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6)

[법륜스님 즉문즉설 1174회] 아내와 떨어져 살아서 힘들어요.

Buddhastudy 2016. 5. 12. 06:16



 

봄날에는 놀아요. 무슨 수행을?^^

봄날은 밖에 나가서 봄놀이 하는 게 수행이에요.

 

이런 봄날은 이런 답답한 공간에 와서 앉아있는 게 아니고, 저 밖에 가서 아름다운 꽃들도 보고, 대지로부터 솟아오르는 새싹들도 보고, 또 새로운 나물도 뜯어서 맛있게 먹고, 그렇게 해서 마음을 기쁘게 갖는 게, 그게 공부지 뭐 수행이라고 이렇게 앉아서 새삼스럽게 얘기할 게 있겠어요? 자연스러움, 봄은 봄으로서 만끽하고 여름은 여름으로서 만끽하고 가을은 가을로서 만끽하고 겨울은 겨울로서 만끽하는 게 수행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하고 싶은 거 하는데, 지나치면 욕심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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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시간을 제외하고 일상생활을 어디서 많이 해요?

싱가포르에? 두바이에.

그러면 부인이 두바이로 이사를 가면 좋지.

 

그런데 희생이라고 할 거 까지는 없고, 그러니까 부인에게 솔직하게 얘기를 하면 되죠. 나 아직 젊고, 혼자 밤에 자게 되면 성적인 욕망 같은 게 일어나고, 그래서 내가 혼자 자제하기가 쉽지가 않다. 솔직하게 얘기하고, 그래서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이런 나의 처지를 이해해서 가능하면 두바이로 빨리 와서 같이 힘을 합하자. 이렇게 제안을 해서 나의 극박한 상황을 아내한테 솔직하게 얘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러니까 솔직하게 얘기하는 게 좋다. 솔직하게 얘기해서. 그러니까 이게 나쁜 게 아니잖아요. 예를 들면 성적 욕망이다. 그 자체가 나쁜 거는 아니라는 거요. 그러니까 그러한 욕구를, 또는 욕망을 부부가 함께 나눈다면 사랑이라고 그러고,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 쪽에서 행하게 되면 세상에서는 욕망이라고 그러거나 그렇지 않으면 타락했다고 그렇게 얘기할 뿐이거든요. 그러니까 그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고 그게 어떻게 적용되느냐에 따라서 좋다고 평가되기도 하고, 나쁘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똑같은 술이지만, 농부가 먹으면 노동하는 에너지가 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먹으면 어떤 그런 흥분제가 되어서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그 욕망이 잘못된 거는 아니에요. 그것을 사실대로 부인에게 얘기해서 부인과 그런 상호처지, 그러니까 사람이 부인하고 똑같지는 않습니다. 사람마다. 쉽게 말하면 우리들의 성적인 욕구라 하는 것도 이성에 대한 성적욕구가 있고, 동성에 대한 성적욕구가 있고, 두 가지를 다 갖는 양성적 욕구가 있고, 두 개 다 아무 관심이 없는 무성애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무성애. 현실에서는 이렇게 4가지가 있어요. 그런데 한 99%는 이성애에요. 다수가. 그럼 나머지는 소수란 말이오. 그러니까 상대가 얘를 들면 동성애자라면, 다시 말하면 이성에 대한 관심이 없잖아. 그죠? 그러면 우리가 느낄 때는 나를 사랑하지 않나?” 이렇게 오해를 할 수가 있다. 또 동시에 무성애자라면 어떻겠어요? 무성애자가 스님이 되면 아주 훌륭한 사람이오. 그런데 무성애자가 만약에 결혼을 한다면 결혼 생활에 굉장한 어려움이 있다는 거요. 예를 들면 부부관계를 갖게 되면 애기도 낳고, 육체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는 거예요. 그러나 성적인 욕구가 전혀 안 일어나니까, 그러니까 굉장히 소극적으로 대응을 하겠죠. 억지로 대응을 한단 말이오.

 

그러니까 나를 두고 딴 사람 사랑하느냐? 나한테 아무런 호기심이 없다. 이런 오해가 발생한다는 거요. 그러면 이거는 타고 나는 거니까, 그에 맞게 우리가 대응을 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이런 욕구가 있다고 상대도 똑같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든지, 내가 없다고 상대가 있는 거를 저급하게 생각한다든지, 이런데서 오해가 발생한다. 그 다음에 그 성적인 욕구가 있더라도 아주 약한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보통 평균적인 사람이 있고, 자기가 자기 성적 욕구를 통제하지 못하는 그런 강한 요구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경우는 이렇게 부부가 떨어져 있으면 사고가 나게 되어있는 거요. 그러니까 도덕적인 윤리관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통제를 못하기 때문에 오는 문제라는 거죠. 그런 경우에는 가능하면 부부가 떨어져 있지 않는 게 좋다. 그러면 어느 정도 성적인, 딴 건 다 서로사랑하고 마음은 좋은데, 성적인 것에 대해서 별로 큰 욕구가 없는 사람이다. 그럴 때는 떨어져 살아도 크게 문제가 없어요. 상호 불편이 없다. 그러니까 상호간에 불균형이 있다.

 

한쪽은 그런 성애가 강하고 한쪽은 아주 적다하면, 그 사이에 굉장한 갈등이 발생하는 거요. 없는 사람이 볼 때는 혹은 적은 사람이 볼 때는 있는 사람이 좀 이상해 보인다. 짐승 같다. 추해 보인다. 이렇게 부도덕해 보인다. 이렇게 평가되고, 그 다음에 있는 사람이 볼 때는 없는 사람에 대해서 나를 사랑하지 않나? 이런 불만이 생기고. 그러니까 이렇게 작은 문제 하나도 다양한 거요. 그 다음에 이 성적 장애가 생기면 이성에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장애는 내의를 훔쳐간다든지, 상대편 벗은 모습을 멀리서 훔쳐본다든지, 그렇게 하지 당사자 앞에는 못나서는 거요.

 

그러니까 이건 성적 욕구가 굉장히 강한데 그렇지 않고, 사람한테는 맞대응을 못하고, 그런 환자도 있고, 환자라고 할 수도 없어요. 그 부분만 그렇다는 거요. 그 다음에 그런 사람이 성적욕구에 대해서 대상을 찾을 때는 성인의 이성에 대해서는 두려움 때문에 접근을 못하고. 그래서 어린 아이들에 대해서 접근을 하는 거요. 그러니까 성인이 없기 때문에 어린아이에게 가끔 성적인 욕구를 표현하는 그런 거는 좀 범죄에 속하지만, 이런 사람은 정신적 장애에 속하는 거요. 그건 꼭 어린 아이 아니고는 접근을 못하는 거요. 그러니까 이런 것은 다 치료를 해야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상대에게 드러날 때는 어떻겠어요? 이 사람처지로 볼 때는 다 이해가 되지만, 그게 어린아이 입장에서 볼 때는 엄청난 상처고 충격이잖아요. 그러니까 사회적으로는 엄청난 범죄가 되는 거고, 성적 욕구를 제어 못해서 강제로 타인에게 표현했을 때는 우리가 말하는 성추행, 성폭행,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까? 그죠? 그럼 이건 상대에겐 엄청난 범죄란 말이오. 요즘 일반 폭행이나 살인보다도 더 형이 높은 이런 범죄에 속한다는 거요. 그러니까 자기의 신체구조에 대해서 첫째 자신이 잘 알아야 된다. 그에 맞게 환경을 만들어야 된다는 거요.

 

그러니까 부인에게 오히려 솔직하게 얘기를 하고, 그게 서로 안 맞으면 헤어지는 게 낫죠. 왜냐하면 잘못하면 두 사람 사이에 원수가 되니까. 특히 애기까지 생기면 이제 어떻게 해결책도 없어진단 말이오. 애기도 없다니까, 이 상황을 충분히 서로 공유하고, 그래서 이게 서로 안 맞으면 헤어지는 게 낫고, 그 다음에 여기 맞추어서 생활공간을 옮기는 게 낫고, 그런데 당분간 자기가 이걸 못하게 된다면 자기가 그에 대한 도덕적인 대책을 부인의 요구에 맞게 세워야 되는 거요. 그러면 그게 병원에 가면 그런 성적인 욕구를 좀 심할 때 줄일 수 있는 그런 약물치료를 받는다든지, 안 그러면 본인이 혼자서 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을 찾는다든지, 이렇게 해서 부부의 신의에 금이 가지 않도록 하는 게 좋다는 거요.

 

안 그러면 자기는 아내한테 거짓말해야 되고,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그러면 사람이 상대편 눈도 빤히 못 쳐다보고, 늘 죄지은 것도 아닌데, 죄지은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거요. 자기를 못 견뎌서. 이게 일반인이 할 일이고, 그 다음 수행적 관점에서 한다면 수행이라는 것은 모든 욕망으로부터의 자유가 해탈이거든요. 그러니까 자기가 그런 성적욕구가 일어나면 가만히 앉아서, 그 성적 욕구에 빠지지 말고, 그 욕구가 일어나는 자기 마음을 가만히 살피는 거요. “성적욕구가 일어나고 있구나.” 일어나고 있구나. 이렇게.

 

그러니까 이거는 일어나면 안 된다든지, 일어나니까 욕구를 따라간다든지, 이러지 말고 일어나고 있구나.”하고 계속 집중을 하면,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예를 들면 남자 같으면 발기가 되었다가 저절로 수그러든다든지. 이제 그런 연습을 하게 되면 욕구가 일어나는 거는 있을 수 있지만, 내가 그 욕구에 빠지지 않고 욕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니까 욕구를 자꾸 나쁘게 생각하면 욕구를 억제하려니까, 억제가 안 되니까 발산을 하잖아. 그죠? 욕구 가체를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그냥 하나의 신체 현상으로 보고, 그러나 내가 거기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욕구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지는 것이 나의 행복과 해탈로 가는 길이다. 그런 측면에서 알아차림을 유지 하면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지 마라. 그러나 거기에 매몰되어서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행위나, 안 그러면 법률적으로도 범죄에 속하는 행위를 하게 되면 자신의 욕구가 자신을 파멸로 이끌게 된다. 그러니까 그것을 충분히 세속적으로는 오히려 부부가 대화하거나 해서 그 문제의 대책을 세우든지, 약물 치료를 받든지, 안 그러면 명상을 배워서, 명상이라는 것은 앉아서 참선한다 이런 게 아니라, 욕구를 알아차림이라는 거요. 알아차림을 통해서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이런 수행을 자꾸 행하게 되면, 욕구는 있지만, 나는 욕구가 나를 파멸시키지 못한다. 이렇게 볼 수가 있어요.

 

. 저희 정토회에서는 스님들만 수행하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 하시는 분들이 다 수행을 해야 된다. 수행의 목표는 죽어서 천국가고, 돈을 많이 벌고 이런 게 아니고, 내가 행복해지고, 자유로워지기 위한 게 목적이요. 이걸 해탈과 열반이라고 그래요. 자유와 행복을 향한 길이다. 그럼 어떤 것으로부터의 자유냐? 나의 까르마, 업식,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에요. 으흠. 거기에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움을 자초하게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제, 거기 양식이 있습니다.

 

먼저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내가 수행자임을 자각하는 거요. 그리고 수행의 원칙이 뭐냐? 이 괴로움이라는 것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일어난다 하는 것을 다시 원칙을 한번 자각하고, 이제 수행문이라고 해서. 그리고 내가 나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야 되는데, 실제 생활에서는 어떠냐? 그렇지가 못하다. 즉 내 업식으로 부터 내가 자유롭지 가 못 해요. 누가 뭐라고 그러면 화를 벌렁 낸다든지, 욕심을 낸다든지, 짜증을 낸다든지, 나도 모르게 갑자기 슬퍼진다든지, 이렇게 자꾸 경계에 끄달린단 말이오.

 

그러니까 그것을 내가 알아차려야 되는데 놓치게 되니까, 그 놓친 부분,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 이걸 참회하는 게 아니라, 그 놓친 부분을 다시 아차, 놓쳤구나. 다음에 놓치지 말아야지. 아이고 또 내가 놓쳐버렸네. 다신 놓치지 말아야지.” “아이고 놓쳐버렸네.”라고 알아차리는 것을 참회라고 그러고, “다시는 놓치지 말아야지.”이게 발원이거든요. 참회발원기도를 해야 돼요. 그러면 그 수행문이 쭉 있으니까 1시간용으로 되어있습니다. 그거 1시간을 매일 자기 파일럿이니까 꼭 우리는 아침 5시에 일어나지만, 자기는 시간을 정해놓고 못하면, 호텔에 돌아와서 딱 반드시 그렇게 하는 것을 꾸준히 해나가면 처음에는 좀 무미건조한 거 같지만, 좀 형식적으로 하는 거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기가 되는 거요.

 

쉽게 말하면 자기가 성적인 욕망으로부터 좀 자기가 스스로 자유롭고 싶은데 잘 안되면, 욕망의 유혹을 느꼈을 때 자기가 알아차려 되거든요. 알아차림을 놓친 걸 갖고 참회를 하면 된다는 거요. 그러니까 그런 과제를 가지고 꾸준히 해나가면 됩니다. 그거 뭐, 정토법당이 있어야 되는 것도 아니고, 절이 있어야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같이 있어야 되는 것도 아니에요. 우리 여기 정토법당이 여기 다 있어도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집에서 정진하거든요. 딱 일어나자마자 그 자리에서 그냥 하면 되요. 세수하고 옷 입고 뭘 차리고 그렇게 안 해도 되고, 간단하게 딱 눈곱 떼고 그 자리에 정진부터 하고, 그렇게 하루 일과를 시작하면. 처음에는 별 효과가 없는 거 같은데 꾸준히 하면, 좋아집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