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09)

즉문즉설_법륜스님(제136회) 올바른 독경

Buddhastudy 2011. 5. 6.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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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수행의 가장 요지는 현재에 깨어있어야 한다. 지금 여기. 지금에 깨어 있어야 됩니다. 지금에 깨어있는 방법으로 손님이 왔을 때는 반갑게 맞이하는데 깨어있어야 합니다. 딴데 쳐다보고 손님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는 거는 깨어있는게 아니거든요. 손님이 들어올 때는 아주 반가운 손님처럼 어서 오세요. 이러면서 반갑게 맞이하는데 깨어있어야 되고. 음식을 만들 때는 그 음식을 정성들여서 만드는데 깨어있어야 되고. 그 음식을 차려서 손님에게 갖다 줄 때는 그 갖다 주는 그 상태에 깨어 있어야 되고.

 

자기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깨어있어야 되요. 그것이 정진입니다. 따로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지장보살을 부르고 신묘장구 대다라니를 외우는 게 수행이 아니고. 고 상태에 깨어 있는 거예요. 운전하는 사람은 운전의 상태에 깨어 있는 게 정진입니다. 그러니까 장사를 하시니까. 장사하는 고 상황, 고 순간순간에 깨어있는 것이 정진이며 동시에 사업을 잘 하는 방법이오.

 

그러니까 정진하는 거 하고 사업하는 거 하고 별개가 아니에요. 손님이 오는데 손님은 안쳐다 보고 눈은 쳐다보데 마음은 딴 데 가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 있으면 그건 정진도 안 되고 손님도 제대로 마지못하기 때문에 장사도 안 되고 정진도 안 되고. 장사할까? 정진할까? 이렇게 늘 갈등을 일으키고.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오히려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딱 할 때는 오직 신묘장구대다라니에만 집중이 되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아까 여기 질문하듯이 온갖 번뇌가 들어오면 온갖 생각이 일어납니다. 누구나. 그럼 그건 다만 번뇌인줄 알면서 흘려보내야 됩니다. ? 번뇌가 생기나? 왜 집중이 안 되나? 이런 생각하면 안 돼요.

 

일어나는 거는 내가 하는 게 아니고. 무의식의 세계로부터 저절로 일어나는 거기 때문에. 내가 거기 상관 할 바가 없어요. 일어나든지 말든지 놔 놓고, 나는 딱 다라니에만 집중을 한다. 그런 힘을 가지고 아침에 나와서 가게에 일할 때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순간순간에 집중을 하는 거요. 손님이 딱 들어오면 눈을 딱 마주쳐다보고 반갑게 인사하고. 요렇게 딱 정성을 기울이는 거. 그게 정진이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우리가 다라니를 외울 때 다라니를 외운다. 염불을 한다는 것은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다는 뜻도 됩니다. 그러니까 염불을 하는 사람은 상대가 욕을 해도 나무관세음보살, 상대가 칭찬을 해도 나무관세음보살, 음식 맛있다고 해도 나무관세음보살, 음식 맛없다고 해도 나무관세음보살. 이렇게 경계에 구애받지 않는다. 나는 오직 다라니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이. 내가 지금 다라니를 외우면 다라니이외에 다른 거는 중요하지 않는 거요. 이렇게 염불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둘 중에 하나를 선택을 하시면 되. 다라니에만 집중돼서 누가 뭐라 그러든 거기에 신경을 안쓰는거요. 장사가 되든지 안되든 지도 신경 안쓰는거요. 그냥 되면 되는데로 안되면 안 되는대로, 적게 벌면 적게 번대로, 많이 벌면 많이 번대로, 칭찬하면 칭찬한데로, 비난하면 비난하는데로. 이렇게 경계에 끄달리지 않으면서 정진해가는게 있어요.

 

하나는 마치 거기에 깨있듯이 어떤 염불이나 어떤 한 사건이 아니고 일거수일투족에 자기마음의 상태에 경계에 늘 깨어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둘 다 똑같습니다. 내가 보니 사업을 하고 이렇게 하려면 오히려 고 상황에 깨어있는게 낫죠. 아침에 딱 일어나서 한 시간만 다라니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늘 다라니할 때 다라니에 깨어있는 그런 마음으로 가게 일할 때는 가게 일에 딱 깨어있는거요. 정신팔면 안되고.

 

그때 가게 일하면서 아들생각하고 가게 일하면서 딴 걱정하고 이거는 염불하면서 망상을 일으키는 거와 똑같은 거거든요. 그러면 어! 내가 현재에 집중해야지. 이렇게 돌아오시는 거. 그게 염불하는 거요.

 

Q2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까 미리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 그런 일이 닥쳐서 감내가 안될 때 질문을 하십시오. 그러니까 어떤 지금 답을 줘도 그 순간에 오면 아무도움이 안됩니다. 예를 들면 지금 총각이죠? 연애를 했어요? 지금 같이 잘 지내요? 헤어졌어요? 그 때 헤어지는 그 순간에 미련이 남을 때 그 옆에 사람의 조언이 별 도움이 됩디까? 안됩니까?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거를 공상이라 그래요. 공상.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만약에 내가 죽음의 순간이 온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그런 얘기. 왜냐하면 생각만하지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나는 안 죽는다. 이렇게 돼 있기 때문에. 그런 얘기 만 번 해봐야 소용없어요. 그래서 그런 것들의 실질적인 준비는 그런 거창한 생각을 하지 말고 지금 당장 부모님의 잔소리에 대해서 내가 초연할 수 있느냐? 내가 원하는 것이 안 되는 일에 대해서 내가 웃으며 넘길 수 있느냐? 요걸 갖고 먼저 실험을 해 보십시오.

 

고게 되면 그 보다 더 큰일 일어나도 될 가능성이 있고, 요런 것도 잘 안되면 더 큰일이 일어나서 안 되는 건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그런 공상은 안하는 게 낫다. 그래서 지금 내가 검증할 수 있는 거를 가지고 연습을 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그것은 그 친구의 이야기 일 뿐이다. 아니, 그 친구의 얘기니까 내가 그 친구의 얘기를 받아들이든지, 뭐 그 친구 생각이니까 너는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고, 나는 또 달리 생각을 하는 거고. 이렇게 받아도 되죠. 예를 들면 내 친구가 목사님도 있고 신부님도 있는데. 그들은 나를 위해서 늘 기도해 주거든요. 그리고 늘 하느님 품안에 와서 구원받기를 원하고. 그럼 저는 늘 감사합니다.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얘기하죠.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나를 위하는 마음이 있는 거고, 나는 나를 해탈시키는 길이 나는 또 나대로 있는 거고, 그들이 보살펴주는 신의 힘을 빌어서 정렬이 있는 것처럼 나는 보살행으로서의 그 보다 더한 정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생의 길이 그가 고기 먹는 게 건강에 제일 좋다고 주장한다고 내가 고기를 따라 먹을 필요는 없잖아요. 그것은 그의 생각이지.

 

그러니까 지금 얘기는 그 친구가 본인이 볼 때는 상당히 여러 가지 좀 친구지만은 좀 본받을 만 하고 존중할 만한 요소가 있기 때문에 친구의 얘기가 지금 나한테 영향을 주고 있거든요. 만약에 그렇지 안다면 이런 질문이 성립이 안 될 거에요. 그러나 그 친구가 내가 봐도 도덕적이든 정렬 적이든 비전이든. 어떤 내가 본받을 만한 걸 갖고 있는 것은 본받으면 되고.

 

또 이런 사상적인 거나 신앙적인 측면에서 내가 생각이 다르다면 그건 또 나는 내길 대로 가면 되고. 크게 구애 받을 필요가 없어요. 내가 목사님이 아주 정말 존경할 만하고 나보다 더 뛰어난 면이 있다고 내가 종교를 기독교로 바꿀 이유가 없잖아요. 그걸 섞으면 안 돼요. 혼돈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