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8)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제1363회]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큽니다.

Buddhastudy 2018. 2. 13. 21:44


저는 부모를 향한 원망과 분노가 너무 큽니다. 심리 상담, 강연 듣기, 독서 등 노력을 하지만

분노가 제 안에서 저를 괴롭힙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을까요?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살아 계세요. 처음에는 어머니만 원망했고 최근에 심리 상담 받고 공부를 하면서 아버지도 같이 원망하게 됐어요.//

 

부모님 돌아가셨어요? 살아 계세요? 누가 미워요? 아버지를 원망해요? 어머니를 원망해요? 둘 다 원망해요?

고치러 가서 병을 더 얻었네. 하하하. 잘했어요. 오늘 그러면 나하고 얘기하다 하나 더 얻지. 할머니까지 미워하지. 하하하.

그럼 나하고 오늘 얘기하면서 친할머니까지 해서 4명으로 합시다. 둘이만 하지 말고.

 

아버지를 원망하는 가장 큰 거 한 두 가지만 얘기해 봐요. 그냥 생각나는 대로.

그게 원망이에요? “왜 우리 어머니를 네가 욕을 했나.” 이거에요? 우선 하나씩 하나씩 해봅시다. 아버지부터 해보자. 아버지를 원망하는 첫 번째 원인은 우리 엄마 욕을 너무 많이 했나. 내가 듣는데서. 그런데 자기 어머니도 원망한다며? 그럼 어머니는 욕 얻어먹을 여자잖아.

 

나한테 욕 얻어먹을 여자인데 나는 어린애도 나를 낳아서 키워준 애도 원망할만한 여자라면 남자가 볼 때는 얼마나 욕을 하고 싶겠어. 아빠는 자기 성질이 나서 욕했지. 자기 아이 키우려고 한 게 없어. 그런데 왜 아버지를 뭐라고 그래. 자기가 밖에 가서 얼굴 내놓고 다니다가 좀 탔어. 햇빛 때문에 탄 것은 사실이야. 그럼 자기 잘못이오? 햇빛 잘못이오?

 

그러니까 우선 아버지 문제만 하나 보면 상식적으로 한번 생각해 봐. 우선 나하고 엄마 사이에서 보통 그 아버지하고 엄마의 관계에서는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특별히 은혜를 입은 게 없잖아. 그러겠지. 그런데 결혼할 때 덕 보려고 하나? 손해 보려고 하나? 살아보니 별로 덕 볼게 없다. 이 말이야.

 

그런데 자기는 엄마한테 덕을 봤나? 손해를 봤나? 좀 따져보면. 엄마한테. 무슨 손해를 봤는데.

아니 글쎄, 내가 자기한테 돈 천원만 빌려달라니까 오백 원 밖에 없어요.” 하고 나한테 오백 원을 줬어. 그럼 내가 기분 나쁘지. 그지? 기분 나쁜 것은 이해가 되는데, “천원 달라는데 왜 오백 원 밖에 안 주나.” 이해가 되는데.

 

그러니까 어쨌든 자기가 나한테 이익을 줬어? 내가 자기한테 이익을 줬어?

그래서 물어보는 거요. 자기가 어머니한테 덕을 봤느냐? 손해를 봤느냐? 이 말이오. 감사까지는 필요 없고, 내가 언제 감사하라고 그랬어. 그러니까 덕을 누가 봤느냐? 이 말이오. 두 사람 사이에서. 서로 주고받는데, 내가 어머니한테 해준 게 더 많고, 어머니가 나한테 손해를 끼친 게 더 많으냐. 어쨌든 두 사람 사이에서는 내가 덕본 게 더 많으냐 이 말이오.

 

으흠. 그러니까 내가 덕 본 게 더 많으면서도 덕은 좀 봤는지 몰라도 어머니를 내가 원망하잖아. 그럼 덕 보고도 욕을 하면 성질이 더럽든 뭐가 더럽든 더러운 게 있으니 그럴 거 아니야. 이 사람이 내 돈을 빌려가서 안 갚아서 내가 욕하는 것은 돈 때문이라고 하지만, 저 사람이 나한테 돈을 지원해 줬는데도 내가 저 사람을 욕을 하면 그럼 저 사람은 성질이 더럽든 딴 게 대게 더러운 게 있을 거 아니야. 안 그래?

 

덕을 본 사람이 오히려 상대한테 욕을 하니까. 상식적으로 그냥 우리가 이치를 생각해 보자. 내가 저 사람한테 돈을 빌려줬어. 지원을 해줬어. 그런데 내 맘에 안 들어 내가 욕을 할 때는 딴 거도 있겠지만 일단은 내가 이익을 봤는데도 내 맘에 안 들게 하니까 내가 욕을 할 수도 있다. 이해가 되잖아.

 

그런데 저 사람이 나한테 돈을 많이 지원을 해 줬어. 경제적으로나 이익만 따지면 내가 훨씬 덕을 봤다. 이 말이오. 그런데도 내가 저 사람을 막 욕을 한다는 것은 보통은 그렇게 욕을 안 해. 덕 본 사람이. 손해 본 사람이 욕하지. 안 그러겠어?

 

자식은 부모한테 주로 덕을 봐요? 손해를 봐요? 도대체 샘 법이 어떻게 되는 거야? 부모하고 자식하고 있다면 이익적인 측면에서 자식이 부모한테 덕을 봐요? 부모가 자식한테 덕을 봐요? 완전히 늙어서 죽을 때 되어서 자식이 돌본다하면 몰라도 보통은. 자식이 덕을 봐?

 

그러면 엄마하고 나하고 아빠하고 엄마하고 사이에서 볼 때, 내가 엄마로부터 덕을 많이 봤을까? 아빠가 엄마로부터 덕을 많이 봤을까? 그래.

 

내가 덕을 보고도 욕을 하는데

덕 안본 아버지는 욕을 더 하는 게 당연하다.

 

이 말이야. 제 말 이해하셨어요? 당연한 건데 짝짝짝짝 박수치면서 너무나 당연하다. 나도 욕하는데 당신이야 욕하고도 남는다.” 이래야지 왜 자기가 아버지를 미워해? 도저히 이치에 안 맞는 짓이잖아.

 

덕 본 나도 엄마를 욕하면 덕 못 본 아버지는 욕을 하고도 남지. 어린 나도 욕을 하는데, 어른이 얼마나 욕하겠어. 그리고 또 심리적으로도 내가 막 누구를 욕하는데 옆에서 같이 욕해주면 기분 좋잖아. 그런데 나는 욕해도 되지만 넌 욕하지 마라.” 이것 때문에 미워하는 거야? 왜 그래. 도대체 내가 들으면서 이치에 안 맞아서 그래. 우선 엄마는 놔놓고 아버지가.

 

스님이 말한 이치로는 맞는데, 나는 아버지를 미워하는 심리가 일어났잖아. 그거는 정신 질환이지. 이치에 안 맞는 게 일어났으니까. 그러면 이것을 누가 이 뭐꼬?” “물이다.” 어떤 사람은 사이다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소주 아니에요?” 사이다나 소주라 할 때는 저 사람 잘 못 봤나?” 틀리기는 틀리지만 잘 못 봤나. 이렇게 되죠. 그런데 금이다.” 이러면 어때요? “저게 또라이 아이가.” 이렇게 생각이 들잖아. 사람이. 상식적으로.

 

그러니까 내가 손해를 보고 그 사람을 욕하면 욕할만하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덕본 사람이 욕을 하니까 좀 이해가 안 되는데, 덕 봤다고 욕을 하지 말라는 소리는 아니야. 덕 본 사람도 욕한다면 손해 봤다고 생각하는 사람 욕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이 말이야. 아버지 행동은 너무 당연하다. 이 말이야. 그런데 왜 자기가 그것 때문에 아버지를 미워한다는 것은 말이 안 맞는다는 거야.

 

딴 것 때문에 미워하는 것은 몰라도. “내 앞에서 엄마 욕했다.” 그러면 그것을 합리화 시키려면 나는 욕할 자격이 있지만 너는 욕할 자격 없다.” 이웃 사람이면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나는 우리 엄마니까 욕하지만 너 왜 남이 왜 우리 엄마 욕하나?” 이렇게 말할 있는데, 내가 나는 우리 엄마한테 욕할 수 있지만, 너는 우리 엄마한테 욕하지 마라.” 내가 이렇게 얘기하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그러냐.

 

남자가 자기 아내한테, 아내가 자기 남편한테 욕하는 것은 좋은 것은 아니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자식이 부모를 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자기가 아버지를 미워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거야.

 

그러니까 병이라잖아. 이치에 안 맞게 정신이 지금 마음이 작용을 하잖아. 전에는 가만히 얘기 듣고 보니 전혀 이치에 안 맞다. “, 그렇구나. 그것은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하고 버려야 된단 말이야. 정신이 올바로 박힌 사람이면. 내가 잘못 이해해서 미워했는데, 오늘 스님하고 대화하다 보니까 , 진짜 내가 얼토당토 않는 짓이네. 내가 욕하니까 아버지가 그 여자 욕하는 것은 당연한 거고, 자식도 욕하는데 남편이 욕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건데, 내가 왜 그런 아버지를 미워했을까? 다른 것 가지고 미워했다는 것은 따져봐야 되지만 이건은 안 맞구나. , 그럼 이 건은 오케이. 됐습니다.” 이래야 된단 말이야. 그런데도 계속 미워집니다. 그러면 병이지 뭐.

 

 

, 그럼 엄마로 돌아가자. 엄마가 뭣 때문에 미운데? 솔직하게 얘기해 봐요. 자기 느낀 대로.

어쨌든 엄마가 자기 어릴 때 자기한테 화를 많이 내고 짜증을 많이 냈다. 이거 아니오. 그죠? 그래. 그건 애기한테 나쁜 영향을 준 것은 맞아요. 그건 사실이오. 그런데 엄마가 나를 일부러 나쁘게 하려고 짜증을 냈을까? 나쁘게 하려는 것은 아닌데, 자기도 살기 힘들어서 짜증을 냈을까?

 

그래. 아들을 못 낳아서 그랬든, 남편이 애를 먹여서 그랬든, 남편이 너무 쌍소리를 해서 그랬든, 내가 볼 때 엄마는 굉장히 위대한 사람 같지만, 어릴 때 봤을 때는 그렇지만, 지금 내가 서 엄마 나이 되어보니까, 나도 아직도 찔찔 짜고 이렇게 살잖아. 그지? 그러니까네, 자기도 지금 애 있는데도 찔찔 짜고 사는 거 보면, 엄마도 어릴 때 찔찔 짜고 살았을까? 안 살았을까? 자기도 지금 살기 힘든데, 애까지 옆에서 자꾸 우니까 신경질 날까? 안 날까?

 

그래서 엄마도 불쌍한 사람이오.

같은 여자로 생각해 보면.

 

시집와서 남편 제대로 사랑 못 받고, 시어머니한테 구박받고, 아들 못 났다고 구박받고, 나이가 무슨 50, 60도 아니고, 스물 몇 살에. 그런데 애는 계속 울지, 그러니까 그 여자도 그냥 몸부림을 친 거요. 괴로워서. 그러니까 남편을 때릴 수도 없고, 시어머니를 때릴 수도 없고, 시어머니한테 악을 쓸 수도 없고, 그러면 악쓸게 누구 밖에 없다? 그렇다고 벽보고 악을 쓸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갓난 애기 보고 악 쓸 수도 없고, 조금 큰 거 보고 악을 쓸 수밖에 없잖아. 자기도 키우면 그렇게 돼. 사람이. 그래서 어머니가 잘 한 것은 아니야.

 

그러니까 어머니가 잘했다. 이 얘기는 아니고 잘못했는데,

그 어머니 수준에서는 그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는 거야.

 

아니야. 그런 얘기 한 적이 없어. 자기가 엄마를 용서할 게 뭐가 있노? 자기한테 엄마가 뭘 잘못했는데 용서를 해? 자기는 엄마가 영어를 했으면 내가 영어를 했을 거 아니냐.” 그 말은 맞아. “왜 영어를 안 해서 내가 영어를 못하게 만들었나. 이거 용서해줄까. 이거.” 내가 그렇게 생각은 할 수 있는데, 엄마가 영어 못하니까 나도 그 밑에 엄마가 한국말만 하니까 나도 그 밑에 자라면서 한국말만 배웠단 말이야.

 

우리 엄마가 나 어릴 때 영어를 했으면 내가 뭘 배웠을까? 영어를 배웠을 거 아니야. 그런데 우리 엄마가 한국말 밖에 못했기 때문에 한국말 배운 거야. 우리 엄마가 내 어릴 때 살기 힘들어서 짜증을 내고 성질을 내고 해서 나도 이렇게 짜증내고 성질내는 까르마를 갖게 된 거야. 그게 무슨 좋고 나쁘고의 개념이 아니야. 그러나 다만 불편해.

 

우리 엄마가 영어를 했으면 나도 영어를 할 수 있었는데 영어를 못 배워 새로 영어를 하려니 힘들 듯이, 그게 내 한계이듯이, 엄마가 마음을 편안하게 부부생활 하고 결혼 생활 했으면 나도 거기서 낳아서 편안했을 텐데, 엄마도 그 환경에서 살기 힘들어서 악을 쓰다 보니 거기서 태어난 나도 이렇게 심리적 불안을 갖게 되었다 이 말이야. 옛날 말로하면 운명이면 운명이고 천성이면 천성이야. 무슨 방법이 없어.

 

그러니까 자기가 엄마를 원망하는 것은 엄마가 왜 영어를 안 해서 내 영어 못 배웠나이 얘기랑 똑같아. 다른 집과 비교해보니까 우리 친구는 엄마가 외국 유학 갔다 와서 영어를 잘하는데, 왜 우리 엄마는 영어를 몰라서 내가 이렇게 힘드노.” 이런 얘기하고 같은 거 아니야.

 

엄마가 무슨 달리 선택이 없었다는 거야. 그 할머니, 그 시집간 그 조건에서. 엄마가 그때 법륜스님을 만나서 수행을 했으면 달라질 수가 있었을 텐데, 아무도 지도해 주는 사람도 없고, 시집을 가서 아들 못 낳는다고 구박을 받고, 이렇게 한 상태에서는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어.

 

그런데 만약에 자기 없었으면 거기 살았을까? 도망가 버렸을까? 애들 없었으면. 그럼 거기 왜 살았을까? 그러면 두 부부가 아주 사이가 좋아서 너무너무 사이가 좋아서 거기서 태어난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사랑 받았다. 이렇게 말하지. 보통. 그럼 이것은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은 거야? 부모 저희가 좋은데 그냥 끼어서 살은 거야?

 

내가 있든지 없든지 저희 둘은 살겠나? 안 살겠나? 저희 사이가 좋으면 내가 있든지 없든지, 아들이 있든지 없든지, 아이가 있든지 없든지 저희 둘은 잘 살까? 안 살까? 살겠지. 애 때문에 사는 것은 아니잖아.

 

그런데 두 부모가 사이가 나쁜 데, 엄마가 도망 안가고 살은 것은 남편 때문에 살았나? 나 때문에 살았나? 그러면 사이 안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애가 엄마한테 사랑을 더 받았나? 사이 좋은 부부 밑에서 태어난 아이가 엄마의 사랑을 더 받았나?

 

아니 그러니까 엄마 아빠가 사이가 좋아서 거기서 내가 태어났으면 이런 심리 불안 같은 거 안 일어난다. 이건 맞는 애기야. 그런데 엄마가 나를 사랑 안했다는 것은 안 맞는 얘기라는 거야.

 

왜냐하면 사이가 좋은 것은 저희가 좋아서 살아서 나도 거기에서 덕을 본 건데, 환경적 덕을 봤지만, 엄마의 사랑이 지극한 것은 아니었다는 거야. 엄마는 남편한테 사랑이 지극했지. 그런데 부부 사이가 엄청나게 나쁜데도 엄마가 지금 같이 살았다는 것은 남편 때문에 살은 게 아니라 누구 때문에 살았다? 자식 때문에 살았으니까 내 입장에서 볼 때는 엄마의 사랑이 편안한 집에서 자란 아이보다 엄마의 사랑은 더 받았다는 거야.

 

제 말 이해가 되요? 안 돼요? 그러니까 부잣집에서 태어나서 그 아이를, 예를 들면 옛날에 왕자로 태어났다면 엄마가 키우나? 유모가 키우나? 유모가 키우잖아. 그래서 그 집에서 태어나서 부자가 되거나, 재벌2세가 되거나, 왕이 괴거나 이것은 우리가 볼 때는 금수저로 좋아 보이잖아.

 

그러나 엄마의 사랑이라는 측면에서는 엄마의 사랑을 많이 받았나? 적게 받았나? 적게 받았어. 그게 유리 불리를 떠나 엄마는 나에게 그렇게 큰 사랑을 준 것은 아니야. 유모가 했거나 딴 사람이 한 거지. 할머니가 했거나. 그런데 자기 같은 케이스는 엄마가 오직 자기 때문에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말이야. 시어머니도 안 좋고, 남편도 안 좋고, 경제도 안 좋은데.

 

그 성질을 내 가면서, 짜증을 내가면서, 자기한테 짜증내고 두드려 패고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엄마의 성격이 못 견뎌서 한 행위고, 애가 밉거나, 애를 사랑 안 해서 한 거는 아니라는 거야. 이것은 사랑을 너무 했기 때문에 거기 살아준 거야. 만약에 사랑을 안했으면 나가버리지 뭣 때문에 거기서 사노? 애들이야 고아원에 가든지, 새 엄마가 와서 키우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자기가 그 엄마,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 아이, 자기 새끼라고 그거 못 버려서, 그거 키우려고 한 엄마의 생각을 좀 해 봐. 그걸 생각하면 자기가 엄마한테 뭘. 그러니까 영어 몰랐다고 엄마 미워하고, 집안이 편안 안했다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좀 편했으면 더 좋겠다. 그것은 이해가 된다. 이 말이오. 자기가 따뜻한 남쪽에서 태어났으면 수영도 배우고 뭐 했을 텐데, 왜 산골짜기에서 내가 태어나서 수영도 못 배우고, 그것은 맞는 말인데, 그런데 거기서 태어난 것을 어떻게 해.

 

그것은 엄마의 사랑 하고는 관계없다. 이거야. 엄마가 산속에서 사니까 자기도 산속에서 태어나서 살은 거고, 엄마가 바닷가에 사니까 나도 바닷가에 태어나서 수영할 기회를 가져서 수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산에서 태어난 것이 불리한 것은 맞다 이거야. 그러나 그것이 엄마의 사랑이 부족한 것은 아니라는 거야.

 

그런데 자기가 뭘 엄마를 용서를 해줘. “,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진짜 몰랐구나. 그 욕설이나 짜증 그것만 딱 사로잡혀서 진짜 엄마가 나를 얼마나 목숨같이 아끼고 살았는지 이것을 자기가 모르니까 지금 이런 거야. 그러니까 어릴 때는 그럴 수가 있다는 거야. 어릴 때는. 어릴 때는. 사랑 보다 사탕이 더 중요하니까.

 

제가 인도에서 지금 애들 문맹, 학교가 없어서 애들을 불러 모아야. 모아서 사탕도 나눠주고 이렇게 하는데, 학교 오라면 안 와요. 애들이. 사탕 주면 와. 그러면 내가 사탕 주는 게 돈이 많이 들까? 공부 시키는 게 돈이 많이 들까? 공부 시키려면 학교 건물 지어야지. 학용품 다 구입해지. 교복도 줘야지, 밥도 줘야지. 선생 월급도 줘야지. 돈이 엄청나게 들어. 사탕을 주거나 빵을 주는 거, 이건 사실은 거기에 비하면 1/100도 안 드는 일이야. 그런데 애들은 어느 거 좋아해? 사탕 주는 거 좋아 해.

 

동네에 있는 학부형들도 공부 시키는 거 별로 안 좋아해. ? 아무도 공부를 해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공부하면 뭐가 좋은지를 아무도 몰라. 그러니까 당장 옷이나 쌀을 달라는 거요. 그러니까 그들이 원하는 거 주는 거 보다 100배의 더 돈을 드는 것을 줘도 자기들은 모르니까 그것은 고마워 안하고, 당장 달라는 거 안준다고 막 그냥 욕을 욕을 하고 그러거든.

 

그런데 엄마라는 것은 그런 거야.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거, 당장 달라는 거 알아도 이 아이들에게 먼 미래를 생각하면 사탕도 물론 줘야 되지만, 공부가 더 중요하잖아. 그래서 내가 늘 테스트를 해요. 공부 잘하면 사탕 더 주고, 이렇게 억지로 공부를 시키다. 한 몇 달 지나면 애들 반을 나눠요. 사탕 먹을래? 공부할래? 이래요. 볼펜 줄까? 사탕 줄까?

 

그러면 처음 온 애들은 전부 사탕 쪽으로 줄 서고, 좀 다닌 애들은 사탕도 먹고 싶고 볼펜도 받고 싶고 이런 거요. 그러니 애들이 줄을 이쪽에 섰다가 조금 있다가 저쪽에 있다가 왔다갔다. 이래. 내가 가만히 보면.

 

그러면 아예 공부 쪽에 줄 선 애가 있고, 아예 사탕 쪽에 줄 선 애가 있고, 가운데서 두 개 다 먹으려고 왔다 갔다 하는 애들도 있고, 시간이 조금 흐르면 어떠냐? 이제 큰 애들은 공부 쪽으로 어린 애들은 사탕 쪽으로. 애들은 사탕주고 먼저 보내고, 공부 쪽으로 줄 선 애들은 사탕을 안 줄 것처럼 해서 볼펜 주고. 그래도 애들은 줄은 서도 사탕도 먹고 싶나? 안 먹고 싶나? 먹고 싶으니까 여긴 10개주고, 여긴 5개 주고, 3개 주고, 이렇게 해서 조금씩 조금씩 바꾸어서 학교 오는 연습하고.

 

그런데 위에 한 애만 형이 학교오거나 밑에 애는 문제가 별로 안 돼. 학교 가는 집안에 분위기가 되면 밑에는 그냥 형 따라 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연구를 해보니까 처음에는 초등학교를 만들어서 문맹퇴치를 하려는데, 이 문맹 퇴치가 아무리 해도 절반을 입학시키기가 어려워. 그래서 마을에 유치원을 만들어서 유치원을 만들면 유치원에서는 딴 거 없잖아.

 

부모도 초등학생만 되면 일을 시켜야 돼. 그래서 유치원에 안 보내려고 그래. 그런데 유치원 아이들은 유아나 유치원 아이들은 누가 봐주면 좋으나? 안 좋으나? 좋아. 일도 할 줄도 모르고. 그러니까 유치원 동네에 모아서 애들 사탕주고 뭐주고 노래 부르고 놀면, 그럼 얘들은 뭐하는 줄 알아? 그러니까 2년이나 3년을 학교 오는 연습하는 거야. 그럼 유치원에 한 3년 다녀서 같은 친구가 3년 되었는데 초등학교 들어간다 해서 가면 다른 친구도 가니까 자기도 따라갈까? 안 갈까? 따라가야 돼.

 

유치원에서 배우는 것은 특별히 배우는 게 아니라, 초등학교 가는 것을 당연시 하는 것을 배우는 거야. 당연시 하는 것. 왜냐하면 누구도 학교 가라고 부모도 말 안 해주고, 언니도 말해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이렇게 해서 한번 굴러가기 시작하면 언니가 생기면 밑은 따라오고 이렇게 되거든.

 

그래서 내가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엄마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자기가 알아야 된다는 거야. 그런데 자기가 엄마를 미워하니까 엄마가 볼 때는 얼마나 괘씸할까. 자기는 뭐 엄마한테 사과 받으려고 얘기 꺼냈는데 엄마는 자기한테 사과 받으려고 그래. 그래서 갈등이 자꾸 더 생기는 거야.

 

알기는 알구나. 그러니까 지금부터 절을 하면서 엄마 진짜 그때 내 나이보다 더 어렸을 텐데 얼마나 살기 힘들었어요. 그래도 나를 못 버려서 그 집에서 그래도 눈물을 머금고 짜증 내가면서 살아서 키워 줘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자꾸 절을 해봐. 그냥 절한다고, 부모니까 존경해야 된다. 이런 것 갖고는 안 돼.

 

그것도 하고. 그것은 그것대로 하고.

너무 빨리 하려고 하지 말고, 그러니까 엄마를 원망하는 게 안 고쳐져도 사는 데 지장 없어. ? 영어를 좀 몰라도 사는데 지장 없듯이, 수영할 줄 몰라도 사는데 지장 없듯이, 엄마를 미워하는 마음이 안 없어져도 사는데 지장이 없어. 그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미워하려고 한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형성 된 거잖아. 안고 살아도 돼. 안고 살아도 되는데, 그러나 그것을 벗어나려면 엄마가 얼마나 그 피눈물을 흘리며 나를 키운지 알면 저절로 치유가 돼.

 

지금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야. 무지. “요면, 다른 애는 뭐해줬는데 나한테 안 줬다. 돈 달라니까 안 줬다.” 요 앞면만 보고 악을악을 쓰는 거야. 그런데 그 엄마가 나를 위해서 자기 평생 헌신했다는 그것도 그냥 헌신 한 게 아니라, 그 압박과 설움 속에서 살았다는 그 뒷면 까지 보게 되면, 이제 컸으니까 뒷면도 봐야지. 계속 어린 애 같은 생각만 하는 거야.

 

아직도 “710살 중고등학교 다닐 때 뭐 안 해줬다.” 요것만 계속 붙들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엄마의 사랑이 지금 필요한 거야. 그래서 엄마한테 뭐라고 꺼내니까 엄마는 다 큰 게 아직도 이 짓한다고 악을악을 쓰니까 상처가 더 나고 그래. 자기는 이제 컸으니까 엄마가 나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엄마를 다독거려주고 엄마한테 감사를 표하고, 그렇게 하면 자기 치유가 되지.

 

스며들든 안 스며들든 그게 뭐가 필요해? 원래 여보 나 사랑해?” 이러면 경상도 남자는 말을 못 해. 그런데 사랑하더다도 그래 사랑해.” 이게 효과적이야. 말을 안 하면 상대가 의심해. “네가 뭐 안하니까 말은 못하지, 하면 말하면 되지 않냐?” 이래. 그런데 경상도 남자는 뭐라고 그래? 자꾸 그렇게 부르면 꼭 말로 해야 아나?” 이러잖아. “딱 보면 알지.” 그러니까 말로 하면 도움이 돼. 사람이니까.

 

 

그래서 스님이 얘기하잖아. 여러분들이 부모를 안 모시는 것은 여러분들의 자유다. 그런데 부모를 어떻게 키웠든 부모를 원망할 것은 없다. 원망할 것은. 원망 한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무지에요. 섭섭할 수는 있는데, 아까처럼 천원 달라는데 오백 원 줬다고 섭섭한 것은 손해를 끼쳐서 그런 것은 아니야.

 

그래서 원망은 하지마라.’ 그러지, ‘부모를 공경하라.’ 이 말은 안하잖아. 스님이. 하는 꼬라지 보니 공경할 것까지야 뭐 있겠어. 그죠. 그러나 원망할 사람은 아니다.

 

길거리 저 지나다니는 사람

나하고 아무 관계없는 사람도

내가 원망 안하는데,

내가 덕본 사람을 뭣 때문에 원망을 해.

 

다만 문제가 있다면 내가 달라는 만큼 안 줬다. 이게 문제지. 그것은 이해는 돼. 그러나 그것은 원망할 대상은 아니라는 거야. 여러분들이 스님한테 질문을 했어. 시간이 없어 그냥 갔다. 스님 원망할 일은 아니라는 거야. ? 내가 무슨 돈을 받았나? 자기가 여기 올 때 입장료를 냈나? 왜 원망할 일이야?

 

그러니까 기대를 했는데

기대가 안 되어 좀 섭섭하다.

 

이건 이해는 되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그러나 이것은 원망할 일은 아니라는 거야. 그것은. 그런데 여러분들이 마치 그것을 원망하는 것 같아. 그럼 나보고 원망하면 스님이 어떻게 생각할까? “미쳤나? 네가 뭐 나한테 돈을 냈나? 네가 뭐했다고 네가 나한테 원망 하노? 난 아까 2시간이나 얘기 실컷 하고 돈도 일 푼 안 받고 갔는데.” 이렇게 된단 말이야. 사람도. 엄마도.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원망할 일은 아니다. 이해 하셨어요? 원망할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부모를 원망은 하지 마라. 이 말이야.