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6)

[법륜스님 즉문즉설 1156회] 성당에 다니고 있는데 절에 다녀도 될까요?

Buddhastudy 2016. 3. 16. 21:19



자기는 이중국적자다. 우리 정토회는 이중국적 허용해요? 안 해요? 허용해요. 굉장히 개방적인 사회요.

. 이게 이중국적 자가 겪는 고뇌인데, 마찬가지에요.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랐지만, 미국 가서 오래 살다보니 미국사람이 되었어. 그래도 그 사람이 미국에서 태어나서 미국에 사는 사람하고 같을까? 안 같을까? 안 같아요.

 

항상 한국에 미련이 있어요. 늙으면 한국에 와서 살아야지. 막상 한국에 와서 살면 못살 거 같아. 사회 시스템이나 여러 가지로 자기 어릴 때하고 너무 많이 변해서, 못살 거 같아. 그래서 , 안되겠다.” 미국에 다시 돌아가도 또 거기도 100%정착이 안 돼. 어차피 몸은 아마 미국에 살 거예요. 그런데 마음은 늘 한국에 미련을 못 버리고, 숨넘어갈 때까지 대부분 다 그래요.

 

그러니 자기도 이중국적 자는 어쩔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정토회는 이중국적에 대해서 굉장히 열어놓고 사니까, 성당 가서 봉사하고 싶으면 성당 가서 봉사하고, 정토회 와서 하고 싶으면 정토회에서 하고. 그런데 지금 정토회에서 이 수행을 한 5년 물이 들었는데, 특별히 누구하고 틀어져서 마음 상하지 않는 이상은 성당 가서 정착하기는 내가 보기에는 조금 어려울 거 같은데. 이미. 왜냐하면 이런 법문 듣고 하다가 형식적인 그런 거 하는 거, 사람들은 참 좋고 봉사는 되는데, 그 형식적으로 하는 걸 받아들이기는 이미 좀 어려워 졌어.

 

그런데 또 자기가 태어나서 시골 좋은 친구들 다 한국에 있는 것처럼, 미국에서 사귄 친구는 깊이 있는 친구는 아니잖아. 그런 것처럼, 자기가 거기서 40년간 생활했기 때문에 친구나 뭐나, 인정 적으로 생각하면 다 사람이 전부 거기에 있어. 그래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어릴 때 사귀었고, 젊을 때 사귄 친구들 하고의 관계라는 거를 벗어나기가 어려워. 그래서 거기가 또 그립고, 가보면 또 이런 저런 마음에 안 들어 또 오고 이러니까. 자꾸 정리하려고 하지 말고.

 

어차피 이거는 존재 자체가 그렇기 때문에 정리하려고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정리되면 그때 가서 따라 하고, 여기서 앞으로 한 10년 더 활동을 하면 여기서 사귄 사람들이 더 친구가 되고, 거기 사귄 사람들은 옛날 초등학교친구처럼 느껴지면 그때 옮기더라도 지금은 그렇게 정리하겠다. 이런 마음 내지 말고.

 

그러니까 사람 친구사귀고 뭐하고 하는 거는 거기 가서 하고, 그 다음에 활동하고 법문 듣고 수행하는 건 여기서 하고, 아무 이중국적에 여기는 문제가 안 되고, 예수님은 훌륭하신 수행자다. 이렇게 볼 수가 있어요. 죽음 앞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신 그런 분이니까, 여기선 다 그런 것도 수용을 하는 거니까, 그런 마음으로 활동을 하되, 성당에 가서 자기가 자꾸 이렇게 말하면 안 돼.

 

자꾸 정토회 가자든지, 불교 믿어.” 이런 말은 하면 안 돼. 그러면 자기가 거기에서 약간의 외톨이가 돼. 성당에 안 나오는 거 까지는 괜찮은데, 그런 말하면 외톨이고, 여기 딴 절에 다니시는 분들도 마찬가지에요. 가서 자꾸 오라고 하면 안 돼. 그러면 거기 주지스님이 볼 때는 자기 가는 것만 해도 약간 섭섭한데, 자꾸 사람을 한명 빼내고, 두 명 빼내고 이러면, 내가 볼 때는 여기 좋아서 그러지만, 그거는 굉장히 신경 쓰이는 일이고, 의리 없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자기가 괴로워서 그래서 나한테 물어. “, 힘들어 죽겠는데 어이하면 되냐그러면 이거 법문한번 들어봐라. 이 책 한번 봐라. 깨달음장에 갔다 와라. 갔다 와서 자기가 좋다고 나오는 건 괜찮은데, 억지로 끌고 오는 건 안 돼. 그러니까 거기 있으면서 그냥 전해줄 수는 있어. 오라 가라 하는 거 보다는, 이 책 한번 읽어봐라든지, 이렇게는 할 수가 있어.

 

그러니까 이 분은 법적인 측면에서는 불법이 좋은데, 문화가 아직은 덜 되었고, 친구가 그 곳에 있고, 정서가 그렇기 때문에 겪는 고뇌니까, 이중국적을 가지시고, 크리스마스나 무슨 행사 있거나 하면 거기도 가시고, 보시도 좀 하고, 친구들하고 자꾸 가자소리 하지 말고, 그냥 좋은 거 있으면 이렇게 전해주고, 자꾸 어느 게 옳으니 그르니, 어느 게 좋으니 나쁘니 접근하면 다 기분나빠해.

 

그러니까 그렇게 접근하지 말고, 이런 공부를 하면. 천주교신자가 내담자중에 깨장 왔다가 도로 성당 가는 사람 많다는 거 알아요? 종교에 대해서 굉장히 오히려 다니다가 부정적이 되었다가 오히려 깨장하고 나서 성당에 나가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내가 성당 다니다 안다니는 사람 가끔 내가 성당에 데려다 주거든요. 크리스마스 날 데리고 가요. 그런데 이렇게 교류를 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해서 이런 건 형식은 중요 안 해요.

 

그러니까 중요한 건 부처님의 가르침, 그건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해요. 그러니까 그 법에 의해서 자기 문제를 풀어야 돼. 성인은 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부모는 자식을 걱정해야 되지만, 성인은 중생을 걱정하지, 우리가 부처님 예수님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까 우선 내 인생에 어려움을 해결하고. 그래서 자기가 더 성인이, 자기도 성인이 되면, 그때는 이런 문제, 저런 문제가 해결될 거요. 이중국적이 아무 문제가 없든지, 가끔 고향으로 돌아가듯이 아이고 법은 좋지만, 난 고향 가서 친구들하고 어울려 살다 죽어야 되겠다.” 이렇게 정할 수도 있고.

 

안 그러면 아이고, , 양다리 걸치고 살게 있겠나. 그냥 오래 사는데 살아야지.” 지금은 5년 밖에 안 되었지만, 앞으로 10년 더 지나면, 여기 다녔던 거나, 천주교 다녔던 거나 경력이 비슷해지고 시간이 더 흐르면 여기가 세월이 더 많으면 친구도 여기도 더 많아지고, 그립기는 하지만, 여기 새로 사귄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이렇게 되면 저절로 또 교통정리가 될 수도 있고, 그렇게 편안하게 생각하세요.

 

지금은 그런 거 따지지 말고, 마음공부하고, 여기 봉사라는 게 다 세상을 위해서 하는 일 아니오. 그죠? 그렇게 하시면 되요.^^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우리는 목표는 뭘 빌어서 도움을 얻는 게 아니라, 내가 그 어떤 것도 감당하는 자가 된다. 그게 수행자에요. 그러나 역시 목표는 그렇지만, 우리 현실은 다 힘들면 좀 빌고 싶어요. “, 굉장하다. 스님도 비는 게 있는데.” 스님도 이렇게 정초에 다니면서 늘 틈만 나면 어느 절에 가서 시간이 안 나서 그렇지, 시간이 나면 가서 참배하고 보시하고, 기도를 해요. 정초에도 내가 하루에 5개씩 절을 조그마한 암자들이 다니면서 기도하는데. 스님은 뭣 때문에 빌 일이 있을까? 장가가려고 빌까?

 

스님은 통일에 대해서는 내가 열심히 하지만, 내 힘으로는 부족하니까, 불보살의 힘이든, 하나님의 힘이든, 천신의 힘이든,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있으면 좀 도와 달라하고 빌 일이 있고, 북한이 좀 굶어죽는 거는 면해줬으면 좋겠다. 이런 거는 내 힘으로 안 되니까 열심히 하면서도 좀 빌기도 해요. 나도 비는데, 여러분들이 안 빌 일이 있겠어? 그러니까 여기서 개인적으로 비는 거는 용인해요. ‘정토회에서 빌면 안 된다.’ 이런 거 없어요. 다 비는 현실은 인정을 해요.

 

그런데 집단적으로 비는 거를 자꾸 강조는 못하게 되어있어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스님도 빌어서 이루어진 게 많이 있다고 그랬지. 그래도 그런 얘기 안하지. 그런 얘기는 안하지. 그러니까 여기서는 수행을 근본 목표로 하니까 그걸 주로하고, 나머지 현실에 신앙적인 것도 다 수용을 해요. 그러나 그걸 우리는 종지를 중요시해. 문화는 지금의 불교하고 많은 게 달라졌지만, 종지는 우리는 조계종의 종지, 선종의 종지를 탁, 지켜요.

 

여러분들이 깨달음장 할 때, 뭐 어디 이것저것 구질구질하게 교리얘기 합디까? “니 누고?” 이렇게 얘기하잖아. 그죠? 이게 선의 종지요. “시삼마. 이게 뭐냐?” 이렇게. 선의 종지를 갖고 있어요. 그러나 형식은 그거는 마음과 마음을 보고, 지금 여기, 깨어있는 거지. 지금 여기 깨어있는 거지 여타의 문제는 그렇게 옳으니 그르니 논하지 않는, 그런 입장이에요. 그래서 선불교도 처음 나올 때 불교가 너무 지식화 하고 학문화하는 거에 반대해서 불립문자를 세웠잖아.

 

불립문자.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문자가 지식을 말하는 거요. 그래서 지식을 세우지 않는다. 이 말이오. 지식으로는 해탈할 수가 없다. 지식을 통해서는 지혜를 증득할 수가 없다. 이런 입장을 갖고 있는 거요. 그러니까 불교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냐? 이건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 말은 불교의 지식 필요 없다.’ 이렇게 또 오해하시면 안 돼요. 그래서 선사들의 얘기 중에는 자기가 법화경을 3천 번 읽었다는 법달스님에 대한 얘기나, 내가 금강경에 대해서는 뭐든지 다 안다하는 이런 사람들이 지식에 치중되어 있다가 선사를 만나서 그걸 버리고 지혜를 증득하는 그런 얘기도 많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이 불교대학, 경전반, 교전에도 육조단경이 들어있죠. 그것은 선의 종지를 우리는 계승을 해요. 그래서 우리가 불교대학 교재가 부처님의 일생을 중요, 부처님 중요시하고, 부처님의 근본가르침, 근본 계율, 거기에 따른 아함경 중요시하고, 그거로만 가면 테라밧다, 태국 불교랑 우리는 그렇게 해야 돼. 그런데 우리는 거기서 어떤 불교로 갔다? 대승 불교로 갔으니까 우린 소승 불교가 아니고 대승불교니까 대승불교의 가장 중요한 게 금강경, 반야심경이오.

 

그런데 우리는 거기서 다시 선불교로 왔어요. 우리는 천태종도 아니고 법화종도 아니잖아. 조계종이잖아. 조계종은 한국 불교의 이름이지 근본은 선종이라는 거요. 달마선종.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혜능대사의 법보단경, 요걸 반드시 여러분들이 기본 공부를 하도록 하는 거요. 그래서 종지가 분명한 거요. 그래서 스님이 평상시에는 아무 얘기 안하다가 수계 딱 할 때는 얘기하잖아. 부처님으로부터 마하가섭존자로부터, 아난다 존자로 해서, 부처님의 정법이 어떻게 흘러와서 용성진종으로 동원 완규로 불심도문으로 지금 법륜에 이르렀다. 분명히 딱 하잖아요.

 

평상시에 그런 얘기 안하잖아. 그러나 딱 종지를 분명히 한다. 이런 얘기요. 그러나 나머진 다 포용하고 함께하는 것. 이거는 이심전심,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는 거요. 그래서 우리가 불교 안에서도 선은 삼처전심, 교외별전, 가르침 밖에 별도의 전했고,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고, 3군데서 전했다. 삼처전심. 그런 관점이니까 종지는 분명히 하되, 우리는 세상의 모든 진리를 종파를 떼어놓고 종지를 뛰어넘고 과학까지도 함께해서 어떻게 우리가 해탈할 거냐. 자유로운 사람이 될 거냐.

 

성당에 다니시는 분을 얘기한다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그런 세계로 우리가 나아가자. 이게 우리의 하나의 방향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계에서 지금 옛날에는 얼굴이 검다고 차별하고, 여자라고 차별했는데, 이제 세상이 어떻게 되었어요? 여자라고 차별하면 되나 안 되나? 얼굴이 검다고 차별해도 안 되고, 조선 사람이라고 일제시대에 얼마나 조센징이라고 차별했어요?

 

그래서 어느 민족이라고 차별해도 안 되고,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차별해도 안 되고, 신체장애라고 차별해도 안 되죠. 옛날에는 조금만 뭐하면 저 병신.” 이랬잖아. 요즘 그러다가는 큰일 나요. 그러면 안 되고. 요즘은 어디까지 왔어요? ‘성적소수자도 차별하지 마라.’ 이렇게 까지 왔잖아. 그죠? 그런데 과거에 자기가 어느 종교 다녔다. 이걸 정토회 안에서 차별해야 될까? 안해야 될까? 안해야 되겠지. 과거에 불교든 과거에 기독교든, 천주교든, 종교가 없었든 그런 거를 논해서는 안 된다.

 

, 저 분은 경상도 사람이구나. 저 분은 전라도 사람이구나.’라고 알뿐이지, 경상도라고 전라도라고 차별하면 충청도라고 차별하면 안 되는 것처럼, 그 사람이 어디에서 태어났든,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든 어떤 종교를 믿었던 어떤 걸 했던, 그런 거는 우리가 논할 필요가 없고, 그 어떤 사람도 지금 이 법을 공부하면 행복해질 수가 있다. 우리는 세상에 모든 사람이 좀 더 자유롭고 행복의 길로 나아가도록 도와주자. 인연을 맺어주자. 이런 취지에요. 저 북한 사람까지도 행복해지도록 도와주자.

 

, 정진 열심히 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