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일묵스님_팔정도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_제4회 마음의 두 얼굴(전도몽상과 삼법인)(20:30)

Buddhastudy 2011. 10. 9. 20:46

  방송 보기: 불교TV

 

지난번에 마음과 대상이라는 그 주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러니까 불교적으로 보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간다고 하는 삶을 조금 불교적으로 분석을 해 보면, 우리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지속적으로 어떤 대상을 만나면서 그 대상과 관계를 하는 것이 사실은 우리 삶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시간 말씀드렸듯이 마음이라고 하는 뭔가를 아는 것이 있고요, 그것에서 알아지는 것이 있는데. 아는 것과 알아지는 것은 두 개가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죠? 항상 뭔가 알아지는 것이 있다 그러면 아는 것이 있고요. 아는 것이 있다 그러면 그거에 의해서 알아지는 것이 또 있게 마련이겠죠. 그죠?

 

그래서 이 마음이 항상 대상을 아는 그 과정들이 지속되는 것이 우리의 삶인데, 그런데 이 대상이라고, 밖에서 있는 어떤 현상들보다도 더 중요한 거는 뭐냐 하면 우리 마음이 대상을 어떤 상태로 만나느냐? 어떻게 보면 제일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이 다들 잘 아는 비유가 있는데요, 어떤 두 사람이 논을 가는데, 한 반쯤 갈고 나서, 한 사람은 아직도 반밖에 못 갈았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또 한사람은 벌써 반을 갈았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그죠? 그러면 그 상황이라는 것은 똑같은데 그 상황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 마음을 기울이느냐에 따라서 우리 삶이 대게 달라질 수가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행복이나 불행이나 이런 것들이 어떤 대상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 마음이 그 대상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느냐에 의해서 제일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불교에서는 이 마음을 어떤 식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어떤 식으로 마음을 써서, 항상 선한 쪽으로 우리 삶의 유익한 쪽으로 마음이 일어나게 하느냐? 이런 부분이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마음을 기울이면 우리 삶이 이런, 소위말해서 행복에 해로운 쪽으로 가게 되고, 어떻게 마음을 기울여야 우리 삶의 유익한 쪽으로 가느냐?

 

여기서 어떤 대상을 만나면서 최초에 거기에 마음을 기울이는 거기에 따라서, 우리 마음이 선한 마음이 될 수도 있고, 불선한 마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초기불교에선 뭐라고 하냐 하면 연희소마나식하라. 이런 말 들어보셨어요? 우리나라 말로 하면 여리자기. 이런 말을 쓰는데요, 이치에 맞게 마음을 쓴다 이런 뜻으로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지혜에 입각해서 지혜롭게 마음을 쓰는 것. 이거를 뭐라고 번역을 하냐 하면 현명한주의력이다. 이렇게 번역을 합니다. 현명한 주의력. 그리고 또 하나는 어리석은 주의력이라는게 있어요. 이 반대가 그죠?

 

어리석게 주의력을 가져 가면은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고, 현명하게 주의력을 가져가면 선한마음이 일어나는. 그런 분기점. 똑같은 마음이 대상을 만날 때 대상을 어떤 식으로 주의를 기울이냐에 따라서, 어떤 면에서 첫 단추를 어떻게 끼느냐에 따라서, 그 뒤에 벌어지는 것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거죠. 그래서 이것을 중국에서는 선사어록 같은데 보면 한마음 착하면 부처마음이고 한마음 어리석으면 중생마음이다. 그런 말 하는거 들어보신 적 있죠 그죠? 그거하고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초기불교에서도 똑같은 그런 것을 이야기 하는데, 우리가 어떤 대상을 처음 만날 때, 그 대상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주의를 기울이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은 완전 천차만별로 달라진다는 거에요.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은 왜냐하면 보통사람들은 이런 어리석은 주의력으로 간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부처님의 지혜를 배우다 보면 이제 항상 현명하게. 지혜롭게 어떤 주의를 기울이는, 그런 것을 우리가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서 어떻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우리 마음을 어떻게 쓰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바람직하고 지혜로운 것인가? 하는 거에 대해서 공부를 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삶을 산다는 것은 결국 마음과 대상이 만나는 과정인데, 이 마음이 대상을 만날 때 항상 지혜롭게 어떤 주의를, 현명한 주의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노력을 하는 것이 일상생활 속에서 그런 것이 이루어지는 그게 어떤 면에서는 위빠사나수행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상 마음의 주의를 현명하게 기울이는 것, 그러면 우리가 어리석게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이 도대체 뭐를 의미하는 것이고, 현명한 주의력은 뭐를 의미하는가? 여기에 대해서 간단히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기본적으로 불교에서 지난번에 한번 말씀드렸듯이 선, 악 이런 말 쓰잖아요. 그죠? 선이다, 악이다, 이런 말을 쓰는데, 악이라는 표현보다는 불선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게 좋아요 . 왜냐하면 빨리어에서 선이라는 용어는 꾸살라는 용어로 씁니다. 이 꾸살라라는 것은 유익하다, 또는 능숙하다, 이런 뜻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어린 시절에 풀 잡아 보셨죠. 풀 잘못 잡아서 이렇게 하면 손이 베잖아요. 그죠? 그런 것처럼 주의를 기울여서, 능숙하게 해야 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꾸살라라는, 그런 풀이름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열반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고, 유익한 마음의 형태를 꾸살라, 선이라고 이야기를 하고요, 아꾸살라 그러면, 아라는 게 부정어거든요? 유익하지 않다. 해롭다 이런 의미로서 불선한 마음, 또는 이걸 중국에서 악이라고 번역을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악이라는 의미보다는 불선이라는 의미가 조금 더 좋습니다. 그래서 이런 열반을 해롭게 하는 마음의 형태가 있고, 열반을 열반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는, 유익한 마음형태. 그 두 가지를 우리가 불교에선 선이다 불선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요. 그런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는 그 근본 뿌리가 있습니다.

 

가장 밑바탕에 첫 단추를, 아까 말했듯이, 우리가 주의력을 어떻게 주느냐에 따라서 첫 단추를 어떻게 끼느냐에 따라서, 뒤에 일어나는 마음들이, 그런 불선한 마음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처음에 현명하게 주의를 두면, 선한마음으로 갈 수가 있는데. 그 불선한, 어리석은 주의력의 대표적인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착가하는, 이게 근원적인 착각이죠. 그리고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사실은 그게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닌데, 이것을 행복이라 생각을 하고, 그것을 추구를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전형적인 어리석음, 어리석은 주의력에 해당하고요.

 

그러니까 이거는 뭘 의미하냐 하면은 사실을 사실 그대로 못보는 거에요. 있는 그대로, 사실을 사실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내 어떤 욕구에 의해서, ‘이거는 행복이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거라고도 할 수 있죠. 또 자기 집착에 의해서 행복이라고 우기는 거죠. 그런데 실제는 그것이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이라고 우기는 거, 그래서 우리가 사정제에서 처음이 뭡니까? 고성제잖아요.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이 본질적으로 보면 이걸 행복이라고 하기 어려운데. 그래서 부처님께서 삼계가 화택이라 그랬단 말이에요. 그런데 태어남이란 자체가 고의 시작이고, 모든 고의 근원인데, 구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이게 전형적인 착각, 어리석음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런데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힘입니다. 그러니까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사실인 것을 사실이 아니라고 이야기 하지도 않고,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지혜, 또는 선한 마음에서는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초기불교 용어 중에 위빨라싸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위빨라싸. 이 위빨라싸라는 용어는 뭐냐하면 전도됐다. 뒤바꼈다. 이 말이죠. 반야심경에서 전도몽상이라고 하잖아요.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이라 하잖아요? 그죠? 이 전도몽상을 멀리 여읜다. 원리라는 것이. 그러면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이야기 하는 건데.

 

이 전도된 거라는 것이 뭐냐 하면, 이렇게 돼 있는 것이(손바닥 위아래로 뒤집으며 설멸하심) 뒤바꼈다는 뜻인데, 영원하지 않는 것을 영원하다고 보는 것이 이게 전도된 겁니다. 그리고 원래 본질이 괴로움인 것을 행복이라고 보는 것, 그리고 자아가 없는 것, 우리가 실체라고 하는 것이 없는데도 그것이 자아가 있다고 보는 것, 이것이 전도 된거죠. 그죠? 그리고 자아가 없는, 우리가 실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데도 그것이 자아가 있다고 보는 것. 이것이 전형적인 전도된 마음이고요, 그 전되 된 것을 바로 잡는 그 과정이 바로 지혜의 작용에 의해서 그게 바로잡혀 진다는 거죠. 그래서 그게 바로잡히면 영원하지 않은 것은 영원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고, 괴로움인 것은 괴로움으로 보고, 또 자아가 없는 것을 자아가 없는 것으로, 사실을 사실그대로 보는 것, 이게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가 일어나는 가장 근원은 원인은 뭐냐하면 어리석음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무명이라 하죠. 이 어리석음은 불교에서 말하는 어리석음은 사성제나 연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건 한마디로 쉽게 말씀을 드리면 처음 대상을 만난 때 대상에 대해서 잘못 아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릇되게 아는 것. 아까 말했듯이 예를 들어서 시계를 볼 때, 이 시계 자체가 그냥 어떤 물질들이 모여서 이런 기능을 하는 어떤 부속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인데, 마치 이것이 실체가 있는 것처럼, 시계라고 하는 실체가 있는 것처럼 받아들인다면 이것을 시계라고 계속 고집을 하게 되고, 시계의 본질을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이런 것들이 전형적인 어리석은, 대상자체를 잘못 이해한 거죠. 이 시계라고 하는 것은 어떤 적당한 요소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건데, 이것을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이해를 하는 거죠. 이런 것이 전형적인 어리석음이다. 그러니까 그건 대상을 잘못 아는데, 그 잘못 아는 것 때문에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받아들이고, 또 괴로움인 것을 행복이라고 받아들이고. 이런 왜곡이 일어난 거라는 거죠. 전되 된. 전도몽상이 일어난다는 거죠. 그래서 어리석음은 대상을 잘못 아는 것, 대상을 잘못 안다는 것은 넓게 이야기하면 세상을 잘못아는 거고, 세상의 진리를 모른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됩니다.

 

진리라는 것은 사성제나 부처님께서 염기로서 설명을 하셨잖아요. 그죠?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니까, 자기 식으로 이해를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어떤 진리에 맞게 이해를 하는게 아니고, 자기 입맛대로, 자기 편한 대로, 이해를 하고 그것을 검정 과정을 거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짜 맞나? 안 맞나? 그냥 단지 내가 생각하는 걸 맞다고 생가하고 그것을 고집을하게 되죠. 이런 것들이 전형적인 어리석음입니다. 일단 그런 어리석음이 일어나게 되면, 이것을 잘못본거에 대해서 이것을 예를 들어서, 아주 귀한 것, 좋은 것, 사랑스러운 것. 이렇게 보고 그것을 좋게, 사실이 아닌 것을 보고나서는 그것을 집착을 해요. 집착을 하고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은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죠.

 

또 그런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우리마음을 어리석게 만들어 버립니다. 계속 악순환이 이루어지는 거죠. 끊임없이, 그죠? 그래서 그 어리석음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버리는 것은 나중에 조금 있다가 설명을 드리기로 하고요. 전도의 전형적인 형태는 위빨라싸라고 하는 전도몽상. 전도몽상의 전형적인 형태는 무상함과, 다시 말하면 영원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상,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어떤 일어나는 번뇌의 뿌리를 보면은 다 이런 것이 바탕이 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돈이나 명예. 이런 걸 좋아한단 말이이에요. 보통 일반적인 사람들이, 그죠? 돈이나 명예라는 것을 좋아하는데,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서 집착을 하고 이런 것이, 알고 보면 돈이나 명예, 이런 것이 우리가 얻으면 영원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것이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꺼라고하는 착각이 숨어 있을 수도 있어요. 내가 만약에 돈을 100억을 들고 있다. 그러면 이 돈을 내가 평생, 영원히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걸 집착할 수도 있어요. 또 권력을 지닌 사람들은 길어봐야 5년인데, 5년이라는 세월을 영원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영원히 내 권력을 갖고 있는, 마치 절대자인 것처럼. 이렇게 생각을. 이것도 그렇게 하면서 그거를 집착하고 자만을 일으키고 이렇게 하는 것이, 그 밑뿌리를 아주 세밀히 관찰을 해 보면, 그 속에는 자기가 얻은 이것이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어기석음이 숨어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거를 보기는 쉽지 않아요. 대부분이 나타나 현상만 보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가 얻은 이익이 있잖아요. 그런 이익도 뭔가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거.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탐착을 일으키고, 그런 집착과 그런 것들을 일으키게 하는 거죠. 그죠?

 

그래서 이 무상한 것을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첫 번째 그 어리석음의 한 형태고요. 두 번째는 괴로움을 낙으로 생각하는게 있습니다. 이거의 전형적인 거는 뭐냐하면 감각적 욕망, 우리가 오용락이라고 이야기하는거 있잖아요? 맛을 즐기고, 또 잠을 즐기고, 또 성욕이라든가 남녀가 이렇게하는 그런 걸 즐기고 이런 것들은. 대부분 욕계에 사는 사람들이 이걸 행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성과 노는 것, 이것만큼 즐거운게 없죠. 그죠? 그리고 권력, 명예, 식욕, 이런 것들 맛에 대한 탐착, 이런 것들을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는데.

 

부처님께서는 감각적 욕망이라는 것을 깊이 관찰을 해 보니까, 이 감각적 욕망이라고 하는 것이 본질이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아주 날카로운 이 칼의 발려 있는 꿀과 같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거는 달콤하긴 해요. 감각적 욕망은. 우리에게 달콤함과 즐거움을 주기는 하는데. 이 감각적 쾌락이라는 것에는 집착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이 사라졌을 때 오는 고통이 크단 말이에요. 그죠? 요번에 예를 들어서 큰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갑자기 가까운 친지를 잃었다거나 자식을 잃은 이런 분들이 계시잖아요?

 

그런분들은 기본적으로 가족에 대한 애착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일을 당하면 굉장히 큰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약에 가까운 사람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큰 아픔이긴 해요. 그렇지만 거기서 한걸음 더 조금 더 지혜롭게 그 상황을 판단한다면, 누구나 태어난 사람이 죽지 않는 법은 없습니다. 누구나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인연에 따라 흘러간, 만약에 그런 상황이 된 것을 우리가 조금 이해를 한다면, 그 고통은 훨씬 적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고, 나한테만 죽고, 내 것만 하냐? 이렇게 원망을 한다면, 그 원망이라는 것을 누가 들어주지도 않고요. 그렇게 하면은 고통은 더 커집니다.

 

그래서 그런 감각적 욕망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이 있어요. 즐거움이긴 하지만 그것이 지속적으로 그것이 사라졌을 때 오는 고통이 있고, 또 감각적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만큼 나를 만족시켜주기 못합니다. 하나를 얻으면 두 개를 얻고 싶고, 요즘 보면 돈 많은 사람들이 보면 열 살 안 돼 애들이 수백억씩 갖고 있는 경우도 많잖아요. 그죠? 그렇게 큰 부를 축적한 사람들일수록 남들이 별로 가지고 있는 않는 몇 개가 탐이나요. 그게 탐욕성의 본성이란 말이에요. 백 개를 가지고 남이 하나가지고 있는 거를 뺏고 싶은거, 더 가지고 싶은거 이게 탐욕의 본질이기 때문에.

 

탐욕이라는건 만족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감각적 욕망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의 달콤한 면만 보고, 이것의 위험성을 파악을 하지 못한다면, 계속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이게 행복이라고 우리가 생각을 할 거란 말이죠, 그죠? 그걸 행복이라고 추구하는 한에 있어서는, 적어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 사람은 결코 행복을 얻을 수는 없어요. 이 생에는 항상 헐떡거리다가 일생을 보내고, 그러다가 이 생을 마치면 또 그 감각적 욕망의 과보로서 악처에 태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