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동훈스님_일대시교

(동훈스님의 일대시교) 2회 제법무아(연기를 모르면 이해를 못한다.)

Buddhastudy 2016. 10. 31. 20:59




제법무아는 쉽게 설명할게요. 모든 건 내가 없다. 자동차도 부속을 다 풀어놓으니까 자동차라 할 수가 없어. 구조적으로 조립을 해야 자동차고, 사람도 지수화풍 사대, 색수상행식 흩어놓으니까 사람이라 할 수가 없어. 머리카락이 너냐? 발이 너냐? 코가 너냐? 네가 아니잖아요. 전부다 아니야. 해체해 놓고 보니까 사람도 아니야. 또 수레도 아니요. 카메라도 아니오. 자동차도 아니오. 그래서 무아라는 건 나의 실체적인 내가 없다. 변하지 않는,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게 무아사상이에요. 내가 없다. 
     
무 자에 대해서 우리가 조금 알고가야 될 것이 아트만. 불교경전, 니까야, 이런 데 에이발음은 전부 부정접두어에요. 부정하는 말. 그래서 아트만이란 얘기는 자아라는 얘기야. 자아라는 건 나다. 내가 실체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이야. 아트만. 그런데 이게 무 자에요. 이건 자아, 이건 없다. 무아라는 건 ‘나는 없다’라는 얘기에요. 
     
그다음에 여기서 제법무아, 무아를 알려면 연기를 모르면 이해를 못해요. 무아라는 건. 내가 없는 거야. 여기 내가 이렇게 존재하는데. 내가 없는 거야. 그래서 무아는 연기를 이해하지 못하면 무아는 알 길이 없다. 그 얘기입니다. 
     
자, 그러면 무아에 대해서, 연기에 대해서 부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연기법은 내가 지은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건 안 나오건 간에 이 법은 상주요. 법주요 법계니라. 여래는 이 법을 자각하여 바른 법을 이루어 중생에게 설하나니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한다. 즉 무명은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하나의 커다란 고온의 집이 있게 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서 저것이 멸한다. 무명이 멸함으로서 행이 멸하고, 내지 하나의 커다란 12인연의 멸이 있게 된다.” 이 얘기는 시간 관계상 길게 설명할 수가 없고요, 그래서 무아를 알려면 아까 얘기한데로 연기법을 먼저 알아야 되는데, 
     
연기가 부처님이 아까 경전 읽을 때 여러분들이 제대로 들으셨는지 몰라도, 이건 내가 만든 것도 아니요, 우주에 본래 있던 질서를 진리를 내가 깨달은 거다. 인연생기라고 그래요. 인연에서 일어나서 생겼다. 그런데 연기라는 것은 뭐냐 하면 공식이 있어요. 연기는. ‘무엇무엇 때문에 생겼다.’ 여러분들은 전생에 이러이러한 인을 지어서 여성의 몸으로 태어났고, 좋은 일을 많이 해서 부처님 법을 들을 수 있는 불자로 또 만났다. 이것이 ‘무엇무엇 때문에’ 네가 전생에 ‘무엇무엇 했기 때문에’ 요렇게 사람으로 예쁘게 태어났다. 
     
‘무엇무엇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태어났다. 생겼다. 생성, 연기라는 것은 우주질서 모든 삼라만상의 생성의 법칙이에요. 생성의 법칙. 그래서 연기는 차유고피유 차멸고피멸인데, 요것도 중요한 거라. 이게 연기의 공식인데, ‘이것이 있은 연고로 저것이 있다.’ 내가 욕하니까 저 사람, 몽둥이 가지고 덤비더라. 내가 선물해 주니까 저 사람이 착한 마음으로 선물을 주더라.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어진다.’ 내가 소멸, 죽어버리면 이 세상 다 끝나요. 소멸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차유고피유’는 모든 게 일어나는 거의 법칙이에요. 생성의 법칙, 
‘차멸고피멸’은 생멸의 법칙, 멸의 법칙. 우주질서가 생멸의 법칙인데, 
     
무아라는 것은 중요한 것은 왜 이 무아라는, 오늘 제가 니까야 아함에서 핵심적으로 말씀드릴 것은 제법무아인데, 왜 무아냐?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 누구나 다. 사람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데, 
     
내가 없다는 것은 실체적인 고정된 내가 없어요. 고정되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프레임으로 틀로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무아야, 무아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될 수 있어. 나는. 가능성이 있어. 잠재성이 있어. 그래서 무아를 얘기할 때 잠재성과 가능성을 놓치지 말아야 돼. 
     
그러니까 조건에 따라서 달라지니까 어떤 것이라고 규정지을 수가 없어. 그렇죠? 여러분들은 ‘법륜아’다. 그러면 ‘법륜아’는 이름일 뿐이야. ‘법륜아’가 그 사람이 아니야. 오늘 내가 이름을 바꿔주면 오늘은 ‘보리심’으로 바뀌어. 그러니까 이것이 무엇이든지 될 수 있기 때문에 규정을 지으면 안 돼. 뭐라고. 그러니까 불교에서는 반드시, 꼭이 진리에 안 맞아요. 반드시 이렇다는 건. 그렇다는 건. 
     
그래서 다른 것이 무슨 일이든지 조건에 따라서 다른 것이 될 수 있다는 잠재성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너는 그런 애야.”라고 하면 안 돼. 부정적인 이미지로 “너는 그런 애야”라면 부정적인 이미지야. 그러면 걔는 영원히 그런 애로 되어버려요. 그런데 큰 아들은 잘하고 작은 아들은 잘못해. “너는 그런 애야.” “형 좀 닮아봐라.” “동생 좀 닮아봐라.” 그런데 공부 잘하는 놈은 뭐도 사주고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니까 공부 잘해서 판사도 되고 검사도 되고 선생님도 되고 하는데, 나중에 효도하는 놈은 속 썩였던 작은아들이 효도해. 왜? 
     
내가 잘하면서 부모한테 속 썩인 게 마음에, 철들면 다 그래. 누구나 다. 그래서 속 썩이고 공부 못했던 애가 “너는 그런 애야.”라고 했던 애가 용돈도 주고 효자 노릇합니다. 공부 잘한다고 이기주의로 그렇게 키운 애들은 자기만 알아. 그러기 때문에 이 무아를 잘 알아. 무엇이든지 조건에 따라서 변할 수 있기 때문에 규정 짓지 마라. 다른 것이 항상 될 수 있는 잠재성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너는 그런 애야.”라고 하지마라.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지 말라는 거야.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지 말고, 항상 긍정적으로 “너는 공부 못하지만, 너는 다른 거로 댓글 배워서 말글 써먹을 거야. 너는 공부 중간밖에 못해도 분명히 너는 잠재성과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났어.” 그걸 믿으란 말이야. 확실히 믿으세요. 
     
그래서 무아라는 설명을 하면서 드리고 싶은 건, 삼라만상은 스크린에 비친 그림자다. 스크린에 비친 이미지다. 여러분들 이미지 알죠? 이미지. 삼라만상은 스크린에 비친 이미지다. 그 사람의 이미지. 이건 변하는 거예요. 패턴. 패턴도 마음에 정형화 된 자기 고정관념의 생각, 이것도 변해요. 이미지도 변하죠. 헤어스타일 하나 바뀌면 이미지가 변하누만. 그 사람. 그죠? 그래서 이것은 변하는 것이 때문에 변하는 것을 잘 알아야 돼.
     
그래서 달이 강물에 비춰. 그걸 천강유수 천강월이라 그러는데, 달이 비치는 것을 맑은 물에는 비춰. 그러니까 좋은 조건, 맑은 물을 만나니까 달이 비춰. 그런데 흐린 물에 비취니까 달이 안 비춰.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강에 있는 달이 진짜 달인 줄 알고 건지러 가단 빠져죽어요. 그래서 세상에 모든 삼라만상 산하대지는 내 마음에 비친 이미지다. 내 마음에 정형화된 생각의 그림자다. 패턴이다. 그러면 ‘내 마음의 이미지요, 내 마음의 패턴이다’ 했을 때, 그러면 어떻게 되요? 나의 생각과 경험을 바꾸면 되잖아. 내 생각대로 경험대로 인식하잖아요. 여러분들이 이 세상 보는 건 다른 거 없어요. 반복경험으로 인해서 나쁘다 좋다를 인식하잖아.
     
그런데 생각을 바꾸고, 경험을 바꾸면 변하죠. 어린아이들, 갓 태어나서 기어 다니는 애들한테 불이 빨가니까 좋아. 그런데 불이 뜨겁다는 걸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집어넣어요. 한번만 집어 넣어본 애들은 절대 안 넣어요. “아, 불은 뜨겁다.” 우리가 살아가는 게 전부 마음의 인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마세요. 항상 그랬어요. ‘내 생각과 경험을 바꾸자.’ 이렇게 우리가 좀 알아주시고, 
     
비교라는 말씀 하나 해드릴게요. 우리는 남과 비교하죠. “너는 오늘 스타일이 어때, 이미지가 어때” “뭔 옷을 입고 왔어.” 이렇게 변하잖아. 그런데 비교는 남과 하지 마세요. 아파트가 크든 적든, 남의 남편이 잘났든 직장이 좋든, 우리 마누라가 어떻든, 그런 거 비교하면 그건 천하에 못써요. 불행의 씨앗이야. 스스로 비교하세요. 나 스스로. 나는 여러분도 부처님 법 만났잖아. 불자로서. 그러면 나는 불자로서 부처님 법 만나기 전과 부처님의 진리 말씀을 만나기 후에 나는 어떻게 변했는가. 얼마나 변했는가. 
     
부처님 말씀에 의해서 나는 얼마나 눈이 떴나. 위법화생. 위법생환. 이거 자주 있는데, 부처님 진리의 말씀에 의해서 다시 태어났어. 내가. 부처님 말씀에 의해서 내가 눈을 떴어. 그래서 부처님 만난 게 너무 고마워. 그래서 거룩한 부처님과 가르침과 스님들께 늘 감사하고 싶어. 이게 안 되면 불교 점검을 다시 해야 돼. 이게 안 되면. 그래서 내 스스로 어제의 삶과 오늘의 삶이 부처님 법 만나서 얼마나 변했느냐. 이거 보시고요, 
     
또 하나는 이산혜연선사 발원문을 보면 ‘천겹만겹 내려오던 원수거나 친한이나 이 세상 권속들도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얽히었던 애정 끊고 삼계고해 뛰어나라’ 는 얘기가 이는데, 우리 삶은 아까 연기, 연기에서 얘기했듯이 인연법이에요. 불교는 인과법 인연법 빼면 설명할 수가 없어. 그래서 인연법을 말씀을 드리면 이 세상 살아가는 데는 인연법을 여러분들이 어떻게 해석하는지 몰라도, 모든 건 그물이 얽어매듯이 이렇게 인연법으로 인해서 천겹 만겹으로 얽혀져서 살아가요. 그러니까 아무리 내가 선택하고 의지하고 뛰어도, 발악을 해도 인연법은 저버리지 못해. 
     
잘못하면 운명론으로 빠질 수 있는데 운명론이 아니에요. 운명론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가 있는데 그건 놔두고, 그래서 인연법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발버둥치고 아무리 나의 의지로 살려 해도 잘 안되잖아. 벗어나고 싶어도. 그건 네가 전생에 인과를 그렇게 엮어 놓은 거로 인해서 엮어가는 삶이야. 그게. 그래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보면 전생의 프로그램대로 사는 거와 똑같다. 이걸 아셔야 돼. 운명론에서 역학, 사주팔자 보면 그 사람의 병,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다 나와요. 그러기 때문에 어쨌든 나는 인연법에 살아간다. 그래서 어려움이 왔잖아. “그럼 내가 무슨 인을 지어서 이런 게 왔지?” 이걸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불자야. 
     
나에게 어려움이 왔어. “어머니 때문에 왔네, 아버지 때문에 왔네.” “시어머니 때문에 왔네.” “남편 때문에 왔네.” 이러잖아. 이러지 말고, 이건 원망하는 거야. 남을 미워하고. 이것도 업을 짓는 거야. 그러니까 어려움이 왔을 때는 “아, 내가 무슨 인을 씨를 뿌려서 이런 게 왔나”를 항상 생각하면, 그게 진짜 기도하는 불자에요. 그래서 그렇게 살아가라 라는 말씀이야. 
     
그래서 불교에서는 ‘가는 사람 잡지 말고 오는 사람 막지 마라.’ 그게 인연법이야. 아무리 자기 인은 그렇지 않은데 발버둥 쳐도 안 된다는 거야. 선택하고 싶어도 안 돼. 전부다 죽는 선택만 하고, 죽을 꽤만 내는 거야. 그래서 그렇게 아시고. 우리는 항상 ‘선용지심을 써라.’ 항상 24시간에 악용지심 쓰지 말고 마음을 항상 착하게 쓰는 마음을 가져요. 이러면 내 인과가 바뀌어. ‘생각과 경험이 바뀌면 내 팔자가 바뀐다. 운명이 바뀐다.’ 그죠? 밖으로 보이는 거에 대해서 집착해서 뜯어 고치려 하지 말고, 이렇게 ‘선용지심을 자꾸 써라.’ 그러면 아름답게 늙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