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6)

[법륜스님 즉문즉설 1155회] 어머니가 딸과 아들에 대한 태도가 달라 서운

Buddhastudy 2016. 3. 11. 19:21


 

, 그러니까 자기는 돈을 못주니까 몸으로 때운다 이거요? 그럼 미안 한 줄 알아야지. 원하는 거 안 해주고, 딴 거 해주니까, 미안해해야지 뭐. 방법이 없잖아. 돈을 안주고 자꾸 내 싫어하는 과자나 갖다 주고 그럼 어이하겠어? 그러면 어떻겠어? 그게 반갑겠어? 주니까 받기는 받지만.

 

아이고, 지꺼 지주는데 자기가 왜 관여를 해? 자기가 누구를 주든지 그건 엄마 마음이지. 나는 줬잖아. 자기는 그러면 길거리에서 불쌍한 거지가 앉아서 돈 달라 할 때마다 줘요? 줄때도 있고 안 줄때도 있어요? 그래 그러듯이 그것도 줄때도 있고, 안 줄때도 있으면 되지 그걸 부담스러워 해요.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은 그 사람 사정이고, 형편이 되면 주고, 주기 싫으면 안주고, 형편이 안주면 못주는 건 내 사정이듯이.

 

섭섭해 하면 그건 어머니 자기 문제지, 자기가 무슨 상관할 게 있어? 그래서 엄마한테 칭찬 듣고 싶어서 그렇구나. 늙은 노인한테 칭찬 들어서 뭐하려고?

 

아니, 칭찬해 주는 사람이 그렇게 없나? 남편한테 좀 해 달라 그래. 남편도 안 해주나 보지? 오케이. 그러면 앞으로 여기 절에서 당번을 정해서 매일 매일 번호를 붙여서 저 보살 오면 칭찬해주자.

 

그러니까, 이해는 되요. 얘기 들으니까, 그 할머니가 우리 어머니 비슷한 거 같아. 우리 어머니는 평생 아들 걱정만 했지, 딸은 털끝만큼도 걱정을 안했어요. 그게 우리의 전통 현실에서 온 거를, 그걸 어떻게 하느냐는 거요. 그래서 부모는 옛날에 시골에 딸 있으면 다 공장이든 어디 가서 돈 벌어 엄마 반지해주고, 아들 있으면 전부 논 팔고, 소 팔아서 집안 망하고. 시골 형편이 내가 자란 시대가 다 그래요.

 

아들 둔 집은 대부분 다 망했고, 딸둔 집은 대부분 다 시골에서 잘 살고 부모가 호강하고. 그런데 딸은 다 억수로 학대해서 고생시켰는데 부모를 위해주고, 아들은 오냐오냐 찬물에 손 한번 안 담그게 했는데, 전부 집구석 다 말아먹고, 이게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니라, 옆집도 그러고, 저 집도 그러고, 이 집도 그러고. 성공해서 돈 벌은 집은 그저 10집에 1. 아들이 초등학교 졸업하고 공부를 못시킨 집은 시골에 있으면서 지금 다 돈 벌어서 시골에서 집 사서 삐까번쩍하게 살고.

 

아들 공부시켜서 사업하니 뭐하는 집은 조상 묘답까지 다 잡혀서 시골에 아예 근거도 없고, 그저 10집에 1명 정도 나가 돈 벌어서 오히려 시골에 집도 수리해서 별장처럼 해 놓은 집은 10집에 1집쯤 있고, 다 우리 아버님 형제들, 큰아버님 집도 이 집도 폐허, 이 집도 폐허. 다 그래. 그게 그 사회의 흐름의 변화 속에서 오는 하나의 현상이에요. 그러니까 그거 너무 자기만 그렇게 억울한 거 아니요.

 

그러니까 자연계, 뭐든지 우리가 자연의 원리를 생각해야 돼. 자연을 가만히 보면 고양이든 개든 다람쥐든 쥐든 닭이든, 일단 새끼를 낳으면 어미가 새끼를 보호해요? 안 해요? 보호하죠. 목숨을 걸고라도 보호해요. 새끼를 버리는 어미는 거의 없어요. 그러니까 짐승도 안하는 짓을 하면 벌 받아요. 그러니까 아까 저기도 내가 부모 얘기했는데, 일단은 새끼를 보호해야 종이 유지가 돼. 이건 본능에 속해요. 윤리 도덕이 아니에요.

 

그런데 아무리 새끼를 그렇게 애지중지 키워줘도, 새든, 고양이든. 부모가 즉, 어미가 늙어 죽을 때 거기서 낳은 새끼가 어미를 보호한다. 이런 거 자연계에서 봤어요? 못 봤어요? 못 봤죠. 그러니까 자식이 부모를 돌보지 않는 것은 죄가 안 된다는 거요. 그거는 종족의 보존의 법칙에 없는 거요. 그런데 짐승은 안하지만 인간이 하면 잘하는 거요. 그래서 부모를 돌보면 잘하는 짓이긴 하지만, 돌보지 않는다고 죄 되는 짓은 아니다.

 

자식을 돌보면 그건 당연한 짓이고, 자식을 돌보지 않는 거는 죄 되는 짓이요. 그런데 이 자식에 대해서 딱 있어요. 목숨 걸고 보호해야 되는 건 3살까지고, 그 다음에 기본 책임은 20살까지요. 요즘 사회는 20살까지, 농경사회는 15살까지, 수렵사회는 12살까지. 그 이상 보호하는 거는 과잉보호에 들어가요. 그러니까 부모를 돌보는 거는 내가 돌볼 수 있으면 돌보고, 돌 볼 수 없으면 돌보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그거 너무 연연해 할 필요가 없어요. 그거는 자기가 집착하는 거요. 그 다음 두 번째, 부모는 낳아주기만 해도 저그 부모가 엄청나게 싸우고, 또는 나한테 유산 하나 안 물려줘도, 부모는 나한테 고마운 존재에요. 왜 그럴까? 길가는 사람 그 누구도 나한테 밥한 그릇 준 사람 없고, 옷 한 벌 준 사람 없죠. 우리 부모는 나를 야단치고 두드려 패기는 해도 어쨌든 밥도 주고 옷도 줬고, 저그 어머니 아버지, 즉 저그 부부끼리 물고차도 싸워도 나를 고아원에 안보내고 나를 키워줬기 때문에 부모는 그냥 고마운 존재요.

 

그러니까 부모가 유산을 줬다 안 줬다. 대학을 보냈다 안 보냈다. 결혼 때 도와줬다. 안 도와줬다해서 부모를 미워하면 그거는 배은망덕 한 거요. 왜냐하면 그러면 이 세상사람 다 미워해야 돼. 법륜스님이 아무리 자기한테 좋아도 자기 클 때 밥 한 그릇 준 적이 없어요. 오직 그걸 해 준 사람은 부모밖에 없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가 어떻게 하든 관계없이 부모에게 감사합니다.’해야 돼.

 

그러나 20살밑에서 부모로부터 받은 은혜는 고마워는 하지만, 갚아야 될 빚은 아니에요. 빚은 아니에요. 그거는. 그건 부모의 책임이기 때문에. 그런 그 원칙을 딱 가져야 되요. 그래서 부모님이 그 유산을 어떻게 처리하든 그건 자기가 논할 일이 아니고, 내가 준 돈을 부모가 어떻게 누구를 주든 그거는 부모의 역량이지, 내가 처리할 일이 아니야. 우리는 자랄 때 부모가 준, 부모가 자기가 벌어서 부모가 자식한테 준 돈도 학비로 준거를 애인하고 연애한다고 커피 사먹는데 쓰기도 했잖아.

 

다 해봤어요? 안 해봤어요? 해 봤지. 그런데 부모가 준 돈도 자식 지 필요할 때 쓰는데, 자식이 부모한테 줘 놓고, 그걸 어디 쓰라고 따지는 것은 이치적으로는 맞지가 않다. 감정적으로는 이해가 되요. 힘들다 해서 쓰라고 주면 부모 쓰라고 줬어요. 그런데 어디에 쓰든 그건 부모 자유 아니오. 부모는 그걸 자기가 쓰는 거 보다는 자기가 밥한끼먹고 따뜻하게 하는 거 보다는 그걸 아들주고 싶고, 손자 주고 싶은 거 아니오.

 

그런데 왜 그걸 우리가 막으려고 그래. 70, 80된 사람의 자유를. 자기 거를 누구를 주든 왜 그걸 우리가 간섭하려고 그래. 요즘 젊은 사람들 부모가 간섭해도 싫어하는데, 늙은 80된 걸 가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왜 이래 쓰니? 왜 저래 쓰니?” 이렇게 간섭하는 거는, 자기가 자식 된 도리로서 올바른 태도가 아니야. 자식을 떠나서 사람으로서 그거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자기 지금 심보가 어떠냐하면, 비유를 들면 그래.

 

내가 돈을 10만원을 이 보살님 드리고, “보살님, 오늘 점심하세요.” 하니까 아이고, 스님 고맙습니다. 역시 우리 스님 최고다. 부처님 같다.”이래. 그런데 옆에 있는 보살보고 100만원을 턱 주고 점심 사먹으라고 주면 저 보살님이 좋아할까? 싫어할까? 그냥 기분이 팍 나빠서 스님은 내 평등을 얘기 해놓고 왜 사람을 차별하나요? 나보다 잘하는 게 뭐가 있어요? 정토회도 내가 먼저 왔고, 보시를 해도 내가 더 많이 했지, 봉사도 내가 더 많이 했지. 뭐뭐뭐 특별한 인연이 있나?”이렇게 분별심이 일어나서 절에 안 나와 버려. 10만원 받고 절에 안 나와.

 

그러면 이거는 이해는 되요. 우리가 이해는 되지만, 객관적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안주면 오히려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받고 문제를 일으켜. ? 남하고 비교해서. 이게 질투심이에요. 그러니까 부모가 재산이 하나도 없었으면 자기 아무 문제도 없어. 있으니까 이게 문제되는 거요. 그러니까 부모가 살아있을 때 자기 재산을 누구를 주든지 그건 부모의 권리지, 자기가 관리할 일이 아니오.

 

다만 부모가 돌아가시면 그 유산은 장자든, 차자든, 딸이든 아들이든, 무조건 1/N로 나누기로 되어있어. 배우자까지 포함해서. 그런데 이번에 민법이 바뀌어서, 무조건 절반은 딱 잘라서 배우자가 갖고, 나머지 절반 갖고 1/N로 하기 때문에 요즘은 장자라고 이런 말 하면 안 돼요. 장자라고 더 받는 게 있나? 없나? 없어. 그러니까 차자니, 장자니 갖고 장례 치를 때 형님이 이런 소리하면 안 되고,

 

두 번째는 옛날에는 아들이 하는 말이 맞아. 유산을 다 아들을 줬기 때문에. 그래서 아들이 해야 된다는 말이 맞고, 장자가 해야 된다는 말이 맞아. 옛날에는 장자가 많이 가져갔어. 그런데, 그럼 살아생전에는 법은 이렇게 되어있지만 살아생전에는 이게 유산이 아니야. 자기거야. 자기 거를 장자를 주든, 차자를 주든, 딸을 주든, 남을 주든, 그거는 유산이 아니기 때문에, 그건 개인의 자유에 속해.

 

그래서 기분 나쁜 거는 알겠어. 오빠한테 많이 주고 우리한테는 안준다. 기분 나쁜 거는 알지만, 그렇다고 엄마를 미워할 대상은 아니다. 그러니까 미워할 바에야 안가는 낫다. ? 안 간다고 죄가 안 된다고 얘기했잖아. 그럼 미워하면 죄가 되는 거요. 가서 열심히 해주고도 미워하면 죄가 된다. 이 말이오. 왜 그러냐하면 미워해야 되지 않을 대상을 미워하기 때문에. 그 다음에 안가도 되는데 자기가 가서 해주는 거는 복은 되지만, 미워해버린 죄보다는 못해.

 

그래서 자기가 안가는 거는 죄가 안 되는데, 미워하는 건 죄가 된다. 그러니까 자기는 지금 거꾸로 해. 왜 미워하지. 얘기 들어보면 그게 미워하는 거지, 뭐가 미워하는 거야. . 지금 하는 거, 그게 미워하는 거라고 그래. 그런 거를. 그럼 미워하니 자기가 괴로운 거요. 그러니까 그런 거는 따지지 말고, 앞으로는 이해는 돼. 무슨 말인지 나도 알아. . 그러나 그건 중생심이다. 수행자는 그렇게 마음내면 안 된다.

 

그래서 부모에게 고맙게만 생각하고, 그리고 내가 감당이 안 되면 안하면 돼. 돈 달라 그래도 안 드리면 되고, 주면 돈 안주는 걸 죄스러워할 필요는 없다. 이거는 죄가 안 되는 거기 때문에. 내가 주고 싶으면 주고, 주기 싫으면 안 주면 되지, 줘야 될 자기가 의무가 있는 거는 아니다. 그런데 부모가 되어서 자식 어린 거는 돌보지 않으면 이건 돌봐야 되고, 안 돌봐야 되고, 그런 게 아니야. 돌보지 않으면 죄가 되는 일이야. 돌보는 당연한 거고.

 

그래서 부모님께 감사합니다.” 하고 절을 하고, 전화 오면 어머니 그런 넋두리 들어드리되, 듣기 싫으면 그냥 어머니 나 바빠요.”하고 끊으면 돼. 그러니까 그걸 갖고 힘들어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자기는 지금 애증이라고 그래. 그러니까 부모를 좋아하고, 또 미워하고, 이거는 중생심에 속한다. 그래서 내가 볼 때는 큰 걱정 없고, 그런 늙은 부모가 아들 걱정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관습이지, 그걸 자기가 간섭해서 왜 잘해주는 나는 안 해주고, 못해주는 아들 좋아하냐? 그건 남의 인생에 자기가 간섭하는 거야.

 

부모라도 남의 인생에 간섭하면 안 돼. 그래. , 알겠다고 해도 별로. 절을 좀 많이 해요. 그런데 그것도 해결 못한 게 왜 절을 안 해? 이게 해결 될 때까지 절을 해야 돼. 절을 딱, 해서 부모가 어떻게 말해도 감사합니다할 수 있는데 까지 절을 하고, 그 다음에 부모에 부담이 있으면 이것도 내 수행이 안 되어서 그래. 집착하기 때문에 부담이 있는 거요. 부모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부담을 줄 필요가 없어요.

 

어제 진주에서 제가 법회 하는데, 부모님이 장애인이고 혼자 계셔서 딸이 엄마모시고 산다고. 그러니까 부모에 대해서 부담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장애인이고, 병들은 부모를 딸이 혼자 모시고 있으면, 이걸 효녀라 그러죠. 효녀 아니에요. 불효요. 왜 그럴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자기도 결혼해서 살고 싶은데 엄마 때문에 결혼 못한다. 그럼 자기 인생을 망친 게 엄마다. 그럼 이게 아무리 엄마가 불쌍하고 도와준다 하지만, 이게 밑 마음에 원망이 있어요? 없어요? 그럼 불효에요.

그거 보다는 어떤 게 효자냐? 그냥 지 살도록 놔놓고, 자기 결혼해서 사는 게 훨씬 효자다. 어떻게 이 세상에 부모가 자식의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내가 버려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은 행복하기를 원하는 게 부모 마음이에요. 물론 부모도 머리가 자기 욕심에 빨리면, 자식의 인생을 장애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러니까 이 부모를 돌보는 건 좋은데, 부담 갖는 거는 불효의 행위에요.

 

그러니까 돌볼 수 있으면 돌보고, 못 돌보면 안 돌보면 되지. 부담으로 느끼면 안 된다. 부담으로 느끼는 건 곧 불효가 되는 거요. 그러니까 할 수 있으면 해드리고, 못하면 죄송합니다.”하고 끝내도 죄가 안 된다. 그래 그 홀어머니, 그렇게 오도갈 때 없는 그런 장애인 부모를 처녀에게도 내가 이렇게 말하는데, 자기는 완전히 쓸데없는 짓 하고 있는 거요. 자기 집착이지 부모가 아니에요. 자기 집착.

 

그러니까 한때 어머니에게 칭찬 못 받았던 어릴 때의 상처가 지금도 칭찬 못 받으니까, 상처가 되어서 괴롭고 미워하고, 그 어릴 때 칭찬 못 받은 그거, 보상받으려고 잘해주고 칭찬받고 싶은데 안 해주고. 지금 그런 옛날 상처에 지금 자기가 매어서 전전긍긍하는 거요. 그러니까 부모에 대한 감사기도를 해서 옛날 상처를 다 지워버리고, 자기가 자유로워져야 돼. 수행자는 자유로워져야 돼.

 

부모님이 이렇게 말하든, 저렇게 말하든, 거기에서 그냥 한 노인이 그렇게 살아온 한 노인이 늙어서 이런 걱정, 저런 걱정 하는 넋두리, 이런 요구 저런 요구하는 노인을 보면서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주고, 못 도와주는 건 못 도와주고, 그렇게 살면 되지 그걸 부담으로 가질 필요도 없고, 그걸 잘못했다고 지금 그 노인한테 이래라, 저래라.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그거는 비보고 오지마라는 일보다 더 안 되는 일이오.

 

숫제 비를 내가 마음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되는 게 더 빠를 거요. 그런 요구는 지금 불가능한 요구를 하고 있는 거요. 그러면 자기만 괴롭지. 그거를 자식의 이름으로 효니 어쩌니 그런 이름으로 덧칠을 하면 안 돼. 그건 이치에 어긋나는 행동이오. 알았어요? 으흠. 그래도 저런 사람이 어떻게 불교대학을 졸업했지?^^ 또 불교대학을 졸업했으니까 여기까지 왔겠죠? 그죠? 오늘 다시 깊이 생각해야 돼. 자기 생각, 스님 얘기를 잘 듣고 탁 바꿔야지, 그 옆에 있는 보살님처럼 또 자기편 안 들어줬다고 또 기분이 나빠서 그러면 안 돼. 이게 다 자기편 안 들어준 거 같지만, 결과적으로 질문자 편이야. 질문자가 어떻게 행복해지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남을 편드는 게 아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