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우학스님_금강경

우학스님의 금강경 6_3. 몸의 형색은 곧 몸의 형색이 아니다

Buddhastudy 2017. 4. 4. 20:28




, 그러면 본문으로 가보겠습니다. 79페이지,

수보리야,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몸의 형색을 보고 참 부처님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모릅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색을 보고는 참 부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몸의 형색은 곧 몸의 형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이 좀 어렵죠. 여기서 앞에 몸의 형색은 곧 몸의 형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뒤에 몸의 형색은 믿을만하지 못하다, 이 말입니다. , 몸의 형색은 참다운 몸이 아니다. 이 몸뚱아리, 눈에 보이는 이 형색은 영원하지 않다. 눈에 보이는 이 몸뚱아리 몸의 형색은 전혀 믿을 것이 못된다. 이런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은 간단한데 표현을 좀 어렵게 해 놨어요.

 

옛날에 통도사에 경봉이라고 하는 큰스님이 계셨는데, 경봉스님 돌아가시기 전에 시자가 물었답니다. “스님이 돌아가셨을 때 사리가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하고 걱정을 했어요. “이 바보등신아, 온 세상이 다 사리천지인데 어디서 사리를 찾느냐?” 보통사람은 자꾸 어떤 개념을 국한시켜서, 자꾸 자기 깜량에서 판단하려고 하는 그런 실수를 자꾸 하는 거죠. 그리고 또 눈에 보이는 것, 그것만 가지고 판단하려고 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많이 가지고 있죠.

 

한번 제가 이 하늘법당 위에서 혼자 이렇게 다니는데, 거니는데, 저쪽에서 한 무리의 보살님들이 확 몰려와요. 저는 입은 옷이 좀 102030년 입던 옷이 되어 좀 남루해요. 그래서 그냥 대충 입는 대로 입는 거죠. 일부러 입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뜯어진 옷은 옷대로 입고, 또 새 옷은 새 옷대로 입는데, 그날 하필이면 떨어진 옷을 입고 이렇게 다니니까, 그 한 무리의 보살님들이 본체도 안하고 지나가는 거요.

 

저만치 뒤따라오던 한 신도님이 아까 보살님들이 여기 큰스님 만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 스님이 우리 절 창건주 회주스님입니다.” 그러니까 그제서야 쫓아와서 절을 하고 난리에요. 그러면서 사진찍자고 난리오. 아까는 본채도 안하고 갈 때는 언제고, 누가 그 사람 회주스님이다.” 하니까, 쫓아와서 사진찍자고 난리칠 일이 뭐 있냐 이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일이 참 많아요. 여기 밑에 봐봐요.

 

한편, 부처님의 진정한 몸은 무엇인가? 법신이다. 이랬어요. 법신. 늙고 병들고 죽지 않는 금강불괴의 몸이다. 해설에 잘 봐봐요. 그러면 해설 전체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육신을 가리킨다. 부처님의 몸의 형색은 곧 육신은 보통 32상으로 표현된다. 32상은 겉모양의 4대 색신을 말한다. 여기서 4대란 지수화풍을 말한다. 우리의 몸은 지수화풍으로 구성되어있다. 했습니다.

 

지라는 것은 딱딱한 겁니다. 딱딱한 거는 뼈, 손톱발톱,

수는 물 기운, 혈액.

화는 몸의 온기 같은 겁니다. 36.5도의 온기가 화죠.

풍은 호흡 같은 바람 같은 겁니다. 바람기운. 피부도 숨을 쉰다. 하잖아요.

 

아무튼 그래서 우리 몸뚱아리는 지수화풍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스님들이 뭐라 할 때 보면 저놈 사대는 멀쩡한 놈이 하는 짓이 뭐냐?” 이렇게 야단치는 거죠. 아무튼 이 사대가 결합 존재하는 것이 몸의 형색이오. 따라서 이 사대가 흩어지면 죽어 없어지면 몸의 형색, 육신은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한편 부처님의 진정한 몸은 무엇인가? 법신이다, 이랬습니다. 법신. 읽어보겠습니다. 법신. 법신. , 늙고, 병들고, 죽지 않는 금강불괴. 금강같이 무너지지 않는 몸이 있으니, 그 몸이야 말로 진짜 몸인데, 그것이 법신이다 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바카리라고 하는 비구가 있었는데, 우선 병이 들어서 먼저 죽게 되었어요, 바카리비구는 부처님을 성가시게 했습니다. 5백리쯤 떨어져 있었는데 연통을 띄워서 부처님을 꼭 뵙고 싶다. 부처님을 뵈면 모든 일이 이루어질 거 같습니다.” 자꾸 그러니까 그 얘기를 듣고는 그래, 한번 가지.” 그래서 시간을 내어서 갔어요. 5백리나 되는 그 길을 걸어서 바카리를 만나러 갔습니다. 드디어 부처님께서는 병든 비구의 손을 잡고 하시는 말씀이 너는 아직도 나의 본래 모습을 모르는가? 어찌하여 형색에 집착하여 나를 오라 가라 하느냐?” 여기 지금 그랬잖아요. 몸의 형색, 몸의 형색을 보고 나를 오라 가라 하느냐?

 

여래의 진정한 몸은 육신이 아니라 법신이다.” 이랬습니다. 그래서 절대 육신에 탐착해서는 법신을 볼 수 없느니라. 거기서 이 바카리는 큰 깨달음을 얻고 열반에 들 수 있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 진리의 모습, 진리를 보는데 우리가 늘 신경을 써야지, 그 모양, 그 모양을 보고 쫓아다니다가는 큰 실수를 하게 되는 거죠. 우리 불자들을 보면, 불교공부, 진리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그냥 스님 어디 있다.” “어디 절 있다.” 하니까 그 외양만 하고 보고 쫓아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큰 문제인 거죠.

 

, 거기 각론을 좀 보시면, 논리의 모순이 있을 법도 하다는 데서 부처님은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답을 주신다. 즉 부처님께서는 먼저 수보리에게 몸의 형색을 보고 참 부처님을 알 수 있겠느냐고 물으심에 수보리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몸의 형색은 청정법신의 몸의 형색과는 다르다는 이유를 들어 형색을 보고는 참 부처님을 모른다. 알 수 없다.’고 답하셨다. 위에서 해설 한 것처럼, 신상은 육신의 상, 몸의 형색으로 표현된다. 이 신상은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인연의 집합체이다.

 

자동차에 대한 비유가 쭉 나왔어요. 자동차도 보면 전부 집합체다, 이거죠. 분석적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고, 그 뒤에 또 보시면, 이와 같이 몸의 형색 또한 몸의 형색이 아닌 것이다. 지수화풍의 4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4대는 허공의 에너지 그 자체이다. 허공은 청정하고 아무런 모양이 없으며 진실할 뿐이다. 검은 것이 칠해지면 검게 되고, 네모난 것이 놓여 지면 네모날 뿐이다.

 

그렇듯이 우리 앞에 나타난 부처님은 형색을 지닌 화신불이다. 그런데 진짜 부처님 상은 바로 허공과 같아서 우주 그대로 존재할 뿐, 보거나 만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고 부처님의 32상의 모습은 한갓 헛된 4대의 뭉치는 아니다. 눈을 뜨고 보면 32상의 모습은 진실의 부처님 몸. , 법신의 장엄하심이다. 법신, 진실의 부처님 몸은 영겁의 시간 속에 그대로 계신다. 부처님의 진정한 몸, 법신을 제각기 근기 따라 취하여 살아가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여기서도 줄곧 말하고 있는 것이 중도적 관점에서 늘 관찰해라. 중도적 관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