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4)

[즉문즉설] 제940회 부처님 출가 후 아들과 아내는 어떻게 되었나요?

Buddhastudy 2014. 6. 17. 21:02

출처: 불교TV

 

 

. 부처님께서는 부처가 되기 전 얘기잖아요. 부처가 되신 뒤에 라훌라다. 이런 말을 붙인 게 아니고 부처가 되기 전에 출가하고 싶은, 자기 고뇌가 너무너무 커서 아무것도 보이지도 그런 상태에 요북하면 마누라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나라도 버리고, 탈출을 해서 뭔가 이 답답한 거를 해결하려고 결심하고 있는 그런 상태에서 있는 부모 버리지 못하는데, 부모 때문에 출가도 못하고 있고, 장가도 부모가 시켜서 억지로 가놓으니까 부인 때문에 출가가 장애가 되는데, 거기 뭐까지 생겼다? 자식까지 생겼다. 그 상황을 이해해야 되요.

 

그 상황에서 자식까지 생겼으니까 족쇄가 하나 늘었어요? 안 늘었어요? 늘었죠. 장애가 하나 늘었어요? 안 늘었어요? 늘었어요. 그러니까 그 얘기를 듣자 아이고, 장애구나.” 이렇게 말했는데. 부처님이 출가하러 길떠나버리고 애가 태어났다니까 부처님이 뭐라고 그랬다? 라훌라 그랬다 하니까, 애 이름을 뭐라고 짓자? 남은 사람들이 라훌라고 짓자. 이랬지. 부처님이 얘 이름을 라훌라로 지어라. 이런 게 아니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옛날에 우리 딸7 낳으면 7번째 딸 이름이 뭐요? 끝냄이. 아시겠어요? 아이고 이제 그만 끝내라. 할매가 이러니까, 애 이름을 아이고 이제 끝내라.” 이러니까 뭐다? 끝냄이.

 

또는 한문으로 고쳐서 뭐다? 말자. 아시겠어요? 그다음에 끝순이. 말순이. 다 같은 말이에요. 이런 것이 이름이 된다는 거요. 라훌라만 이런 게 아니에요. 우리 역사 속에서 이렇게 해서 이름이 된 게 굉장히 많습니다. 부처님의 자비정신하고 아무 과계가 없는 거요. 부처님은 그 당시에 그 자신의 이런 한계에 고뇌에 너무 힘이 들어서 이걸 찾기 위해서 뭔가 돌파구를 찾아가려는데 거기에 최대의 장애가 뭐였다? 소위 부모자식간의 효. 아시겠어요? 부부간의 정. 이게 그 도를 구하는데 최대의 장애였단 말이오.

 

그런데 자식인연이 또 하나 생기니까 아이고, 장애구나. 장애가 하나 늘었구나.” 이렇게 얘기하신 거요. 그러니까 남의 가족들이 그 얘기를 듣고 아버지를 생각해서 저그 아버지가 그렇게 했다니까, 그러니까 이름을 붙여준 거요.

 

그다음에 라훌라는 어미가 부처님이 되어서 돌아왔는데도 약간 악감정이 좀 남아있었어요. 야수라가. 나중에는 야소다라를 출가해서 비구니중이 되어 깨달아서 중이 되었지만 부처님이 출가하고 6, 다시 성도한 뒤에 6. 12년 만에 돌아왔으니까 죽어버렸으면 어때요? 그냥 편하게 살아도 되는데, 남편이 수행자가 되어있으니까 당시에 그 남녀관계로서는 어때요? 여자도 어때요? 밥을 제대로 먹거나 웃거나 해도 어때요? “남편은 지금 고행하고 있는데그런 소리를 듣잖아. 그죠? 본인도 본의 아니게 고행을 하고 살았단 말이오.

 

그런데 돌아오니까, 부처가 되어 돌아오니까 많은 사람은 다 좋아한단 말이오. 그러나 좋아하지 못하고 그 앞에 나아가 떳떳하게 엄마도 가서 엄마노릇하고, 아버지도 아비 노릇하고, 애도 가서 아빠 노릇하지만 수행자가 되어버렸을 때 오직 그 앞에 나가서 떳떳하지 못한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어요. 누구요? 아내요. 그러니까 그 심정이 어떻겠어요. 내 남편이 아니라는 건 괜찮아. 그러나 많은 사람이 존경하는데 거기에 자신도 한 일원으로서 가서 섞일 수가 없는 신분이잖아. 부인이라는 이 한 가지가.

 

그런데서 자기가 직접 남편한테 못가고 12살짜리 애기한테, “저기 계시는 분이 너의 아버지다. 너의 아버지한테 인사드려라.” 그러면서 가서 이래 말해라. 인사드리면서 아버지, 저에게 상속 물을 주십시오.” 이렇게 말해라. 이 말의 뼈가 있어요? 없어요? 있지. 출가한 수행자인데 상속 줄게 있나? 없나? 없지. 거기 가서 뭐라고 해라? 상속 물을 주십시오. 라고 해라는 거요. 이게 지어미가 시킨 거요. 그러니까 애가 가가지고 인사를 하고, 그다음에 뭐라고 했나? “아버님, 저에게 상속 물을 주십시오.” 이랬어요.

 

출가라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린 상태인데. 그때 부처님이 라훌라를 물끄러미 보다가 옆에 있는 사리불 존자에게 사리붓드라에게 이 아이를 출가시켜라.” 이랬어요. 상속물이 뭐다? 출가요. 그래서 출가는 원래 자발적으로 하는 거요. 자기가 스스로 하는 건데, 라훌라는 자발적으로 한 게 아니요. 아버지에 의해서 강제로 출가한 거요. 그랬기 때문에 이 아이의 할아버지인 정반왕이 항의를 한 거요. 부처님께. 그래서 미성년자, 20살 밑으로, 미성년자가 출가할 때는 반드시 부모의 승낙을 얻고 출가시켜주십시오. 그래서 부처님이 승낙했어요. 그래서 20살 넘어서 출가하는 비구비구니는 부모 승낙이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미성년자가 출가할 때는 반드시 뭐의 승낙이 필요하다? 부모의 승낙이 필요하다. 이런 제도가 만들어진 거요. 원래 또 우리가 사회적으로 미성년이라는 것은 어떤 결정을 자기가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건 부모의 승낙이 있어야 되니까. 부모가 보호자니까. 그럼 라훌라는 예외냐? 아니오. 라훌라는 부처님이 아버지니까 아버지가 승낙했어요? 안했어요? 했기 때문에 어긋난 건 아니오. 그러니까 이 아이가 이 수행자 그룹에 궁중에서 왕자로 살다가 완전히 이런 숲속에서 밥 얻어먹고, 다 떨어진 옷 입고 들판에 사니까 애가 견딜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어.

 

그래서 아이가 못 견디니까 막 저항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아이가 그 안에서 저항하고 못견뎌하고 이러니까 수행자들 그룹에서는 부처님에 대한 원망이 있었어요. 왜 저 수행도 할 줄 모르는 저런 애를 데려다가 이렇게 시끄럽게 만드느냐? 이런 원망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애가 애니까, 안 그러겠어요. 그러니까 여기에 저항하는 방법이 그냥 뭐~ 잔다든지. 수행 안하는 정도가 아니라, 못된 짓을 하는 거요. 사람들이 물어. 부처님 어디계시냐고. 그러면 여기 계시면 저기 계신다고, 저기 계시면 여기 계신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요.

 

그러니까 나쁜 소문. 특히 수행자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계율이 굉장히 엄격하지 않습니까, 그죠. 이러니까 비난이 많았어요. 그때 어느 날 부처님께서 라훌라를 불렀어요. 부처님 오니까 그 당시에는 수행자를 대우하는 어른을 대우하는 가장 최소한의 예의가 항상 그 당시에 맨발로 다니니까 발 씻을 물을 떠 주는 거요. 그리고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는 거요. 부처님이 옛날 친구 오비구 만났을 때도 그 오비구끼리 모여서 저건 수행자 아니니까 우리 발 씻을 물 떠주지 말고 앉을 자리 마련해주지 말자, 저희끼리 모의하는 얘기가 나오거든요.

 

수행자로서의 대우를 하느냐 안하느냐는 발 씻을 물을 떠주는 거와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는 거요. 그러니까 아버님이 스승이니까 대야에 물을 떠서 부처님께 갖다 드렸어요. 그런데 그 새 대야 였는데, 부처님이 발을 씻었어요. 그러나 부처님이 라훌라보고 이 물을 먹어라. 이랬어요. 그러니까 라훌라가 더러워서 안 먹는다. 이랬어. ? 더럽다는 거요. 그래서 이 물을 갖다 버려라. 버리고 왔어. 이 대야에다 밥을 담아 먹어라. 그랬어. 안 먹는다는 거요. ? 더러운 물을 담았기 때문에 대야도 더러워졌다는 거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대야를 던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요. 이 대야는 본래 깨끗한 것이지만, 더러운 물을 담았기 때문에 대야가 더러워 졌고. 그럼 이 대야를 버리게 된다. 그것처럼 네 마음속에 거짓말하는 계율을 어기는 행위를 하게 되면 결국은 네가 더러워지기 때문에 마음이 더러워지면 마음을 담고 있는 몸도 더러워지고 그러면 사람들이 너를 비난하고 너를 멀리하게 된다. 그때 이 아이가 그걸 깨쳤다 그래요. 그 이후의 정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주 조용히 밀행이라 그러죠. 드러내서 안하고 아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지런히 정진해서 깨달음을 얻어서 그냥 스스로 수행력으로 10대 제자가 된 거요. 부처님 아들이라고 된 게 아니고.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으흠. 그 다음에 두 번째 얘기는 뭐에 대해서 물었죠? 중도에 대해서. 당연히 부처님은 수행을 시작할 때 길을 알고 시작했어요? 모르고 시작했어요? 모르고 시작했어요. 모르고 시작했으니까 이쪽 것도 가보고 저쪽 거도 가보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온갖 한마디로 짓을 다해보고, 그 다음에야 ~ 이게 바르구나.’ 하는 길을 찾은 거요. 으흠. 그런데 부처님은 그 길을 찾은 뒤에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부처님처럼 똑같이 시행착오를 거듭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처음부터 이 길을 가라. 이렇게 얘기한 거요.

 

그렇기 때문에 그건 뭐 크게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개중에는 그러니까 그 중도를 무사안일로 이해해서 그렇게 지금 말한 그런 부작용이 지금 많이 나타나고 있죠. 그건 머릿속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래. 그걸 꼭 안 해 봐서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욕망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이용을 하면 이름만 중도지 중도하고 아무 관계가 없죠. 욕망에 끄달리는 거지. 그렇다고 부처님처럼 수없는 그런 시행착오를 다 거듭해야 되는 거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 거듭할 바에야 우리가 불경을 볼 필요가 없죠.

 

직접 해보면 되죠.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 해보고. 그죠? 그러나 이미 부처님께서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 해보고 하셔서 길을 찾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길을 따라하면 되는 거요. 그런데 그 길을 따라하는 것도 잘 되요? 안 돼요? 안 돼요.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쪽저쪽으로 헤매기는 하죠. 잘 안되어서 헤매기는 하지만 부처님은 길을 모르면서 길을 찾아간 거고, 우리는 길을 알기는 아는데 어때요? 내가 못가가지고 지금 힘드는 거 하고 좀 다르다.

 

부처님은 어떤 산꼭대기 올라가는 길을 처음으로 개척하신 분이니까, 이쪽으로도 올라가보고 저쪽으로도 가보고, 기어도 가보고, 이렇게 해서 길을 뚫은 사람이고. 우리는 부처님이 뚫어놓은 길을 따라 가는데도 어때요? 힘이 들어가지고 가다가 중간에 꾀를 쓰고, 가면 뭐하느냐하고, 이런 수준이기 때문에 성격이 좀 다르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