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09)

즉문즉설_법륜스님(제181회) 이혼을 하는 딸

Buddhastudy 2011. 7. 12.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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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딸이 낳은 자식도 아니고, 내 친척이 낳은 자식도 아니고, 남이 낳아서 키우지 못해서 버려진 자식들을 모아서 돌보는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고아원 운영하는 분 있죠? 그러니까 내 딸이다, 손자다 이런 생각 하지 마시고. 고아원 원장이라고 생각하시고. 이렇게 애들을 돌보지 못한 아이들을 내가 그래도 정성껏 돌봐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그냥 돌보세요.

 

그 얘기는 하지 말고. 고아원원장이 애들 부모걱정 안하잖아요. 저희야 이혼을 하던 결합을 하던 그건 잊어버리고. 애들만 돌보세요. 손자라고 돌보지 말고. 손자라고 돌보면 오히려 안 좋습니다. 그냥 남의 애라고 생각하고 내가 돌보면 내가 보살이 되고. 손자라고 내가 돌보면 오히려 안 돌보느니보다 못해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손을 안 댓는게 좋아요. 손을 안 댓으면 자식들 때문에 둘이가 어쨌든 결합해서 살든지 무슨 수가 나는데. 할머니가 끼어들어서 애들을 다 가져가 버리니까 둘이 결합할 무슨 명분, 핑계가 없어졌어요.

 

그러니까 잘한 건 아니에요. 잘한 건 아니지마는. 지금이라도 잘못한 거 속에서 조금이라도 잘하려면 내가 고아원 원장이라고 생각하고 두 아이들을 정말 엄마아빠들이 갈등을 일으키고 헤어지고 아이들을 버려놓은 거를 내가 대신 보살핀다. 내가 엄마가 돼서 보살핀다. 이런 마음으로 그냥 애들만 보살피면 되지. 그 나머지를 생각하지 마라. 그건 자기들 인생이니까 자기들이 알아서 살죠. 이혼을 해도 괜찮고, 싸워도 괜찮고. 자기들 문제니까.

 

그럴 때 제일 큰문제가 아이들 문제인데. 아이들이 고아원에 맡겨진 택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그러니까 내가 고아원 원장이다. 그래서 두 아이들을 내 자식처럼 내가 잘 돌봐야 되겠다. 지금부터 이게 내 딸의 자식이다. 이런 생각도 버려야 아이들이 잘 큽니다.  딸이 그런 행동을 하는 거는 자꾸 물으면 결국 보살책임이오. 누가 낳았어요? 자기 책임이오. 그러니까 아~ 내가 인생살이를 잘못 살아가지고 저 아이의 마음의 안정을 못줬구나.

 

그래서 남편 때문에, 시댁 때문에가 아니고 내가 저 아이 키울 때 마음의 안정을 못줘서 저 아이가 저리 방황하구나. 쯧쯧. 아이고~ 이렇게 생각하면서 내가 내 남편에게 참회를 하셔야 되. 기도는 남편에게 참회기도 하시고. 그 다음에 아이들은 손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고아원원장이다 생각하고 애들을 돌보고. 딸에 대해서는 쯧쯧 아이고~ 나로 인해서 제가 고생한다. 이렇게만 생각하고. 그 외에는 정을 끊으세요.

 

그 자기들 인생은 자기들이 살도록 놔두세요. 내가 얘기한다고 들을 사람들이오? 안들을 사람들이오. 지금 엄마가 얘기한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니에요. 걱정해도 해결 될 일이 아니고. 그냥 뇌 두세요. 그거 자꾸 할머니가 걱정하는 마음으로 애들을 키우면 이 애들이 또 심리가 불안해 집니다. 그러니까 할머니가 완전히 엄마가 돼서 편안한 마음으로 이렇게 키우고. 애들이 엄마얘기하면 그래 너도 나중에 엄마 되 보면 엄마의 그런 심정을 알게 된다. 너도 나중에 아빠 되 보면 아빠심정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 다 그 사람들도 인생살이가 힘들어서 그러니까 대신 내가 돌봐 줄 테니까 너희들은 편안하게 학교 잘 다녀라. 이렇게 돌봐주면 되요.

 

 

 

 

Q2

음력으로 올해 사월초파일 날 지구상에서 태어난 사람이 수십만 명인데. 그 사람들 중에 불교신자 된 사람 몇 명 없고, 스님 된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별 걱정 안하셔도 되요.

 

그런데 내가 스님이 되고 싶을 때, 이거는 하나의 핑계는 될 수가 있죠. 그러니까 인생을 살 때 내가 예를 들으면 통일 문제에 관심 있는 건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은혜를 갚겠다. 사실 핑계요. 그죠? 통일에 관심이 없으면 그런 핑계 될까? 안될까? 안 대겠지. 통일에 관심이 있으니까 이런 핑계. 자기에게 그런 의미를 부여해서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죠? 또 내가 한국불교를 새롭게 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이 날 때는 그냥 주장하기도 하지만은,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한단 말이오.

 

나의 스승의, 스승의, 스승의 용성큰스님께서 이 땅에 불교중흥을 위해서, 새롭게 불교를 일으키기 위해서, 경전을 번역하셨다. 독립운동에도 참여하셨다. 계율도 새롭게 창대하셨다. 그런 유혹을 개선해서 나는 이 일을 할 수밖에 없겠다. 이렇게 할 때는 자기에게 자기의 이 원을 더 굳건하게 하기위해서 이런 것들을 가지고 더 실천을 한단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본인이 불법을 공부할 때 아~ 나는 사월초파일날 태어났기 때문에 부처님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이렇게 자기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건 좋아요.

 

그래서 내가 출가해서 스님이 돼서 부처님처럼 살아야 되겠다. 그러지 못하더라도, 내가 이 세상에 살더라고 내 수입의 1/10은 불법을 전파하는데 쓰고, 내 시간의 1/10은 불법을 공부하는데 쓰고, 전법을 하는데 써야 되겠다. 내가 부처님 같은 길을 고대로 가야 되는데. 고대로는 못 갈망정 최소한도 1/10은 가야되지 않겠냐? 이렇게 그 내 생애를 갖고 나한테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습니다. 알았습니까? 그런데 이게 만약에 종교적으로 얘기한다면 내가 특별하게 의미부여해서 얘기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법문 자리는 종교적인 자리가 아니고. 진리가 뭐냐? 사실이 어떠냐? 이런 걸 논하기 때문에 이게 기존에 우리가 알고 왔던 불교와 맞고, 틀리고. 그게 불교냐? 기독교냐? 종교냐? 아니냐? 이런 걸 다 내려놓고. 우리는 진실이 어떠냐? 이렇게 지금 접근하는 자리란 말이란 말이오. 이거는 담마, 법을 논하는 자리다 이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뭐 이렇게 듣기 좋은 소리를 할 수가 없다. 이해하셨어요? 으응~ 그러니까 사월초파일날 태어났는 것은 특별한 인연이냐? 그러니까 스님이 간단하게 특별한 인연이라고 믿으면 특별한 인연이 되고. 객관적으로는 특별한 인연이라고 말 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그 날 태어난 사람이 65억 인구 중에 수십만 명이고, 그 중에 불교 신자 된 사람도 몇 명 없고, 그 가운데 승려 된 사람은 더더욱 한 명도 없을 수도 있다. 어쩌면 한 명쯤 전 세계로 보면 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내가 이래 다녀보면 스님들 생일 중에 내가 사월초파일날 생일이다. 이런 사람 만나본적이 거의 없거든요? ~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