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6)

[법륜스님 즉문즉설 1159회] 중고등학생을 둔 엄마의 역할

Buddhastudy 2016. 3. 21. 18:13


  

아이들이 몇 살이오? 엄마가 없는 게 나아. 좀 빠져 줘. 제발. 수도 없이 얘기하잖아. 세 살 때까지는 모든 것을 버리고, 누구를 위해서 살아라? 아이를 위해서. 몇 살 때까지만? 3살 때 까지. 그런데 거꾸로 하는 거요. 3살 때는 갖다 버려놓고, 어디 가서 제대로 안하고, 이제 필요 없다는데 와서 나 필요하지? 나 있어야지?” 이러고 와서. 오르막 올라갈 때는 짐 안 들어 주고, 내리막 내려갈 때 와서 짐 들어줄까? 이런 사람하고 똑같아. 밉상이오.

 

3살 때까지는 아이를 돌보고, 아이에게는 돌봐주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돌봐주는 거요. 필요하기 때문에. 그다음 4살 때부터는 애가 말도 하고, 걸어 다니고, 뭘 해요. 그래서 그렇게 까지 전적으로 돌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아직은 돌보는 사람 필요해.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돌봐주는 거 보다는 모범을 보여주는 게 더 좋습니다. 뭘 해주는 거 보다는 모범을 보여주는 게 더 좋다. 이런 얘기요.

 

그래서 부모라면 아이들의 롤 모델이 되어야 된다. 모범이 되어야 된다. 애가 마음속에서 이렇게 해야 된다하면, “너는?” 이런 얘기가 적어야 되요. “너는?” 이런 불만이 많으면 나중에 엄마 말을 안 듣기 시작한다. 반항이 생긴다. 그 다음에 중학교 들어가서 사춘기가 되면 가능하면 간섭을 안 하는 게 좋다. 그러니까 멀리 떨어져서 지켜봐주는 게 좋다. 20살이 넘으면 아예 없어지는 게 좋다.

 

그런데 자기는 지금 멀리 떨어져서 지켜봐주는 게 좋은 시기에 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가서 누구를 귀찮게 하려고? 그러니까 그 문제는 가능하면 멀리 떨어지는 게 좋다. 간섭을 적게 하는 게 좋다. 아까도 그런 얘기 하던데. “그럼 내 버려둘까요?”이래. 아직은 보호자가 필요해. 내버려 두면 안 돼. 그러니까 아이 하는 행동을 보고 괴로우면, 컴퓨터게임을 하든, 놀든, 뭐 하는 걸 보고 괴로우면 내 문제요. 그건 내 수행과제에요.

 

그런데 아이의 행동이 내가 볼 때 공부 안하고 너무 논다.’ 자기 생각에, 내 생각에. 그런데 괴로우면 내 문제요. 그래서 나도 그렇고 너 만할 때 나도 공부하기 싫었다. 놀 수도 있겠다.’ 이해가 되면 괴롭지는 않아요. 괴롭지는 않지만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저 때는 노는 거 보다는 공부하는 게 좀 낫겠다. 나는 놀았지만, 공부하는 게 좀 낫겠다. 내 경험에 비추어서. 이렇게 생각하면 애한테 노는 거 이해는 되지만, 나도 놀았지만, 그래도 내가 지나놓고 보니까, 공부 좀 하는 게 좋겠더라. 이렇게 권유도 하고, 조언도 하고, 적극적으로 해야 되요.

 

그런데 이때, 화가 나서, 못 봐내고, 짜증이 나서 할 때는 집착이 여기 개입이 되어 있는 거요. 그러면 잔소리가 되요. 잔소리는 교육 효과가 전혀 없어요. 좋은 말도 듣기 싫으면 잔소리가 되고, 듣고 싶은 말이 되면 조언이 되고 그래요. 그러니까 조언이 따로 있고, 잔소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오. 듣기 싫으면 잔소리가 되는 거요.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마라가 아니라, 뭘 하지 마라? 잔소리를 하지 마라.

 

내 감정 때문에 하면 잔소리가 되기가 쉬워요.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좋은 길로 안내해줘야 되요. 그러나 내거를 강요하면, 아이는 싫어하면 그건 잔소리가 된다 이거요. 그것이 엄마의 사랑이에요. 보호자로서 바른 길로 인도해야 되고, 또 아이가 스스로 일을 해 나갈 수 있도록 지켜봐줘야 된다. 그런데 항상 내 식대로, 내가 원하는 데로 아이를 만들고자 하기 때문에 내 뜻대로 안되니까, 짜증내고 화내고.

 

안되니까 내 반발 때문에, “에이 네 맘대로 해라. 죽든지 살든지.” 그럼 보호를 포기하고 이런 식으로 가는 거는 부모가 아니다.

 

전자는 뭐였지? 법당에 스님도 안 계시고, 대상이 총무밖에 없다. 총무가 아까 얘기했잖아. 말이 많고, 시끄럽고, 제 식대로 하고, 그러니까 그려러니 하고, 놔두는 게 제일이지 뭐. 법당이 저 총무 꺼도 아니고 그러니까, 법당이 총무 꺼도 아니니까, 총무 싫다고 내가 법당에 안 나올 이유는 없잖아. 어제 어떤 노보살님이 그랬어요. 거의 한, 80이 다 되어 가시는 분인데, 절에 오래 다녔는데, 스님이 자꾸 술을 드신다는 거요.

 

그래서 스님, 술 드시지 마세요.”라고 해도, 자기 말을 안 듣는다는 거요. 그래서 자기가 그럼 드시는 거 까지는 좋은데, 저녁에 먹고 낮에는 괜찮은데, 이건 낮에부터 먹는 다는 거요. 그래서 몇 번을 얘기해도 안 되어서 아이고, 이 절에 못 다니겠다.” 이래서 그만 뒀다는 거요. 그래서 나왔다는 거요. 그래서 어떻게 되어서 정토회 다니는 거요. 그런데 그 스님이 지금 건강이 굉장히 안 좋다는 거요.

 

그래서 마음이 안 되었고, 걱정이 된다는 거요.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이런 질문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물어봤어요. “그 절에 부처님 계세요?” 하니까, 계신데. “절을 했어요? 안 했어요?” 하니까, “아이고 절 많이 했죠.” “그 부처님 뭐로 만들었어요?” 철로 만든 철불이래. 그래서 내가 철불 머리에다가 막걸리든 소주병이든 갖다 부으면, 그 철불이 움직여요? 안 움직여요?” 그랬어. 안 움직인데.

 

그러면 영험도 없는 막걸리를 먹여도 움직일 줄도 모르는 그 영험도 없는 철한테는 절을 그렇게 많이 하고, 그래도 이 부처는 술을 먹으면 그래도 비틀거리기라도 하는 부처인데, 그런데 이거는 영험 있는 부처에 대해서는 부처가 아니라 그러고, 절하기 싫다 그러고. 영험 없는 부처는 그렇게 절을 많이 했는데, 어떻게 된 거요? 내가 이랬어.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데.

 

그러니까 왜 쇳덩어리한테는 절을 하고, 그래도 술 먹고 취할 줄도 아는 산부처한테는 절을 못하고 그러냐? 그러니 당신이 그 절에서 나온 거는 그냥 내가 그 중이 내 맘대로, 내가 말 한데로 안하니까, 꼴 보기 싫어서 나온다. 이거는 우리남편이 술 먹어서 이혼하겠다는 거와 똑같은 거다. 그러니까 이건 중생심이지 불심 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

 

다시, 그 중이 술을 먹고 건강이 나빠져서 죽는다는데, 그게 왜 가슴이 아프냐? 이거야. 술 안 먹고도 지금 아픈 사람들 많은데, 그 사람들 보고 가슴이 아파야지, 왜 하필 지가 술 먹고 술 과하게 먹고, 아픈 그게 왜 가슴이 아프냐? 그 거는 이혼한 뒤에, 남편이 교통사고 나서 죽었다. 남편이 병들었다. 그러면 또 걱정하는 거와 같아. 이것도 한 중생심이다. 그러니까 보살님은 불교하고는 아무 관계없다.

 

그러니까 그 스님이 술 먹기 때문에 나온 것도 그냥 남편이 술 먹기 때문에 나온 거와 똑같은 마음이고, 또 그 스님이 아프다니까 걱정이 되는 것도, 헤어진 남편이 죽는다 그러니까 또 걱정이 되는 거와 똑같은 그냥 중생심이다. 그런데 당신이 절에 다닌다면, 절에 나이가 80이 되도록 다녔다면 조금은 수행자가 되어야 될 거 아니냐. 당신이 이걸 그 절에 나오기 전에 나한테 멀었다면, 영험 없는 부처한테는 절을 하면서 왜 영험이 있는 부처한테는 절을 못하느냐? 내가 이렇게 당신에게 말을 던졌을 거다.

 

그러니 그냥 그 절에서 안다니는 건 관계가 없는데, 그 중이 술 먹기 때문에 안 다니겠다고 하면 그건 수행자적 관점은 아니다. 또 당신이 수행자적 관점이라면 술 먹고 어떤 중생이 죽는데, 아픈데, 뭣 때문에 걱정하느냐? 그냥 그 얘기 듣고 , 술을 많이 먹으니까 저렇게 빨리 죽구나. 이렇게 그냥 생각하면 되지, 잘 죽었다고 할 것도 없고, 죽으면 안 된다 할 것도 없고, 멀쩡한 사람도 죽는 세상에, 그렇게 과하게 술을 먹었으니 죽는 거는 당연한 거다.

 

그것도 편안하게 받아들여야 된다. 나왔으면 죽었다 해도 편안하게 받아야 되고, 거기 있을 때는 술 먹었다 해도 편안하게 받아들여져야 수행자다. 있어서는 술 먹었다고 해서 나오고, 나와서는 아프다 해서 또 기웃거리면, 그건 중생심이다. 이랬어요. 그런데 그 노보살이 알았습니다.” 이랬어. 그런데 옆에 있는 보살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수행자로서 안 하고, 그냥 일반인으로서 그 얘기하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대부분 사람이 다 그래.

 

그런데 자기가 여기 온 목적은 수행자로 가기 위해서 왔나? 일반인으로 살기 위해서 왔나? 그래. 수행자로 가기 위해서 왔으면, 그렇게 마음이 일어나는 걸 보면서 , 내가 절에까지 와서도 중생심으로 보고 있구나.’ 남편보고 한때는 좋아하고 한때는 싫어하고, 아이보고 공부 잘하면 좋아하고, 공부하면 싫어하는 거나, 여기 와서 어떤 도반이나 총무보고, 내 맘에 들면 좋아하고, 내 맘에 안 들면 싫어하는 거하고 똑같은, 절 집구석에 와서도 똑같은 버릇을 내가 하고 있네. 이러면서 적어도 여기서는 중생 버릇을 좀 고쳐야 되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어야지. 안 고쳐지더라도 그렇게 노력이라도 해야 되는데, 지금 질문하는 거 보면,

 

그러니까 그렇게 일어나는 거는, 내 맘에 안 들거나 이런 게 일어나면 싫어하는 거는 그건 뭐, 다 일어날 수 있어. 그러나 그런 거를 알아차리고, 그런 것을 넘어가려는 게 수행이잖아. 그러니까 여기서 총무 하는 그런 걸 보고, 그걸 뛰어넘으면 그 공덕이 여기서 머무르는 게 아니고, 남편이 앞으로 또 일어나는 그런 일도 이 사례를 가지고, “, 이것도 수행의 과제구나.” 아이들 하는 것도 보면서 사춘기 아이들 하는 거 보면서, “이것도 또 수행의 과제구나.” 이렇게 공부가 되는 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