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6)

[법륜스님 즉문즉설 1152회] 고락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다

Buddhastudy 2016. 2. 22. 19:23


  

안녕하세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보면, 자기 원하는 게 이루어져서 해에웃는 걸, 행이라 그러고, 또는 락이라 그러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안 되어서 인상 쓰는 거를 불행 또는 라 그래요. . 괴롭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고락이 늘 이렇게 반복된다. 이걸 윤회라 그래. 그래서 우리 업보중생은 범부중생은 윤회 전생한다. 늘 이렇게 윤회하는 거요.

 

윤회하는 중에 고는 괴로움이고 락은 즐거움이다가 중생의 생각이고, 큰 틀에서 보면 고락을 되풀이 하는 이게 . 고락을 되풀이 하는, 고락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게 바로 . 괴로움이다. 그럼 이 에서 벗어나는 것은 고가 락이 되는 게 아니고, 고락의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거다. 즉 윤회 전생하지 않는 거다. 이거를 해탈이다. 이렇게 말해요. 열반이다. 이렇게 말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은 행과 불행이 있는 가운데, 행복을 추구하는 거고,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붓다가 되는 길, 열반이라는 것은 고락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버리는 거다. 그래서 우리가 이거해 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그래서 그것이 설령 다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건 윤회의 사슬 가운데, 락이 좀 많은 경우에요.

 

그러니까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복을 비는 것은 윤회의 씨앗을 심는 거다. 이렇게 표현하는 거요. 그러니까 해탈의 관점에서 보면, 종교, 복을 비는 종교는 윤회의 씨앗을 심는 행위에 속한다. 해탈의 길이 아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해탈의 길인가? 이 해탈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수행이라. 이렇게 말해요. 으흠. 그러니까 바람직한 기도, 올바른 기도는 수행을 올바른 기도라 그래요.

 

그냥 복을 비는 기도는 그거는 윤회의 씨앗을 심는, 윤회 전생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그건 수행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기도라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걸 이루는 거다.’ 하는 거라면, 앞으로 정법의 불교에서는 기도라는 용어를 안 써야 되요. 그러면 기도라는 건 원래 그런 거냐? 아니에요. 종교라는 건 원래 그런 의미냐? 아니에요. 종교라는 것은 정확하게 이해하면 마루종자 가르칠 교자. 으뜸 되는 가르침. 으뜸 되는 가르침이 뭐냐? 행복해지는 가르침, 자유로워지는 가르침, 자기가 주인 되는 가르침, 이런 의미에요.

 

그러면 힘 있는 자에게 뭘 빌어서 얻는다 하는 것은 주인 되는 거요? 종 되는 거요? 종 되는 거요. 그래서 어떤 종교에 보면, 자기는 누구의 종 되는 걸 서원하잖아. “나는 누구의 종이다.” 이렇게 말하잖아. 불교에서는 아무리 그가 위대해도 내가 그의 종 되는 게 목표는 아니에요. 나도 그분처럼 되는 게 목표지. 이렇게 해탈의 길로 나아가는 걸 수행이라 그래요. 우리가 기도라는 용어를 쓰더라도 어떤 기도를 해야 된다? 수행적 관점의 기도를 해야 된다. 해탈지도를 가는 기도를 해야 된다. 이런 얘기요.

 

그럼 뭐해주세요. 하는 것만 가지고는 해탈지도로 갈 수가 없어요. 파도가 치면 쳐서 좋고, 고요하면 고요해서 좋고. 그런데 우리는 고요하면 좋고, 파도치면 나쁘고. 또 파도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파도가 치면 바다라는 건 또 파도가 쳐야 멋일 때가 있어요? 없어요? 있죠. 난 해보지는 않았는데, 영상을 보면 윈드서핑 하는 사람은 파도가 높이 쳐야 되요. 보통 사람은 파도가 높이 치면 빠져서 죽는데, 그 사람은 파도가 높이 쳐야 재미가 있는 거요.

 

그래서 그거 하는 데는 파도가 높이 치는 데 가서 놀아요. 파도가 안치는 고요한 바다도 찾기 쉽지 않지만, 파도가 높게 치는 데도 쉽지가 않아요. 그래서 옛날 같으면 파도가 높이 치는 데는 안 좋은 장소였는데, 그 사람들에게는 파도가 높이 치는 장소, 드문 드문 그런 장소를 찾아서 유원지가 된다. 이거요. 그래서 필요에 따라 다른 거요. 그러니 바로 그런 사람이 되는 쪽으로 나아가야 된다. 그것을 정진이라 그래요. 나아가는 사람.

 

이거 단박에 이를 수 있는 거예요? 꾸준히 해야 되요? 꾸준히 해나가야 돼. 그래서 다만 할 뿐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넘어지면 일어나서 또 하고, 이게 금방 안 된다. 그래서 안 되는 현실에 두발을 딛고, 되는 목표를 두 눈으로 보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게 수행자다. 그런데 목표만 너무 생각하면 조급해져요. 그래서 현실을 부정한다. “난 안만 해도 안 되네.” “10년 수행한 게 그것밖에 안 되나?” 이렇게 자기나 남을 비판하게 되요.

 

또 안 되는 현실에 안주하면 어떻게 되느냐? “나만 화내나? 너는 안내나?” 이렇게. “사람이 다 그렇지 뭐.” 이런 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안 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그러나 우리의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야 된다. 지금 안 되고 있지만, 되돌아보면 불법 만나기 전 보다 좀 좋아졌어. 뒤로 한번 돌아보면, “아이고 잘 왔네.” 이렇게 자기를 격려해 주고, 앞으로 목표를 보면서도 아직도 멀었네.”하면서 다시 일어서서 간다.

 

그런데 목표만 쳐다보는 사람은 아이고, 10년을 해도 안 되네.”해서 좌절하고, 출발점만 돌아보는 사람은 이만하면 됐지 뭐.” 이렇게 거기서 앉아서 논다. 이게 극단이라 그래. 치우친다. 이 출발점과 목표를 동시에 봐야 한다. 여기와 저기를. 이것과 저것을, 앞과 뒤를, 위와 아래를 동시에 보는 것을 통찰력, 지혜. 이렇게 말해요. 중도는 동시에 보기 때문에 중도. 치우치지 않는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늘 부지런히 정진하지만, 좌절하지 않는다. 아직도 안 되고 있지만, 괴로워하지 않는다. 옛날보다 나아졌지만, 멈추지 않는다. 교만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