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종범스님_법성게

종범스님의 법성게 17. 궁좌실제중도상 구래부동명위불

Buddhastudy 2017. 1. 23. 19:49



그 다음에는 窮坐實際中道床궁좌실제중도상하면 舊來不動名爲佛구래부동이 名爲佛명위불이라. 窮坐궁좌라 이 말은 마지막에 앉는다. 이게 窮坐궁좌에요. 마지막에 앉는다. 마지막에 턱 돌아간다. 거기에 턱 편안히 머문다. 이게 좌거든요. (머물 ). 궁이라 하는 것은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이런 얘기요.

 

그럼 어디에 머물고 어디에 돌아가느냐? 실제 中道床중도상이라. 실제. 실제라고 하는 것은 그 본 깨달음의 세계. 제라고 할 때 이것은 세계를 말하죠. 국제적으로 할 때. 그 세계 세계를 제자라는 말을 쓰죠. 그러면 현상세계가 아니고 진실세계. 이것을 실제라 그럽니다. 진실세계. 그 본질세계. 그 진실과 본질의 세계의 中道床중도상에 마지막으로 안주한다. 이리 되는데. 實際中道床실제중도상이라고 하는 거 이게 참 중요한 문제에요.

 

中道중도. 中道중도라고 하는 게 이게 참 좋은 말인데. 中道중도가 뭐냐? 中道중도라고 하는 것은 열반에 치우치지도 아니하고 생사에 치우치지도 아니하고. 이게 際中道중도에요. 그러니까 생사와 열반을 다 초월해 버려. 초월. 생사에 집착도 안 해요. 성불하게 되면. 또 열반에 집착도 안 해요. 생사에 집착하는걸 보고 중생이라 그러고. 열반에 집착하는걸 보고 소승이라 그래요. 소승.

 

소승들은 아라한. 벽지불 이런 분들인데. 이런 분들은 삶과 죽음이 없는 그 열반을 좋아해요. 생사를 싫어하고. 그런데 중생은 끊임없이 이 세상 거를 구하는 거예요. 좋은 거 다 가지려고 그러고. 좋다면 다해요 중생은. 하여튼 좋은걸 좋아하는 게 중생이에요. 참 이상해요. 평생을 두고도 좋다면 좋아해. 지금까지 좋은 거 좋아한 거 다 어디 갔는지. 계속 좋은 것만 좋아해. 그게 좋은 것만 끊임없이 좋아하는 게 그게 중생입니다. 그걸 일러서 생사에 집착한다. 이 세상에 집착한다 이래요.

 

그런데 또 세상 거는 항상 투쟁과 고통이 있다고 그래서 싫어하고. 조용하고 신성한 해탈만을 좋아하는걸 보고 열반에 집착한다고 그래요. 그런데 부처님은 생사열반에서 다 초월해 버린다. 생사도 집착하지 않고. 열반도 집착하지 않고. 다 초월해 버려. 그런데 때에 따라서는 생사에도 나타나시고 열반에도 나타나시니까, 초월과 자제. 자유자재. 이걸 중도라 그러는 거예요. 첫째는 초월해 버리고. 둘째는 자유자재하는 거예요. 도망가는 게 아니에요. 이게 중도입니다.

 

오늘 날 일반적으로 중도파. 중도계열. 뭐 이리 되면은 여당도 아니고 야당도 아니고. 중간에 있어서 꼭 충청도사람처럼, 전라도하고 경상도 하고 싸우면. 여기저기도 속하지 않다가, 어느 한쪽에서 이기면 이긴 쪽에 슬쩍 붙어서. 덕 보려고 하는. 그런 어정쩡한 그런 걸 보고 중도파라 그러거든요.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그게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그래서 용어는 같은데 의미가 다른 게 너무너무 많아요. 그게 참 많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첫째는 초월해야 되요. 여기저기에서 다 떠나야 된다 이 말이야. 그런데 그 다음에는 자유자재가 되요. 이쪽으로 나타날 때는 이쪽으로 나타나고. 저쪽으로 나타날 때는 저쪽으로 나타나서, 마음대로 원력에 따라서 나타나는 거. 이것이 바로 중도상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는 거기에 앉는다 이거요. 생사에 초월해서 생사에 자유자재 하는 게 성불인데. 그 세계에 들어간 듯이 實際中道床실제중도상에 궁극적으로 편안히 머물게 된다 이 말이죠. 그것이 바로 窮坐實際中道床궁좌실제중도상이에요. 최고로 성불한 걸 말합니다.

 

그리되면 舊來不動名爲佛구래부동명위불이라. 옛부터 움직이지 아니한 것이 바로 그게 이름 하여 부처라고 한다. 움직이지 않는 게 뭐냐? 理事이사가 冥然명연하야 무분별이니까. 모든 사물 현상이 나타났지마는 그 이치에서 볼 때, 그건 나타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고. 물이라고 하는 습기가 여러 가지 얼음도 되고, 구름도 됐지만은, 습기는 달라진 게 없다 이 말이죠. 습기. 얼음이 됐다고 그래서 습기가 달라진 게 아니고. 구름이 됐다고 그래서 습기가 달라진 게 아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가보니까. 여러 가지 모양으로 돌아다녔지마는 그대로 있었던 거다. 이게 舊來不動구래부동이에요. 이게 화엄경 사상이에요. 그래서 화엄경은 여러 가지 작용을 끊임없이 일으키지만은 그 본질은 그대로 있다. 이게 諸法不動本來寂제법부동본래적이고, 舊來不動名爲佛구래부동명위불. 이게 화엄경의 중요한 사상입니다.

 

그래서 이걸 여러 가지로 비유를 하는데, 꿈속에서 여러 군데 돌아다니던 사람이 꿈속에서는 많이 다녔는데, 꿈 깨고 보니까 그대로 본래 누워 있더라. 이런 거예요. 그런데 꿈꿀 동안에는 몰라요. 자기가 그대로 있는 줄을 몰라. 그래서 꿈을 깨봐야 내가 그대로 있었구나를 알게 되요. 마지막에 아는 겁니다 이게.

 

그래서 젊을 때는 수 없는 방황을 하게 되요. 방황을 하게 되는데. 결국에 지혜가 높아 갈수록. “~ 인생이라는 게 결국 요 자리로 돌아오는구나.” 그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래요. 인생이라는 말을 왜 썼겠는가? 살아봐야 안다고 인생이에요. 내가 볼 때는. 그래서 사람인자 밑에는 산다는 생자를 넣어서 인생이라 그래요.

 

머리 좋다고 2,30년 살고 인생을 안다. 그건 거짓말이에요. 인생은 적어도 다 살아보고, 마지막에 죽을 때 가서 알아요. 죽을 때가서. 그래 살아봐야 알지. 살지도 않고 인생을 어떻게 아는가? 그래서 옛날 사람들이 참 머리가 좋아서. 살아야 사람을 안다는 뜻으로. 사람 인자 밑에는 산다고 하는 날생자를 딱 넣어서 人生인생이라 한 거 같아요. 아주 묘하더라고요.

 

그러듯이 不動부동이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고로 높은 세계에 가봐야 不動부동의 세계를 알지. 가보지도 못하고 어떻게 아는가? 이런 얘기죠. 완전히 성불해 보면은 옛날옛날 그 억만 겁 전서부터 달라짐이 없이 제 자리에 있더라. 제 자리에 있는 것을 깨달은 사람을 이름하여 부처라고 한다. 이게 舊來不動名爲佛구래부동명위불이라. 이렇게 되거든요.

 

그럼 문제는 實際中道床실제중도상에 앉아서, 움직임이 없는, 옛부터 움직임이 없는, 그런 원리를 마음대로 성취하고 마음대로 이루어 가는 것이 그것이 최고의 좋은 건데, 그것이 과연 어떻게 우리 중생세계에서 조금이라도 이루어 질 수 있을 건가. 이게 참 중요한데요. 이거 간단한 법이 있어요. 어떻게 간단한가 하면, 이게 중도상에 우리가 앉아야 하는데.

 

중도를 중생이 하는 中道중도. 아라한이 하는 中道중도. 보살이 하는 中道중도. 부처님이 하는 中道중도. 中道중도라고 하는 것만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 그릇에 따라서. 그 역량에 따라서 중도라고 하는 범위가 틀린 것뿐이거든요. 그럼 우리 중생이 조그마한 中道중도라도 하나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 치우치면 중도가 아니에요. 치우치면. 그러니까 중도를 치우침이 없이 실행하는 게 이게 중도의 생활인데.

 

간단히 우리 현실 생활에서 보면 그런 게 있죠. 첫째는 집착을 하지 말아야 되요. 집착을. 그게 중도에요. 내가 뭐 이거라고 자꾸 집착하고 욕심내고 이러면 이거는 벌써 치우쳐 버리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열심히 해야 되요. 열심히 하되 집착을 하지 말고 하는 것 이게 중도입니다. 하여튼 돈도 열심히 벌어야 합니다. 또 일도 열심히 하고, 연구도 열심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하여튼 부지런히 하는 게 이게 첫째의 중도인데.

 

그 다음에는 하고 나서 이건 내가 했다.’하고 집착을 하지 말아야 되요. 그러니까 요즘 말로 말하면은 욕심은 없으되 부지런히 사는 거 그게 중도입니다. 욕심 없이 부지런히 사는 거. 그런 삶을 살면 그게 중생의 中道중도에요. 그런데 중생들은 부지런하지는 않고 욕심부터 내요. 이게 이제 아주 이상한 거예요.

 

그런데 옛날에 훌륭했던 사람은 다 이 中道중도를 실천한 분이에요. 다 공부를 열심히 했지마는, 자기 공부에 집착해서 그거에 뭐 도취가 되가지고 자만한다든지 자화자찬 한다든지 그런 게 없거든요. 그런 게 없고. 돈을 열심히 벌 되, 돈에 집착하면은 수전노가 되니까. 벌 되 나머지를 다 회향을 해. 그럼 그게 중도에요. 그러니까 매사를 부지런히 하되. 한 것에 집착하지 않고 돌려준다 다 돌려줘. 그러면 그게 중도입니다.

 

그러니까 첫째는 욕심을 버려라. 둘째는 부지런히 해라. 이게 참 어렵거든요. 이게 잘 안돼서 공산주의가 실패가 된 거에요. 그러니까 공산주의를 하려면은 첫째 자기 것을 갖지 말아라. 이게 욕심 없으라는 말과 같은 말이거든요. 개인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개인은 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똑같이 아무것도 없단 말이오. 그럼 더 열심히 해야 전체 국가가 잘 될 건데 중생은 안 그래요. 개인이 집착을 하지 못하도록 하면 안 해버려 그냥.

 

그러니까 이게 안 되는 거요. 중생의 심리를 너무너무 모르는 거요. 레닌이란 그 친구가. 하나만 알았지 둘을 몰라요. 불교공부를 좀 더 해 봤더라면 공산주의 역사가 달라졌을 건데. 평등하게 하면은 가난한 사람이 없어진다. 요것만 알았지. 중생은 집착이 많아서 자기 것이 없으면 논다. 요것을 몰랐거든. 그러니까 망하는 거죠 이게.

 

그런데 정치적으로 그렇게 하려면 망하니까 안 되고. 우리 신앙적으로 중도를 해야 한다 이거지. 신앙적으로. 다 이게 욕심을 일으킨다는 것은 번민만 생기고 근심걱정만 되지 안 된다. 또 논다고 하면은 역시 이게 망쳐지기만 하지 되는 게 없다. 그러니까 첫째는 욕심과 집착을 버리되, 둘째는 게으르고 자기만 알고 이런 식어가는 인생이 되지 말고, 더욱 열심히 하되. 그 한 것에서 얻어지는 것은, 집착하지 말고, 다 보시하고 회향하고 돌려서. 더 공덕을 지으면은 하니까 공덕 되고, 베푸니까 공덕 되고, 돌려주니까 공덕 되고, 이게 바로 중도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화엄에 中道중도를 실천하는 분들은 원력을 많이 세워서 많이 이루어야 되요. 이루고 나서는 자기가 이룬 것에 집착하지 말고, 다 회향을 하고 해서 돌린단 말이죠. 부처님한테 돌리고, 중생한테 돌리고, 그러면 그게 中道중도요. 하는데 빠지지도 않고, 갖는데 안 하는데 빠지지 않고 이거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되는 것이 중도인데. 이렇게 잘 하도록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화엄경을 말씀하신 것이고. 의상대사께서는 이런 法性偈법성게를 해 놓으신 것이에요.

 

그리고 이 후대에 法性偈법성게를 해석한 분들을 보면은 이 法性偈법성게라는 것이 뭐와 같은가? 실과 같은데 실이나 아니면 줄, 줄과 같은데. 그 맹인이 하나 있다. 그런데 보물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줄을 모른다. 그래서 눈 밝은 사람이 보물 있는 창고에다가 줄 한끝을 매고, 그 앞 못 보는 사람에게 그 줄 하나를 손에 쥐어 주면서 아무데 딴 데 가지 말고. 요 줄만 따라가라이랬대요. 그래가지고 이 맹인이 그 줄을 버리지 않고. 딱 쥐고. 차츰차츰 따라가 보니까, 마지막에 그 보물창고에 딱 다다랐다. 요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중생은 그 무한한 복덕의 집에 돌아갈 줄 모르니까. 의상대사가 이런 법성게를 하나 딱 해놔서 중생이 요것만 따라가지고 자꾸 가 보면은 맹인이 보물창고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그렇게 된다. 이런 비유로 해석한 그런 경우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화엄철학은 염념이 발심이오. 염념이 성불이라고. 생각 생각에 발심을 한다 이게 염념발심이에요. 생각 생각에 부처님 마음을 일으킨다 이거죠. 발심이죠. 또 발심과 동시에 성불이라. 初發心時便正覺초발심시변정각이니까. 염념성불이라 또 이런 법문도 있어요. 이 법성게가.

 

그러니까 이 화엄경이라고하는 것은. 원인이 바로 결과니까. 발심이 바로 성불이거든요. 그럼 발심 성불을 언제 하느냐?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염념이 발심하고 염념이 성불한다. 이게 염념발심 염념성불입니다. 이게 참 아주 멋진 법문이죠. 이러한 법문을 쭉하니까. 우리는 한 생각 불심 일으키면 그때 바로 성불하는 세계입니다. 이게 아주 큰 가르침인데. 이러한 훌륭한 조상을 우리는 가지고 있으면서. 제대로 자랑은 못할지언정 드러내지를 잘 못하고 있어요. 이게 참 우리에게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조상 자랑하는 사람치고 똑똑한 사람이 없다고 그래요. 어제 방송 들어보니까. 그런데 자랑은 안 한다 하더라도, 드러내기는 해야 될 거 아니에요. 의상대사가 어떤 분인지. 우리는 훌륭한 조상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걸 자랑은 그만두고 알지도 못하고, 드러내지를 못하는 것은 후손의 잘못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공부할 기회가 있으면. 의상대사의 화엄철학이 어떤 건가 더 깊이 더 공부할 수도 있고. 이런 것에 많은 뜻이 담겼는데,

 

우리 일상생활에서 이 중도를 어떻게 성취해야 되는가? 많이 하되 집착하지 말고 하라. 그게 바로 중도입니다. 집착 없이 많이 하면 그게 중도에요. 그러니까 열심히 해야 됩니다. 그렇지만은 하되 집착은 말고 해야. 그게 바로 중도니까. 그렇게 하면 아주 멋지게 되는 거죠.

 

시간이 오늘 없어서 참 뭐한데. 이번에 학성스님께서 이런 교양대학을 통해서. 이렇게 좋은 자리를 마련해서. 우리가 이런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이 참 기쁜 일입니다. 아주 이게 다 이런 원력이 크고. 그런 정진이 있어야 이게 다 되는 거거든요. 아주 참 좋은 일이에요. 이걸 다 약찬게에서 부터 읽어봤으면 좋겠는데. 약찬게는 많이 하는 데가 많고 하니까. 오늘 마지막으로 법성게만 같이 한번 쭈욱 읽고 마치겠습니다. 義湘祖師法性偈의상조사법성게서부터 舊來不動名爲佛구래부동명위불까지 같이 읽어보십시다. 시작.

 

義湘祖師法性偈의상조사법성게

法性圓融無二相 (법성원융무이상) 諸法不動本來寂 (제법부동본래적)

無名無相絶一切 (무명무상절일체) 證智所知非餘境 (증지소지비여경)

眞性甚深極微妙 (진성심심극미묘) 不守自性隨緣成 (불수자성수연성)

 

一中一切多中一 (일중일체다중일) 一卽一切多卽一 (일즉일체다즉일)

一微塵中含十方 (일미진중함시방) 一切塵中亦如是 (일체진중역여시)

無量遠劫卽一念 (무량원겁즉일념) 一念卽是無量劫 (일념즉시무량겁)

 

九世十世互相卽 (구세십세호상즉) 仍不雜亂隔別成 (잉불잡난격별성)

初發心時便正覺 (초발심시변정각) 生死般若常共和 (생사열반상공화)

理事冥然無分別 (이사명연무분별) 十佛普賢大人境 (십불보현대인경)

 

能仁海印三昧中 (능인해인삼매중) 繁出如意不思議 (번출여의불사의)

雨寶益生滿虛空 (우보익생만허공) 衆生隨器得利益 (중생수기득이익)

是故行者還本際 (시고행자환본제) 叵息妄想必不得 (파식망상필부득)

 

無緣善巧捉如意 (무연선교착여의) 歸家隨分得資糧 (귀가수분득자량)

以陀羅尼無盡寶 (이다라니무진보) 莊嚴法界寬寶殿 (장엄법계실보전)

窮坐實際中道床 (궁좌실제중도상) 舊來不動名爲佛 (구래부동명위불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