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실천적불교사상

법륜스님 실천적불교사상 제26강 수행을 어떻게 할 것인가? 1

Buddhastudy 2017. 9. 6. 19:32


안녕하세요. 오늘은 이제까지 불교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이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서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이 마지막 부분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편안하게 한번 들어보십시오.

 

불교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의 가르침이다.

 

[무엇을 깨닫느냐?]

법의 실상을 깨닫는다.

 

[깨닫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서

완전한 행복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된다.

 

[다른 가르침과의 차이가 어디 있느냐?]

세상의 많은 가르침은

우리가 얻고자하는 것을 얻었을 때 느껴지는 그 만족감으로 행복을 삼고 있고,

그래서 얻으려는 그 욕구를 따라 그것이 얻어지도록 기원을 하는 것이

대부분의 종교거나 가르침이다. 그러기 때문에 소원성취를 목적으로 한다.

 

우리의 힘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더 거기에 메달리게 된다.

 

불교는 우리의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깨달음을 통해서 이루려고 한다.

우리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즉 어리석기 때문에 괴로움과 속박이 생겨났다.

만약에 이 어리석음과 이 무지를 벗어나게 되면

모든 괴로움과 속박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궁극적으로 완전한 자유와 행복을 얻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지마는

바라는 바를 성취하려는 그 길은

나에게 행복이 타인에게 불행이 되고 있다.

나의 승리가 타인에게 패배를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또 그 욕망은 새로운 욕망을 낳아서

완전한 자유에 이룰 수가 없다.

 

그래서 반대로 그 욕망을 다시 악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무조건 억제하고 부정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면

고통을 참는 쪽으로 가게 된다.

그길 또한 완전한 자유와 행복에 이르지 못한다.

욕망을 따라갈 것이냐? 욕망을 억제하고 참을 것이냐에

두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게 깨달음이 아니다.

 

깨달음은

그 욕망의 본질을 꿰뚫어 봄으로 해서

그 욕망의 속박으로 벗어나 버리는 거다.

이러한 길이 불교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불교를 믿는다고 할 때 어떻게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 자유와 행복을 얻을 것인가? 거기에 도달할 것인가? 이것이 분명해야 한다. 그러니 내 인생의 목표, 목적이 다른 부분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모든 다른 것들에 우선해서 완전한 자유, 완전한 행복이라고 하는 니르바나 해탈을...

 

그러한 경지에 도달한 분이 누구냐?

석가모니 부처님이셨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찬탄하고 공경한다.

그분을 우리들이 나아가야할 어떤 이상적 인격으로 모델로 삼는다.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 바로 행복으로 자유로 나아가는 길이다.

이 입장이 아주 분명해야 합니다.

이것을 [귀의불]이다. 부처님께 귀의 한다의 의미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러한 길로 나아갈 수 있느냐? 그것은 깨달은이가 깨닫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 깨닫게 해주는 그 가르침을 따라가면 가장 손 쉽다. 그 가르침에 요지가 뭐냐?

 

행복은 밖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자기로 들여다봐야 된다.

인사이드. 안쪽으로 가야 된다.

 

밖으로 네가 그랬어. 뭣 때문에 뭣 때문에 뭣 때문에이런 식으로 바깥으로 향해 있을 때는 절대 문제의 본질을 볼 수가 없다. 그것을 정반대로 돌이켜서 안으로 향하게 되면 문제의 본질을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그 가르침의 요지가 거기 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 돌아옴을 알아서

부지런히 정진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것이 거룩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한다는 의미다.

 

좁게 말하면 그분의 가르침에 귀의한다는 뜻이고, 그 이치를 따져서 말한다면 그 가르침의 요지는 일체의 고와 일체의 속박이 다 우리들의 어리석은 마음으로 인해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바로 눈을 안으로 돌려서 그 어리석음을 꿰뚫어보면, 바로 그 어리석음이 사라져버릴 때 모든 괴로움과 속박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이러한 부처님을 모델로 삼고,

깨달음을 인생의 목적으로 하고,

깨닫기 위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고,

늘 안으로 향하는 살핌을 통해서

해탈의 길을 추구하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이 사람들은 참으로 나의 스승이며

나의 진정한 친구들이다.

 

이 사람들은

몸만 다르지

모양만 다르지

나와 같은 사람들이다.

 

바로 나는 이 일원으로서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며,

이들과 함께 수행정진할 거다.

하는 이런 마음을 내는 것이 [귀의승]이다.

 

바로 이 삼보에 귀의함이 가장 중요한 거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해탈과 열반을 증득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선지식들이 있었죠?

 

역대 조사가 있었고 수많은 아라한들이 있었고, 많은 큰 스님들이 계셨다. 이 분들이 다 이 길을 증명해주셨고, 지금도 이와 같이 나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런 분들에 대한 존경, 그분들과 함께 간다는 자랑스러움, 이게 귀의승입니다.

 

, 이 삼보에 대한 귀의가 이루어지면,

해탈의 길로 가려고 하는 사람은

5가지 삶에 대한 원칙이 있어야 된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갖가지 윤리도덕, 이런 것에 얽매여서 자기 생각에 빠져서 이게 옳으니 저게 옳으니, 이게 맞느니 저게 맞느니이렇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놔야 된다. 내려놓고 가장 중심에 잡아야 될 가치 기준이 뭐냐? 그것은 생명의 소중함이다. 모든 것들에 있어서 가장 으뜸 되는 것이 나의 생명이며, 또한 다른 사람의 생명이며, 또한 모든 생명이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생명은 함부로 해쳐서도 안 된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도 안 되고, 타인을 살해해서도 안 되고, 다른 생명을 함부로 해쳐서도 안 되고, 설령 물이나 흙이나 공기라 하더라도 함부로 오염시켜서는 파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눈으로 보면 나 있고, 타인이 있고, 사람이 있고, 다른 생물이 있고 이렇게 되지만,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이 세계는 그물처럼 연관되어 있어서 사실은 그 사람들이 곧 나며, 사실은 그 생명들이 곧 나며, 사실은 이 우주만유가 다 나와 한 몸이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것을 분리할 수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타인이나 다른 것들에 가해진 해침은 결국은 돌아서 나에게 고통으로 돌아오게 된다.

 

둘째는 우리가 살아가려면 무엇인가 생산을 하고 소비를 해야 된다. 만들고 써야 된다. 그런데 우리는 만들려고는 하지 않고 쓰려고만 하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이 다투게 되고 사람이 자연을 파괴하게 된다.

 

어떻게 써야 되느냐? 필요한 만큼만 써야 된다.

어떻게 생산해야 되느냐? 필요한 것을 생산해야 된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이며 인간 공동체의 삶의 원리다.

 

그래서 우리는 부지런히 일해서 중생의 은혜 갚는 태도를 가져야 된다. 그리고 자신에게 가져진 것이 본래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필요로 하는 것들에 쓰일 수 있도록 열어둬야 된다. 부지런히 중생에게 쓰임새가 되도록 하는 것이 봉사다. 내 존재의 의의는 필요에 의해서 쓰이는 거요. 필요에 의해서 기꺼이 쓰여야 한다. 쓰임새가 있는 것이 존재의 의의가 있는 것이고, 존재의 의의가 있다는 것이 삶의 보람이며 삶의 보람이 잘 사는 길이다.

 

그리고 내 주위에 있는 재화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쓰이도록 하는 것이 보시다. 이것이 우리가 두 번째 지켜야 할 삶의 원칙이다.

 

세 번째는 더 좁혀 오면 사람에 대한 거다. 우리는 타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자신의 어떤 이해를 중심으로 해서 쾌락의 도구로 보거나 노동의 도구로 보거나 전쟁의 도구로 본다는 것은 하나의 인격으로 보지 않고 그것을 물질화 시킨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나와 동등한 하나의 사람,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해라. 피부가 검다고 차별해서도 안 되고, 민족이 다르다고 차별해서도 안 되고, 여자라고 차별해서도 안 되고, 종교가 다르다고 차별해서도 안 되고. 가진 것이 없거나 천민이라는 이름으로서 차별해서도 안 된다. 모든 인간은 다 이콜이다. 이게 우리가 세 번째 지켜야할 원칙이다.

 

네 번째는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바로 오래전부터 우리 인류가 쌓아온 많은 경험의 정보를,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경험의 정보를 내가 받아들임으로 해서 나는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 그런데 그 정보를 차단시키거나 왜곡시켜서는 안 된다. 정보는 잘 유통되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믿음이 생겨난다. 그 믿음을 기초로 할 때 우리는 참다운 친구가 되고, 참다운 사랑이 되고, 부모는 자식을 믿고 부모의 역할을 하고, 자식은 부모를 믿고 자식의 역할을 하고, 아내는 남편을 믿고 아내의 역할을 하고, 남편은 아내를 믿고 남편의 역할을 해야 된다. 스승과 제자 간에도 그렇다.

 

오늘날 사회에서 말하는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도 그렇다. 이런 신용이 있는, 신의가 있는 인간관계를 만들어 나아가야 된다. 이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네 번째 원칙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어차피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며, 무엇을 입어야 하며, 무엇을 즐기기도 한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는 습관성이 있는 게 있다. 습관성은 중독성이 되고, 그 중독성은 결국은 나를 그 물질이나 그 사상이나 또는 그 어떤 가치에 종속적인 존재로 자신을 전락시킨다.

 

바로 이러한 중독성이 있는 문화는 우리가 버려야 한다. 그런 물질에 대한 섭취도 그만둬야하고, 그런 어떤 종교, 그런 어떤 가치들도 버려야 한다. 우리는 보다 자신이 더 깨어나는, 그리고 더 주체적이 되는, 더 창조적이 되는, 그런 삶의 방식을 살아가야 된다. 이 원칙을 우리가 지켜야 한다.

 

이 원칙을 지킬 때 우리가 목표로 했던 붓다의 길이 열리고, 또 우리가 나아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길이 아주 손쉽고, 함께 가는 도반들 스승들과의 관계가 화합되고 청정해진다. 함께 가는 대중이 화합하고 청정하기 위해서는 6가지 원칙을 지켜야 한다.

 

첫째는 같은 계율을 같이 지켜야 한다. 사회는 법치주의가 정착되어야 한다.

그리고 의견은 서로 맞추어야 한다. 민주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보시물은 균등하게 나누어야 한다. 경제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아주 중요하다. 이 세 가지가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우리는 우리들이 갖고 있는 정보가 서로 공개되어야 한다. 소위 투명해야 한다. “함께 모여서 살아라.”고 표현이 되어 있다.

 

그리고 말은 서로 자비롭게 해야 한다. 서로를 아끼는 마음, 이해위에서 언어가 쓰여져야 한다. 그리고 자신과 의견이 다르더라도, 자신과 뜻이 다르더라도,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럴 때 이 수행공동체 또는 함께 살아가는 이 사회 공동체가 화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