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6)

법륜스님 2_1. 자살을 어떻게 보십니까?

Buddhastudy 2016. 1. 8.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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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은 살인과 동일한 것이다. 범죄행위다. 이렇게 말할 수 있죠. 다만 남한테 피해를 안줬기 때문에 처벌할 수가 없을 뿐이죠. 누군가를 살해한 사람, 살인자의 가족이 갖는 고통보다 자살한 사람의 집안의 가족이 겪는 고통이 실제로는 더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많은 아픔과 피해를 주는 행위다. 이렇게 볼 수 있죠. 그러면 살인행위라는 게 왜 일어나느냐?

 

그러니까 사물을 상대를 있는 그대로 안보고, 자기의 어떤 생각에 기준을 두고 너는 이래야 되는데, 너는 이렇지 못하다. 넌 나쁜 놈이다. 너 같은 놈은 없어도 돼. 그러니까 없애버리는 방법이라는 말이요. 그러니까 제일 가까운 게 상대를 내치는 방법으로 첫째는 꼴도 보기 싫어.” 그 다음에 나가.” “내 눈앞에서 나타나지 마.” 영원히 나타나지 않게 하는 방법이 뭐겠어? 죽어 버리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이게 내치는, 자기의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서 내쳐버리는 하나의 행위라고 볼 수 있거든요.

 

그럼 자살은 어떤 거냐 하면, 동일한 심리현상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하는 어떤 상상의 자기를 만듭니다. 우리 모두는 다 상상의 자기가 자기인 줄 착각하고 있죠. 이 상상의 자기가 현실의 자기와의 갭이 커지면 커질수록, 이 상상의 자기, 이게 자아인데, 이 자아가 현실의 자기가 못마땅한 거요. 그래서 첫 번째 일어나는 현상이 이 현실의 자기가 부끄러운 거요. 이게 자기라는 거에 대해서.

 

그 다음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그래서 남을 안 만나려 하는 거요. 그 다음에 방안에 박혀서 안 나가는 거요. 그게 심해지면, 이 현실의 자기를 죽여 버리는 거요. 이런 현상이기 때문에 이것은 동일한 방식이에요. 그래서 지금 자살이 일부는 어떻게 갈 수 있느냐. 자기가 꼴이 보기 싫어서 자기를 죽여 버리지만, 자기만 죽이게는 너무 억울하다. 그러니까 불특정 다수에 대해서도 나만 죽기 억울하니까, 그냥 죽여 버리겠다. 죽이고 죽겠다. 이렇게 되면 지금 말하는 묻지 마 살인 현상이 일어나거든요.

 

그런데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스스로 자살해서 바깥으로 드러나는 폭력행위로 상당부분 이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총기라든지 이런 게 없으니까 대량살상이 안 일어나죠. 그런데서 자살은 살인으로 전환 될 수 있는 요인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서 조금 더 우리가 치유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되는데, 사람들이 자꾸 자기를 극복한다고 자꾸 너무 가르친다는 거죠.

 

자아의식에 맞게끔 현실의 자기를 끌어올리는 게 수행이 아니고, 자아의식이라는 게 허위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걸 버리는 게 수행이에요. 이걸 버리므로 해서 현실에 있는 자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요. 말이 서투르면 서투른 게 자기고, 눈에 안보이면 눈에 안 보이는 게 자기고, 공부를 못하면 공부 못하는 게 자기에요. 이 현실은 그냥 있는 그대로, 이것도 다 소중한 거요. 돌멩이가 꼭 큰 게 좋고, 작은 게 나쁜 게 아니듯이.

 

그럼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되니까, 이 현실의 자기를 있는 그대로 자기로 받아들이는 게 자기 사랑이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죠. 이걸 못 받아들이면 자기를 미워하게 되죠. 그러면 자기를 학대하게 된다. 그래서 이것을 받아들여서 여기서부터 자기가 조금 말을 좀 잘하고 싶으면 연습을 하면 되고, 다른 것이 어떻게 하면 보완을 해나가면 되는 거고. 그러니까 현실로부터 출발하면 조금만 향상이 되어도 성과가 나니까, 자긍심이 생기는데, 이 상상의 자기를 기준으로 삼으면, 이 현실의 자기가 어느 정도 올라와도 늘 못 미치기 때문에, 항상 불만인거요.

 

그리고 좌절하고 절망하게 되고, 그런 면에서 학교교육이나 이 모든 면에서 자꾸 개인보고 너무 노력해라. 이런 것들은 꼭 옳은 건 아니다. 오히려 괜찮아. 지금도 괜찮아. 그 정도면 다행이야.” 쉽게 얘기하면 이런 사람의 가장 좋은 치유법은 아침에 일어나서 , 오늘도 살았네. , 기분 좋다. 오늘도 살았구나.”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쁠 수 있으면 이런 현상은 안 일어나죠.

 

주위로부터 너무 많은 것들을 요구하게 되고, 그 요구의 자기를 맞추려고 하다보니까, 또는 자기를 너무 높이 상정하고 거기에다가 맞추려고 하다보니까 이게 안 되니까, 좌절하고 절망을 하게 되는 거거든요.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3백만 원만 가져도 , 살만하다. 이제 걱정이 없다.” 이렇게 심리가 일어나고, 백억을 가진 사람이 증권에서 90억을 날리고, 뒷정리해도 10억 남아도 나는 망했다. 이제 내 인생 끝이야.” 하고 자살하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객관적인 게 아니라는 거요. 기준을 자기가 어떻게 잡고 있느냐에 따라 문제거든요.

 

상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요. 그러니까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되는데,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상대를 보기 때문에 살인 행위든, 폭력행위가 나타나게 되는 거 아니냐. 그런데서 저는 이것은 일종의 정신적인 질환에 속하죠. 양쪽 다. 이것은 치유가 되어야 된다. 나쁘 다기 보다는 치유되어야 할 일이라는 거죠. 이런 갭이 너무 벌어진 사람을 조기에 발견하고, 그것을 상담해주거나 도와줘서 격리해 주거나 해서 이걸 막아야 되고,

 

또 더 근본적으로는 이것이 자아가 형성될 때, 정신이 너무 나약하게 형성되거나, 엄마가 심리가 불안하면 심성 자체가 불안하게 형성되거나, 미워하면 심성 자체가 부정적으로 형성되거나,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에 아기를 가진, 또는 키우는 엄마들이 정신이 매우 안정이 되어 있어야 되고, 긍정적이어야 된다. 그래서 아이들의 심성이 좀 건강해야 된다. 이게 근본치유라고 한다면,

 

이미 심리적 불안 현상이 일어나서 형성되었다 하더라도, 사회가 좀 덜 강박하는, 사회적인 장치들을 마련하면, 자살률이 줄어드는 거고, 또 조기에 발견해서 치유를 해나가면 자살률을 많이 줄일 수가 있죠. 자살률만 줄이는 게 아니라, 이것은 나중에 사회적인 그런 폭력행위도 훨씬 줄일 수가 있는 문제니까, 그런 면에서 지금 우리 사회는 물질, 육신, 육신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콧대를 세운다. 가슴을 부풀린다. 턱을 깎아준다 하는 이런 육신에 대한 어떤 질병의 치유나 그렇지 않으면 미용이나 안 그러면 좋은 차를 탄다. 좋은 음식을 마련한다. 이런 것만 지금 치중되어있지,

 

그러니까 정작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마음자세, 정신,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무지하다고 말 할 수 있죠. 사실 이 치유의 어떤 종교가 가장 앞장서야 되는데, 종교마저도 이러한 사람을 치유하는 데 지금 주역할을 종교인들이 하기 보다는 역시 어떤 이런 저런 이유로 재산을 모으거나 건물을 짓거나 지위를 높이거나 하는 지극히 세속적인, 물질 중심주의에 동일한 흐름으로 가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것은 종교다. 교육이다. 이런 복원이다 하는 문제를 넘어서서, 어쨌든 심성에 이런 왜곡, 자아상실, 심리불안, 어떤 이름으로 표현하든, 정신영역에 대한 이런 오류들을 우리가 어떻게 조기에 발견하고 치유해 내고, 또 근본적인 치류를 할 거냐. 이런데 관심을 가져야 저는 이 문제를 좀 줄일 수 있지 않나. 이렇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