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4)

[즉문즉설] 제938회 내가 지구의 희망이 되어 환경보호 하겠습니다

Buddhastudy 2014. 6. 13. 20:34

출처 YouTube

 

 

고래로부터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생존 위협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 위협을 방어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노력을 해왔습니다. 처음에는 홍수를 피해서 도망가고, 가뭄에는 물을 찾아 다녔지만 인간은 둑을 쌓아 홍수를 예방하기도 하고 또 댐을 만들어 지하수를 파서 물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자연은 우리 인간에게 이렇게 여러 가지 생존의 위협이 되기도 하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위협이 되는 것은 아주 일부분이고, 우리 생명의 근원이고 삶의 토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생명의 모든 에너지의 근원은 저 태양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또 그런 태양에너지를 식물들이 고정시켜서 우리가 그것을 먹게 되면 이것을 다시 연소시켜서 우리가 그 에너지를 활용하는데 첫 번째 공기가 있어야 됩니다. 맑은 공기가 없으면 우리는 하루도, 한 시간도, 어쩌면 10분도 살 수가 없습니다. 또 맑은 물이 우리 모든 생명의 원천입니다. 그리고 깨끗한 음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즉 저 태양도 공기도 물도 산천초목도 다 내생명의 근원이고 삶의 토대입니다. 그런데 비해서 자연이 우리에게 가하는 위협은 아주 일부분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생존의 위협에 대해서만 우리가 대응하다보니까 사람들은 자연을 정복한다. 이런 말이 옛날부터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이 생존의 위협을 막아내는 것. 이걸 우리가 옛날부터 개발이라고 하기도 하고, 개발이 이루어지는 것을 발전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이것을 문명사회다. 이렇게 말을 해왔습니다. 지금 이르러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느냐? 이런 개발이 우리의 생존의 위협을 막는데 그쳐야 되는데, 그것을 넘어서서 지나침으로 해서 어떤 일이 생겼느냐? 자연을 파괴함으로 해서 우리 생명의 터전을 망가뜨리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이렇게 되니까, 우리가 좀 더 잘살려고 노력한, 애쓴 결과가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이것은 마치 쥐가 쥐약을 먹는 것처럼 참 어리석은 짓이다. 이거요.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파괴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개발해서는 안 된다. 보존을 해야 된다. 이런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에서 보존이냐? 각성이냐? 이제 논쟁이 지금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이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개발을 해 왔는데, 그래서 개발이 더 많이 진행된 곳을 선진문명이다. 이렇게 말해왔는데, 이제 이 개발이 파괴에 이르게 되니까, 이 개발이 파괴라는 것을 알고 더 이상 파괴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개발해서는 안 된다. 보존해야 된다.

 

이 보존을 잘 하고 있는 곳이 어때요? 선진문명이 되고, 아직도 무차별 개발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후진문명이 되는 지금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 지구상에는 지금 3가지 상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개발이 너무 안 되어가지고 아직도 자연으로부터 위협받고 생존에 위협받고 있는 이런 미개발 저개발상태에 있는 국가가 있고, 그다음에 개발이 너무 지나쳐서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 상태가 있고, 이제 그것을 넘어서서 개발의 부작용을 알고 개발을 자제하고 자연을 보호하고 있는 이런 단계로 나아간 사회가 있다. 이런 얘기요. 우리 사회는 지금 어느 수준이냐? 아직도 개발의 중독성에서 못 벗어난, 아직도 개발만이 발전이다.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미 개발이 지나쳐서 파괴의 수준까지 이르렀는데도 이 개발의 위험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 각성된 사람들이 개발이 파괴에 이르렀다하는 것을 제기하게 되고, 아직도 다른 쪽에서는 아직 개발이 더 되어야 된다. 이런 것이 충돌하고 있는 현재 상태다. 앞으로 102030년 미래를 내다보면 개발보다 보존이 더 중요하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고, 또 과거 30년을 돌아보면 개발이 참~ 큰 성과가 있었다. 이런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는 개발이냐? 보존이냐? 하는 것이 개발의 관성이 그냥 남아있고, 개발의 부작용이 막~ 나타나는 이런 시점이라서, 만약에 여기서 개발이 지나치게 되면 파괴의 부작용이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를 수밖에 없는.

 

그러나 그것은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아직도 개발의 관성이 남아있는 이런 상태다. 그래서 우리가 개발이냐? 보존이냐?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거요. 저 개발된 미개발 된 상태, 생존에 위협받고 있는 상태에서는 개발이 이루어져야 하고, 개발이 지나친 부분에 있어서는 이제는 개발을 자제하고 보존에 힘써야 한다. 오히려 파괴된 부분을 도리어 복원해야 한다. 이런 데서 지금 오늘 관심은 이제 이 개발에 필요성을 얘기하던 시대는 지났고, 개발이 파괴에 이르렀다. 그래서 보존에 중요성을 우리가 각성을 해야 되는 이런 시점에 지금 이르렀다. 이런 얘기요.

 

이런데서 우리 사회에서는 이 두 가지 견해가 계속 충돌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어제도 제가 군산 새만금 때문에 시청에 가서 시장도 만나고, 거기 법회 갔다가 얘기 들으면서 이미 저질러서, 이미 거의 99% 이루어진 이 일을 지금 되돌릴 수는 없지 않느냐? 그러면서 이미 개발된 상황을 인정하고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새만금 논쟁을 통해서 이제 더 이상 한국에서 갯벌 개발이라 하는 것은 없을 거다. 그러니까 그 개발이 잘못됐다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서, 또 그것을 막는 사람들의 노력이 실패에 돌아갔다 하더라도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얻은 교훈은 뭐냐?

 

이제 더 이상 소위 간척이라고 하는 이 갯벌 개발이 무의미하다. 비효율적이다. 이것을 자각하게 되었다는 거죠. 이런데서 우리는 그 잘못된 것마저도 이제는 교훈으로 삼아서 발전에 어떤 동력으로 여기는 이런 것들을 이루어져나가야 된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수가 있겠습니다. 원자력 발전도 마찬가지죠. 우리는 원자력 발전을 꿈의 에너지라고 해왔지만,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서 위험을 경고해왔지만, 위험은 귀에 제대로 안 들리고, 그것의 환상만 우리 눈에 보이고 귀에 들렸다 이거야.

 

그러나 이제 후쿠시마 원자로가 우리 가까이서 터졌죠. 옛날에 러시아에서 원자로가 터지고 미국에서도 터지고 해도, 너무 멀리 떨어지니까 실감을 못 느꼈는데, 이번에 후쿠시마원자로가 파괴되면서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우리가 가까이에 느끼게 되었다. 그러니까 원자력이라는 게 안전성이라는 게 누구도 간구할 수가 없는 것이구나. 이런데서 우리 사회에도 원자력발전의 건설에 대해서 이제는 찬반양론이 팽팽히 맞서게 되었다. 그런데서도 보면 아직도 에너지가 필요한 나라, 북한이나 중국이나 이런 데서는 원자력 발전의 반대가 거의 없다면, 이미 상당부분 개발이 이루어진 일본이나 독일 같은 데서는 이제는 더 이상 원자력은 안 된다.

 

원자력개발 중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그 중간에 끼어있다 보니까 아직도 개발론자와 이제는 위험을 경고하고 청정에너지로 돌아가야 된다하는 그 사이에 지금 심각한 논쟁이 있는 이런 상태입니다. 이것도 우리가 1020년 미래를 보면 어때요? 당연히 이것은 위험이 더 중요시 되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죠. 이런데서 지금까지 우리가 발전이라고 생각해 왔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이 이제는 우리에게 상당히 위험한 것이 되고, 나쁜 것이 되고, 이런 상황으로 오게 되었다는 거. 그럼 여기에 뭐가 문제였느냐?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관계 윤리만 있었지 소위 인간과 환경까지 포함한 환경윤리가 없었다는 거죠.

 

그래서 인간 윤리만 가지고 옳으니 그르니 맞니 틀렸니 언쟁을 해왔는데, 이렇게 자연이 파괴되면서 그것에 부작용이 나타나면서 자연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어떤 원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이러한 환경윤리의 토대위에 인간윤리가 형성 되어야지 환경 윤리를 무시한 채 인간윤리만 얘기하는 것은 인간이 너무나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고, 인간이 너무나 오만하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데서 우리는 이제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존재, 또는 인간과 자연의 모든 존재들이 개별적 존재의 집합이 아니라, 서로 연관된 존재라는 거. 그래서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이게 연기법의 핵심이죠.

 

이것과 저것이 별개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은 상호연관 되어 있다. 그런데서 오늘날 연기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우리가 이 세계를 봐야 된다. 특히 환경윤리문제는 이제는 내나라 네나라로 나눌 수도 없다. 우리가 여기서 아무리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그런 생활을 한다고 해도 어때요? 중국에서 계속 개발이 이루어진다면 공기는 국경이 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중국의 오염된 공기가 우리에게 오게 되고, 만약에 중국에서 방사능이 분출되게 되면 우리에게 피해를 주게 되기 때문에, 이제는 이것은 내나라 네나라 국경을 갖고 논할 문제가 아니다. 이거야.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의논을 해야 될 문제다.

 

여기에서 심각한 논쟁이 되는 게 이미 개발된 나라들은 이제 개발을 그만하자하고 주장하고. 아직 개발이 덜 된 나라는 계속 해야 된다고 주장을 하고, 그래서 여기 또한 충돌이 있게 된다. 한 나라 안에도 개발과 보존사이에 충돌이 있게 되고, 그 다음에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개발 보존이 서로 충돌을 하게 된다는 거죠. 이런데서 오늘 여러분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개발시대에 살았습니다. 보존의 중요성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고 오직 개발시대, 우리 어릴 때는 포스터가 발전이 뭐요? 공장의 굴뚝에 연기가 나는 게 뭐다? 발전이오. 그런데서 살았는데,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개발을 멈추는 것이 마치 발전이 후퇴하는 거 같고, 오히려 자기삶이 정체된 거 같은 이런 우리의 정신적 어려움을 가져옵니다.

 

마치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담배 피우는 사람들끼리만 산다고 하면 그들의 세계관에서는 어때요? 누가 더 좋은 담배를 피우느냐? 좋은 담배피우는 사람이 잘사는 거다. 비싼 담배 피우는 사람이 잘 사는 거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마약도 안하는 거보다 못하고, 아무리 좋은 술도 안 먹는 거 보다 못하고. 아무리 좋은 담배도 안 피우는 거보다 못하다. 이런 얘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데 중독이 되어있으면 그 안에서만 같이 판단이 이루어진다는 거죠. 그러니까 오늘 우리는 개발에 어쩌면 중독되어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든 가치판단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피해가 심각한 상태에 왔을 때,

 

즉 담배를 피우다 폐암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나 ~ 이게 문제였구나.” 이렇게 각성을 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은 미리 예방하는, 위험을 미리 알고 그걸 미리 막는 이게 지혜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서 이제 우리 삶의 전반에 대해서 좀 재검토가 필요하다. 그래서 만약 홍수 때문에 둑을 막는다. 그것도 하지말자. 그건 아니에요. 해도 되요. 우리가 가뭄 때문에 댐을 막는다. 그것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4대강 개발 같은 거는 이거는 홍수 재방도 아니고, 가뭄 막는 것도 아니고, 그냥 꼬불꼬불한 거, 쪽바로 만들고, 거기 자전거길 내서 타고, 거기 배타면 얼마나 좋으냐?

 

운하 만들다가 경제성이 없다는 게 밝혀지니까 이번에는 레저시설하면 된다는 거요. 이런 거는 이거는 파괴에 들어간다는 거요. 으흠. 개발에 중독이 되면 이렇게 가게 된다. 배가 산으로 가듯이. 이건 지금의 성장경제에서는 그런 개발비용을 부담할 수 있지만, 이 경제가 늘 성장하는 거 아닙니다. 인류역사를 수없이 봐왔잖아요. 성장하다가, 고성장 저성장 정체 후퇴. 이렇게. 정체 후퇴가 되면 어떠냐? 세수가 줄어요. 세수가 줄면 유지보수도 어렵습니다. 그러면 이게 전부 부작용이 나타나는 거요. 수십만 년 흘러오면서 생긴 강인데,

 

그걸 갖다 인위적으로 막았으니까 토사가 실려 내려오든, 100년 만에 한번 나타나는 홍수나 이런 거든. 거기에 결국은 무너지거나 토사가 쌓이거나 하면, 그 정비할 돈이 지금처럼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이런 쓰레기 치우는 나중에 비용은 물어야 됩니까? 우리 후손들이 감당을 해야 되는데 우리 후손들은 자신이 하는 이런 거 처리하는 데만 전 국민 총생산을 다 집어넣어야 되는 거요. 우리가 우리들의 자손들을 위해서 개인적으로 노력해서 물려준다고 하지만,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맑은 공기, 깨끗한 물, 아름다운 자연, 이런 것들을 우리가 물려주고, 이러한 뒤치다꺼리가 좀 덜 되도록 물려줘야 된다.

 

그래서 우리 정토회에서는 어때요?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 삶. 쓰레기 제로 운동을 하고 있고, 그 쓰레기 제로 운동 속에 우리가 에너지를 절약하거나 물을 절약하거나 이런 물건을 절약하거나 가능하면 물건을 적게 사고 안사고, 샀으면 끝가지 쓰고, 다 썼으면 고쳐서 더 쓰고, 그래도 못쓰면 분리수거해서 재활용하고, 재활용도 못하는 거는 사실은 생산을 하지 않는, 이런 어떤 순환시스템을 우리가 만들어야 되겠죠. 그 가운데 특히 음식쓰레기 하나라도 우리가 국민운동을 해보자. 이렇게 만든 게 뭐요? 빈 그릇 운동이지 않습니까. 음식을 만들 때, 가능하면 재료를 최대로 다 쓰자.

 

두 번째 음식을 만들 때 가능하면 적게 만들자. 만들은 점심은 가능하면 다 먹자.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쓰레기가 나온다면 그것은 자체에서 퇴비화 시켜서 순화시키자. 이렇게 해서 적어도 내 집에서 음식 쓰레기가 집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해보자. 이런 식의 어떤 운동이 진짜 중요한 시대의 우리가 접어들었다. 으흠. 그러니까 뭐, 진수성찬을 차려서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해놓고 먹지도 않고 내보내는 게 접대를 잘 받았다. 이런 시대가 이제는 아니다. 그건 배고픈 시대의 얘기다. 지금은 이제 너무 많아 먹어 다 비만이 문제인 시대다. “영양실조가 문제인 사람 손 들어봐라.” 비만이 문제인 사람만 있죠.

 

그러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가치관이 바뀌어야 되는데, 아직도 이 개발중독, 먹는 거에 중독, 이런 것에서 아직 우리가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