 다를 수가 없는 게요. 사람 마음이 둘인가요?

 

심리학 연구할 때 심리학 연구가 그러면 여러 개 나왔어야지요. 사람의 마음이 다 다르다면. 심리는 하나거든요. 에고니 욕망이니 무의식이니 의식이니 하나에요. 우리 같으면 의식 무의식 그 너머에 초의식이 있어요. 초의식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 에요. 간단하게. 무의식은 멍하죠. 의식의 초점이 없어요. 의식은 초점이 있는데 너무 시끄러워요. 지금 초점이 있으시죠? 모른다 해보세요. 성함 모르십니다. 여기 어딘지 모르십니다. 팔다리가 내건지 남의건지도 모르십니다. 그때 의식은 있으시죠? 그런데 생각은 없으세요. 그럼 이게 무의식과 의식도 아닌 거에요.

 

생각이 뻗어 나가지고 않고 그렇다고 이게 멍하지도 않아요. 이 자리를 아시면요, 이게 초의식인데 의식을 쓰셔도 상관이 없어요. 왜냐하면요, 초의식은 무의식과 의식 안에 항상 있어요. 같이 있어요. 우리가 깊은 잠에 주무실 때 사실 은근히 의식하고 있으세요. 왜냐하면요 잠을 푹 주무셔도 제가 부르면 일어나실 겁니다. 뭐가 알아차리고 있을까요? 그게 초의식이에요. 지금 의식중에서도요. 아주 생각이 시끄러워도요.

 

~ 속 시끄럽네.”하는 걸 알아차리고 있는 데가 있어요. 고놈이 초의식이에요. 그러니까 항상 있어요. 항상 있는 그 자리를 우리가 의식을 못 하고 살아가는 거죠. 그걸 의식화만 하시라는 거에요. 생시에 의식하시라는 거에요. 오매일여는 무의식중에도 그놈이 있다는 걸 아는 거고요. 동정일여는 의식 중에 항상 있다는 걸 아는 것뿐이에요. 요놈이 늘 흐른다는 걸 아는 거지. 이거를 늘 붙잡아야 되겠다고 하시면 안 돼요.

 

이거는 본래 잠들지도 않는 자리고요, 본래 절대 사라질 수 없는 자리에요. 우리가 의식만 못 하고 있는 거에요. 우리가 의식만 하시면 돼요. 자꾸 의식하시라고. 그러니까 제가 만약에 선을 배우신다면 어디 기간을 정해놓고 스승을 모셔놓고 한다. 그러면 그 스승이 해 줄 일은요, 밥 먹다가도 지금 거기 보느냐고 해주고. 놀다가도 지금 거기 보느냐고 해주고. 이걸 한 일주일간 지적받으면 습관화가 돼요. 본능적으로 탁!! 주위를 환기시킬 거에요. 혼자서. 그러면 견성 하신 거에요.

 

그래서 출가 승려가 가니까 청소만 시키고 선을 안 가르치고요. 빨래시키고 청소시키고 하니까 뿔이 나가지고 스님 나 갈랍니다.” 하고 딱 나가려니까. 스님이 주먹 탁 내밀고 요거 봐라.” 그러니까 딱 보고 있었더니 평소에 계속 지적받았겠죠. 그거를. 알아차림을 딱 봤더니 탁 알아차려 지면서 그 주먹과 내가 둘이 아니면서 텅 빈 자리를 체험한 거에요. 아 그러고 나서 안 거죠. “~ 스님이 계속 가르쳐줬구나.” 알고 나면 알겠죠. 선문답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왜 나한테 도대체 선을 안 가르쳐줍니까? 하고 나가던 애한테 아무개야해가지고 탁~ 주먹 내미니까 탁 터졌어요. 얘기로만 들으면 드라마틱하지만 사실은 별거 아니에요. 계속 이렇게 알아차리는 걸 훈련하다가요. 결정적인 계기가 왔을 때 탁 이거 한 번 보라고 한 겁니다. 그럼 탁 터져버려요. 제가 그 부산 정모 때도 가가지고 여러분들 오셨길래 부산분들 어쩌다 한 번 보는 거니까. 컵을 하나 놓고 제가 이 컵만 보시라고 그랬어요. 컵하고 나랑 둘이 아님을 한 번 보시라고. 그랬더니 거기 몇 분이 깨어나셨어요. 깨어있는 상태가 쭉 흐르시고. 그러니까 어렵지 않아요.

 

우리나라 분들, 하면 해요. 왜냐하면, 이해도 돼야 되거든요. 머리도 좀 필요해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면요. 체험하면서도 몰라요. 내가 뭘하는지를 이해되시죠? 그리고 이렇게 하실 수 있죠. 이건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나는 죽음 불 수하고 하겠다고 하면 아이고, 그거 힘 빼라고 그래야 되요. 그렇게 될 일이 아니에요. 참나는 원래 밝은데요. 그냥 의식하면 그만이지. 그러니까 간장 짠지 알면 된다는 거에요. 아 짜다. 에이 요정도면 충분해요. 아 고요하다. 아 시끄럽다. 아 고요한 게 더 낫다. 요정도면 돼요. 이해되시죠? 그래서 선 얘기 하다가 나왔는데 노자도 다를 게 없어서요. 제가 말씀 좀 드렸어요. 진도 또 나가야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